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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감정서랍 Dec 05. 2023

한 세대가 종말하고 있다

"결제하기 전 카드를 먼저 삽입해주세요."

인위적인 높낮이로 여성이 말했다.


저렴하기로 유명한 유통판매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을 당시 이야기다.


4차 산업혁명이니 뭐니 해서 세상은 급변하고 있었다. 단순반복 노동은 기계가 대신했다. 굳이 사람이 할 필요 없는 서비스업도 예외는 아니었다.


키오스크라 불리는 자동화 기계는 다들 친숙하리라.


일하던 곳은 규모가 큰 탓에 키오스크가 여러 대 있었다.


고객이 물건을 가져와 직접 스캔하고 결제하는 방식이었다. 내가 하는 일은 기계가 내뱉는 오류를 해결하거나, 사용이 미숙한 고객을 도와주는 것이었다.


아니면 기계에 불만을 품은 러다이트 세대를 상대하거나.


그 날도 어김없이 사람으로 붐볐다. 총 6대의 키오스크가 연신 삐빅 대며 영수증을 토해내고 있었다.


나는 길게 늘어선 행렬을 헤집으며 순서를 정해주고, 오류를 해결하고, 때때로 라이터를 구매하는 고등학생을 쫓아냈다.


고객들은 잠시라도 한눈을 팔면 물건을 훔치거나, 기계가 말을 듣지 않는다며 화를 내기 일쑤였다.


머리를 꽝 꽝 울려대는 스캔 소리와 말소리 때문에 내 신경은 잔뜩 곤두섰다. 우는 아이를 달래며 키오스크와 씨름하는 여인을 돕자 한차례 더 계산 인파가 몰려왔다.


맙소사, 차라리 편의점 알바를 할 걸.


그렇게 생각하던 와중이었다.


대개 당황으로 시작해 분노로 끝나는 게 키오스크지만, 어느 한 계산대는 달랐다.


아까부터 좀체 자리를 비켜주지 않는 남자가 있었다.


이렇게 바쁜데 뭐하는 짓거리인가, 싶었다. 이기적이고 배려없는 인간. 이미 나는 내 안에서 그를 그렇게 결론지었다.


불평하는 행렬을 동료에게 맡기고, 나는 그에게 다가갔다.



제가 좀 도와드릴까요?


짜증 반, 기계적인 친절 반이 섞인 묘하고 이상한 말투였다. 어쩌면 나도 키오스크가 아닌가 잠시 생각했다.


미안합니다...


그의 첫마디였다. 쇳가루 뱉어내는 듯한 목소리였다. 회색 베레모를 쓰고 녹색 가디건을 걸친 노인이었다. 그는 내 얼굴을 쳐다보지도 않고 연신 사과만 거듭했다.


뭐가 그렇게 죄송하단 말인가.


키오스크는 첫화면에서 넘어가지도 못하고 있었다. '시작하기' 버튼이 점멸하고 있었지만 노인은 어쩔줄 몰라했다.


결제 뭘로 하세요?


현금은 유인 계산대에서 해주기 때문에 늘 묻는 말이었다.


카, 카드...


그는 말을 더듬거리며 흐렸다. 불행히도 카드결제는 키오스크로 해결해야 한다. 원칙이니 어쩔 수 없다.


제가 도와드릴게요.


노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쌀쌀한 날씨였지만 그의 이마에 땀이 송골 맺혀있었다. 이 남자가 언제부터 여기서 애를 먹고 있었는지, 나는 눈치채지도 못했다. 10분? 20분은 서있었을까?


나는 그의 손에서 카드를 뺏어들고 화면을 눌렀다.


"결제수단을 선택해주십시..."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카드를 꽂았다. 화면은 금세 봉투 선택란으로 넘어갔다. 노인은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봉투 뭘로 하시겠어요? 소, 대 있어요.


노인은 한동안 대답이 없었다. 나는 시선을 화면에 두고 재차 물었다.


고객님, 봉투 사이즈요.


성깔 있는 고객이라면 득달같이 달려들었을 말투였다. 그러나 노인은 침묵을 일관했다.


