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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느리게 걷기 Jun 15. 2021

A형 엄마와 AB 형 딸의 상황 대처방법

 조카와 딸은 둘 다 16살이고 올해 중학교 3학년이다. 둘은 올해 같은 반이 되었다. 심지어 번호도 6번, 7번으로 나란히 앞 뒤 번호를 받았다. 원래 사촌끼리 같은 학교에 다니는 경우 미리 선생님께 말씀을 드리면 같은 반이 되지 않도록 배정을 한다는 얘기를 들었다. 그러나 반이 10반이나 되는데 설마 둘이 같은 반이 되겠나 하고 방심했다. 그랬더니 둘은 덜컥 같은 반이 되었다. 

 매주 조마조마하며 구매하는 로또에 당첨된 적도 없고 회사에서 하는 퀴즈 이벤트에도 당첨되어 본 적이 없는데 이럴 때 생각지도 못했던 당첨운이 따라주다니 기가 막혔다. 사실 조카랑 딸이랑 같은 반이 되지 않기를 바랐다. 사춘기라 그런지 둘은 감정의 기복이 심했다. 행여나 같은 반이 되면 자주 만나고 그러다가 혹여 싸우거나 삐질까봐 걱정이 되었다. 


  그런데 둘은 생각보다 잘 지냈다. 학기 초에는 조카가 우리 딸에게 회장 후보로 추천해 달라고 청탁(?)을 넣기도 했다. 나는 넌지시 딸에게도 한 번 나가보지 그러냐고 권유를 했다. 우리 딸은 자기는 회장에 관심도 없을뿐더러 엄마처럼 덜렁대는 사람이 반 대표 엄마가 되면 학급 공지 카톡을 제대로 못 보내서 엄마들이 욕할 거라고 말했다. 듣고 보니 맞는 말이어서 나도 같이 웃었다. 어쨌든 조카와 딸이 같은 반이고 조카가 그 반의 학급회장이고 동생이 반대표 엄마가 되는 재미있는 상황이 벌어졌다. 

 

  동생은 우리 집에서 도보로 15분쯤 되는 아파트 단지에 살고 있다. 차로는 금방이지만 걸어서 가기에는 약간 애매한 거리다. 두 아이가 다니는 학교는 바로 우리 아파트 단지에 붙어 있다. 그러니까 우리 딸은 3분도 걸리지 않고 학교에 갈 수 있지만 조카는 학교 갈 때마다 15분씩 걸어야 했다. 

 아이들은 2주 동안은 온라인 수업을 하고 한 주는 등교를 했다. 그 과정에서 동생이 나름 묘안을 짜낸 모양이었다. 그 묘안이란 동생이 아침 출근할 때 우리 집 앞에 조카를 내려 주고 출근을 하는 것이었다. 그 시간은 나와 아들도 집에서 나가는 시간이다. 그러니까 조카와 딸은 7시 50분부터 8시 40분까지 집에 있다가 둘이 같이 등교를 한다. 


 항상 조카가 등교하기 전에 집에서 나가는 바람에 두 아이의 등교 모습을 보지 못하다가 지난주 우연히 보게 되었다. 두 아이는 생김새와 분위기가 비슷했다. 머리에는 구루프를 말고 있고 꽤 무거워 보이는 가방을 메고 똑같은 교복을 입고 있었다. 둘 다 오동통하니 몸집도 비슷했다. 둘이 같이 등교하는 모습을 보니 귀여워서 흐뭇한 마음이 들었다. 


 그런데 이 두 아이에게 약간의 문제가 생겼다. 딸이 언젠가부터 불만을 토로하기 시작한 것이다. 

" 엄마,  J가 매일 오니까 스트레스받아. 이제 안 왔으면 좋겠어"

잘 지내다가  갑자기 조카가 아침마다 오는 게 싫다고 딸이 툴툴대기 시작하니 당황스러웠다. 둘이 싸웠나 싶어서 물어보니 그건 아니라고 했다. 딸에게는 다른 이유가 있었다. 조카가 아침에 올 때마다 큰 볼일을 보는데 그게 싫다는 것이었다. " 너는 안방 화장실 쓰면 되잖아." 내 말에 딸은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 그게 아니라 매일 아침마다 와서 큰 볼일 보고 냄새 풍기니까 싫다는 거지"  이 대목에서 난감해졌다. 아침마다 화장실을 가는 조카의 바람직한 배변 습관을 뭐라고 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딸 편을 들자니 상황이 복잡해질 것 같아서 나는 일단 생각 좀 해 보자고 딸을 달랬다. 그런데 그거 말고도 불만이 또 있단다. 매일 아침마다 오니까 바쁘게 준비하는데 부담스럽다는 것이었다. 