고객님?


나는 그제서야 노인에게 고개를 돌렸다. 노인은 나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얼굴에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세월이 굽이친 흔적이 곳곳에 주름잡고 있었다. 목에는 수술자국 같은 흉터가 남아있었다.


금색 얇은 테 안경이 파르르 떨렸다.


죄송합니다, 내가 눈이 잘...


그는 또 내게 사과했다. 무엇을 사과하는지는 몰랐다. 그는 자신의 시력이 젊을 때와 같지 않다고 운을 뗐다.


참, 젊을 때는 그래도 잘 보였는데...


허나 나는 그의 시시콜콜한 옛날 얘기를 들을 때가 아니었다. 고객들의 아우성에 동료는 여전히 진땀빼고 있었다. 게다가 매장 전화까지 울리기 시작하니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었다.


나는 어서 이 고객을 떼어내고 복귀해야 했다.


하하, 다 그런거죠, 뭐. 봉투 사이즈는 뭘로 하시겠어요?


그의 시선이 다시 키오스크로 꽂혔다. 그는 안경을 벗었다 썼다 반복했다.


사이즈가....뭐가 있다구요?


소, 대 사이즈가 있어요. 중자는 없구요.


나는 그가 계산대에 내려놓은 상품들을 죽 훑어봤다. 알람시계 하나, AA건전지 둘, 고양이 참치캔이 전부였다.


소자로 드릴게요.


나는 제멋대로 봉투 소를 눌렀다.


200원 추가 있구요.


노인은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핸드 스캐너를 들어 상품을 스캔했다.


저희는 바코드 찍는 게 아니구요. QR코드를 찍어야 해요.


어차피 들어봤자 무슨 말인지 몰라요, 노인은 내게 눈빛으로 말했다. 나는 딱히 개의치 않았다. 그냥 내 아르바이트의 일환일 뿐이니까. 나중에 설명 안해줬다고 컴플레인 걸리면 골치만 아프니.


다 찍으셨으면 우측 하단에 있는 물품 갯수, 가격 확인해주시구요.


나는 (친절하게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설명했지만 그는 아예 눈을 지긋이 감고 있었다.


고객님?


예...알아서 해주세요. 젊은 양반이 엄청 잘하네.


나는 대충 고개를 끄덕이고 결제하기 버튼을 눌렀다. 키오스크는 포인트 적립 전화번호를 입력하라며 재촉했다.


멤버쉽 아이디 있으세요?


난 그게 뭔지 몰라요...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나는 '포인트 적립안함'을 눌렀다. 휴대폰으로 어플을 깔아서 회원가입을 직접 해야하니, 키오스크를 다룰줄 모르는 노인에게 아이디가 있을 리 만무했다.


계산이 끝나고 카드를 뽑자 영수증이 나왔다. 나는 그 둘을 노인에게 건넸다.


여기, 카드랑 영수증이구요. 봉투 소자는 제가 지금 가져다 드릴게요.


뭐, 봉투를 가져다 주는 건 내 나름의 호의였다. 불똥같이 튀어오른 불친절함이 미안해졌다는 이유도 있었다.


고마워요...


노인이 쇳소리를 내며 중얼거렸다. 나는 봉투 소자를 그에게 건넸다. 그는 주섬주섬 물건들을 담다 말고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저기...


네?


다시 인파로 복귀하려던 나에게 그가 또 말을 걸었다.


미안한데...이거, 시계 밧데리를 어떻게 갈아야 하는지...


산 넘어 산이었다. 그는 조막만한 알람시계 박스를 두 손에 쥐고 어찌할 바를 몰라했다.


미안합니다.


노인이 또 사과했다. 나는 그에게 다시 다가가 알람시계를 뺏어 들었다. 그리곤 주머니에 있는 커터칼로 능숙하게 포장박스를 뜯었다.


고객님, 이거 제가 뜯었다고 불량 신청하시면 안돼요?


아르바이트 4개월 차의 능글맞은 농담에 그는 잠시 긴장을 푼 듯 허허 웃었다.