 딸의 생각을 다 듣고 나니까 머리가 아팠다. 딸의 마음도 이해는 갔다. 매일 아침 바쁜 시간에 누군가 와서 옆에 있다는 게 불편하고 성가시게 느껴질 수도 있겠다 싶었다. 한창 예민하고 까칠한 나이니까 서로 보이지 않는 불편함이 있었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동생은 아침마다 조카를 데려다 놓고 출근하는 것에 퍽 만족하는 눈치였다. 빈 집에 조카를 혼자 두고 가는 것보다 우리 집에 데려다 놓고 출근하면 학교도 가까우니 여러 가지로 마음이 놓였을 것이다. 소심한 나는 혼자 머리를 싸매고 고민을 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딸이 그러다가 말겠거니 하고 기대를 했다. 그것도 그럴 것이 둘이 워낙 친하게 잘 지내기 때문이다. 눈치가 빠르고 꼼꼼한 딸과 털털하고 이해심 많은 조카는 성격도 잘 맞고 취미도 비슷했다. 주말이면 둘이 올리브영이나 떡볶이집으로 나들이도 가고 공부도 같이 하는 날이 많았다.


 그런데 내 기대와 달리 딸의 스트레스는 점점 심해지는 것 같았다. 나는 몇 가지 해결책을 제시했다. " 혹시 아침에 일찍 학교 도서관에 간다고 하고 먼저 가면 어떻겠니?" " 코로나 때문에 등교 시간 전에 도서관을 안 열어요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이 깊어졌다. 혹시라도 조카에게 아침에 오지 말라고 하면 조카나 동생이 섭섭해하지 않을까 걱정이 되었다. 조카가 혼자 걸어서 학교에 가려면 덥고 힘들 텐데 딸이 조금만 참으면 되는 문제 아닐까 하는 생각도 했다. 그러나 한편으로 이러다가 오히려 조카와 사이가 틀어지거나 멀어지는 건 아닌가 하는 걱정이 되었다. 


 내가 이런저런 걱정을 하는 사이  등교 주간이 되었다. 그런데 월요일 아침에 조카가 오지 않는  것이었다. 나는 딸에게 왜 조카가 오지 않냐고 물었다. 딸은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 그냥 내가 앞으로는 집으로 오지 말고 학교 앞에서 만나서 가자고 했어" 

" 그랬어? 혹시 J가 섭섭해하지 않았어? 이유를 잘 설명하지 그랬어?"

" 엄마, 설명을 길게 하면 더 이상해. 그냥 학교 앞에서 만나서 가자고 하니까 J도 알겠다고 했어" 

딸이 학교에 간 후에도 나는 걱정이 되었다. 결국 학교에서 들어오는 딸에게 혹시 학교에서 J가 섭섭해하거나 기분 나쁜 티를 내지 않았냐고 물어보았다. 딸은 학교에서 잘 지냈고 점심도 같이 먹었다고 대답했다. 그리고 딸은 쿨하게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뒷모습도 쿨하게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소심도 일종의 마음의 병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사람의 감정을 잘 읽는 편이다. 그것은 가끔은 약이고 가끔은 독이 되기도 한다. 나는 누군가와 대화를 나눌 때 그 사람의 미묘한 표정과 말투, 눈빛을 통해서 상대방의 감정 변화를 캐치하곤 한다. 찰나에 스쳐 지나가는 아쉬움, 실망, 질투 같은 감정을 놓치지 않고 잡아내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타인의 감정에 신경을 많이 쓰는 버릇이 생겼다. 내가 상처 받거나 실망하기 싫은 것처럼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거나 마음을 다치게 하고 싶지 않다는 생각 때문이다. 그런 생각은 가끔은 너무나 지나칠 때가 있어서 나를 상하게 하거나 나의 감정을 후순위에 두게 만들기도 한다. 

 

 이번 일만 하더라도 나는 너무 많은 생각을 했던 것 같다. 혹시라도 동생이 섭섭하지 않을지 조카가 마음을 다치지 않을지 그런 생각 때문에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하는지 혼자 속을 끓였다. 생각이 생각을 낳고 걱정이 걱정을 더욱 부풀리는 지경까지 갔다. 감정이나 관계란 결국 양쪽 모두 존중받아야 하기 때문에 내가 동생의 감정과 조카의 감정을 걱정하는 것처럼 딸의 감정과 생각도 고려해야 하는 것이다. 상대방의 감정만 살피다 보면 딸의 감정을 다치게 하고 나와 딸과의 관계에 문제가 생길 수도 있다.  


상대방에게 거절의 의사를 표현해야 하는 순간이 왔을 때 너무 미안해할 필요는 없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생각보다 그 일이 그토록 중요하고 엄청난 사건이 아닐 수도 있다. 그러니 남의 마음과 감정을 헤아리기 전에 나의 감정과 생각을 들여다볼 줄 알아야 한다. 

 AB형 딸의 쿨한 한 마디를 통해서 새롭게 생각하게 된 지점이 있었다. 정확하게 거절의 의사를 표현하는 것도 나의 자존감을 지키는 하나의 방법이라는 것이다. 거절하는 것에 죄책감을 느끼지 않아도 된다. 우리의 삶은 수많은 거절과 수용의 연속이다. 다만 거절할 때 나의 거절이 무례하지 않도록, 너무 차갑고 일방적이지 않도록 조절한다면 그것으로 충분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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