내, 내가 뭘 불량 신청을 하겠어요. 고맙지, 뭘...


그는 시계를 꺼내는 내 손을 유심히 바라볼 뿐이었다. 나는 건전지도 뜯어서 시계에 넣었다. 숫자가 깜빡 거리며 시계가 작동되고 있음을 요란하게 알렸다.


에잇, 선심이다. 인파가 그새 한산해진 까닭도 있었다. 휴대폰을 꺼내 현재 시각을 확인하고 그의 시계를 조정했다.


시간도 지금으로 잘 맞춰드렸어요. 알람 설정방법은 설명서 보고 따라하시면 돼요.


나는 포장박스를 고이 접고, 설명서와 시계를 그에게 건넸다. 깨알만한 설명서를 그가 읽을 수 있을까, 잠시 걱정했지만 그건 내 손을 떠난 일이었다.


참, 고마워요...젊은 양반이 참 친절하게 잘 도와주네.


노인이 머쓱한 듯 말했다. 그의 눈은 시계 액정을 향했다. 그의 주름진 손이 시계를 더듬거리며 버튼을 외우고 있었다.


내가 당신만할 적에는 시계공을 했어요.


노인이 작게 중얼거렸다.


갑자기? 알람시계를 보고 추억이라도 떠올린 건가? 그래서 그 뒤는? 무슨 이유로 시계공을 그만 뒀지? 알람시계 건전지를 갈아끼우는 방법조차 모르는 이유는?


평소 이야기를 좋아하던 내 안에서 질문이 산더미처럼 쌓였다. 그 찰나의 순간에, 천재로 추앙받던 시계공과 그를 찾아간 대륙의 황제 이야기를 지어냈다. 시계공을 질투한 간신이 시계공의 눈에 저주를 걸어 시야를 빼앗는 와중이었다. 그리고 황제는....


어찌됐든, 이젠 우리가 헤어질 시간이었다. 나는 내 일을 해야했고, 그도 그래야 했다.


늙은 시계공은 종이봉투를 부스럭대며 문으로 향했다.


세상이 너무 빨리 변해요.


자동문이 열릴 때 그가 읊조렸다. 쌀쌀한 바람이 훅 끼쳤다. 노인은 밖을 나서 유유히 멀어져갔다.


뒤를 돌아보자 동료가 이미 수많은 인파를 훌륭하게 해치운 후였다. 갑자기 찾아온 여유에 나는 머릿속에서 그의 마지막 말을 굴려댔다.


세상이 너무 빨리 변해요.


나는 중학생까진 버튼 누르는 휴대폰을 썼다. MP3도 있었다. 이후 잡스가 스마트폰을 발표했다. MP3는 거의 멸종했다. 책도 태블릿으로 본다. 손목 시계는 (대부분) 스마트 워치로 대체됐다.


늙은 시계공은 시력이 나빠질 때, 사람들이 더 이상 아날로그를 차지 않을 때 무엇을 생각했을까.


세상이 너무도 빨리 변한다.


갑자기 코끝이 시렸다. 이는 얄팍한 동정도 아니요, 우리 할아버지 할머니가 떠올랐기 때문도 아니었다. 조금 더, 형용할 수 없는, 같은 인간으로서 느끼는 동질감 그 사이 어디쯤에 있었다.


언젠간 나도 늙을 테고, 젊은이에게 오늘 같은 대접을 받을 것이다. 나는 당신만할 때 블로그에 글을 썼어요, 내 늙은 목소리가 문득 들렸다. 그리고 늙은 글쟁이는 망가진 만년필을 두고 어찌할 바를 모를지도.


수치심과 미안함이 솟구쳤다. 나는 시큰한 콧잔등을 쓸었다.


통유리 너머로 신호등을 건너는 노인의 굽은 등이 그제서야 보였다. 그가 손에 쥔 봉투가 맥없이 흔들거렸다. 그는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한때는 나보다 능숙한 손놀림으로 시계를 고치던 맥가이버, 훌륭한 일꾼, 사회의 가장이자 척추가 점점 멀어졌다.


한 세대가 종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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