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의 밥상은 무도와 더불어 가장 좋아하는 프로그램 중 하나입니다. 그러나 최불암 선생님과 냉동삼겹살에 소주까지 한 잔 곁들이는 촬영을 마치고 난 후에는 최애프로가 되었습니다. 며칠 전에는 다시 보기를 통해 <맛의 위로, 엄마를 기억해> 편을 보다, 문득 인생의 단계마다 만난 진미를 반추해 보는 글감을 얻기도 했습니다.
제 인생의 첫 진미는 황남빵이었습니다.
유년시절부터 여러 가지 이유로 친척들의 방문이 반갑지 않았습니다. 성인이 된 후부터는 성적, 취업, 결혼 등의 대사를 소사처럼 무심히 묻는 것이 불편했습니다. 그러나 어린 시절에도 제가 기다리는 단 한 사람의 친척이 있었으니, 그는 바로 경주에 살고 있던 작은 아버지였습니다. 아버지 세대처럼 끼니를 걱정하진 않았지만, 단음식이 요즘처럼 흔하지는 않은 유년시절을 보냈습니다. 작은 아버지는 명절이나 제사 때마다 경주의 명물인 황남빵을 꼭 사 오셨습니다. 너무 과하지도 그렇다고 부족하지도 않은 황금비율의 단맛을 품고 있는 팥 앙금. 그리고 포만감 따위는 고려하지 않은 채 앙금을 감싸고 있는 얇은 내피. 1939년부터 시작된 황남빵은 1984년에 열 살 소년을 매혹시켰고, 오십이 된 중년 아저씨를 여전히 감동시키고 있습니다.
거제도에서 근무하던 아버지가 한 달에 한 번 집으로 오시는 주말은 분지에 살던 우리 집 잔칫날이었습니다. 배를 타고 자갈치 시장에 부러 들러 양손 가득 기차에 싣고 온 남해바다.
각종 해산물로 배를 채우고 나면 마지막은 늘 비빔밥이었습니다. 큰 양푼의 바닥에 깔린 흰쌀밥 위로 붕장어 회가 쏟아지면 그 위에 텃밭에서 기른 채소가 더해지고 마지막으로 초장이 흩뿌려지는 일련의 과정은 마치 한 폭의 수채화가 그려지는 듯 보였습니다.
보기 좋은 음식이라 더 맛있었을까요? 밥을 먹고 돌아서면 배고 고팠던 시절이었기 때문일까요? 붕장어는 어린 삼 남매의 뼈 성장을 책임지던 맛있는 영양제였습니다.
자전거의 고장에서 나고 자랐습니다. 도로는 자전거가 대부분 점령하였고, 자동차는 드물게 다녔습니다. 도시락 두 개를 자전거에 매달고 등교했지만, 야간 자율학습이 끝나면 하루 종일 굶은 사람처럼 허기를 느꼈습니다. 에너지는 넘쳤고, 꿈은 드높았으나, 용돈은 넉넉하지 않았습니다. 차가운 겨울바람을 뚫고 집으로 향하는 길의 어묵 냄새는 늘 곤욕이었습니다. 달이 중천에 떠오른 어느 겨울밤, 생일이라 용돈이 두둑하다는 친구가 포장마차 앞에서 저를 멈춰 세웠습니다. 우리는 선 채로 각자 어묵 스무 개를 먹었습니다. 그날 먹은 것은 음식이 아니라, 대학생이 되어 어묵을 매일 먹고야 말겠다는 꿈이었을지도 모릅니다.
특수부대가 아니라면 군대가 힘든 것은 훈련보다 사람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추위를 많이 타는 체질이라 첫 혹한기 훈련은 무척이나 힘들었습니다. 부대로 복귀하는 날 집으로 돌아왔다는 느낌에 소스라치게 놀랐고, 밥 칸과 국 칸에 넘치게 배식된 라면은 집 밥 그 자체였습니다.
서울의 첫해는 유난히 허기가 졌습니다. 몸은 건강하고, 밤은 길었고, 치킨과 족발 같은 야식을 매일 사 먹기에 월급은 부족했습니다. 고단함과 서러움이 뒤범벅이 된 날, 늦은 퇴근길에 단골 분식점을 찾았습니다. 오르막길의 중간쯤에 외롭게 서 있던 분식집의 인기메뉴는 콩나물 라면이었습니다.
“할머니! 라면에 콩나물 좀 많이 넣어주세요.”
할머니는 제 말을 귓등으로 들으셨는지 대답도 없으셨습니다. 그리고 평소처럼 말없이 라면을 가져다주셨습니다. 그러나 면과 콩나물 아래에는 설날의 떡국보다 많은 떡이 무심히 잠겨있었습니다.
“어? 저 그냥 라면 시켰는데요? 떡라면은 천 원 더 비싼데?”
할머니는 그냥 먹으라고 손짓만 하셨지만, 저는 그냥 먹지는 못했던 것 같습니다.
우주 왕복선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면 회사가 힘든 것은 업무보다 사람 때문일 것입니다. 사람 때문에 살맛도 나지만, 인간 때문에 다 때려치우고 싶은 마음도 드는 것이 인생일까요?
그런 날 사표대신 반차내고, 순댓국집을 찾습니다. 낮술에 수육이 포함된 정식을 먹다 보면, ‘그래 그 인간도 사정이 있겠지’라는 연민의 감정이 떠오르며 내일 다시 출근할 힘을 쥐어짜봅니다. 금요일 약속과 휴일의 늦잠을 떠올리며 즐기는 목요일 오후의 커피믹스도 진미지만, 역시 최고는 두 번 씹고 삼켜버리는 법카로 먹는 한우 아닐까요?
혹시 눈치채셨나요?
지금까지의 모든 음식이 실은 엄마 밥을 찬양하기 위한 빌드 업이었다는 것을요?
멸치로 낸 육수에 김치와 밥을 넣은 죽과 국의 경계에 있는 갱시기. 생선은 물론이고 돼지고기조차 먹지 못하는 식성이지만, 자식을 위해 연탄불 앞에서 비린내와 가스 냄새를 뒤집어쓰며 볶아낸 고추장 두루치기, 학력고사를 앞둔 여름, 좁은 부엌에서 삶은 토종닭의 뼈를 일일이 발라내고, 먹기 좋게 살을 찢어 매콤한 양념이 된 부추로 끓인 엄마의 닭개장은 숭고함입니다.
무엇보다 그리운 것은 김치입니다. 엄마가 더 이상 김치를 담지 못하게 된 날은 상실의 날이었고, 장모님의 파김치로 돌돌 말은 삼겹살을 먹은 날은 잃어버린 세계가 복원된 날이었습니다.
몇 해 전, 작은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시골에 계신 어머니에게 황남빵을 보내드렸습니다. 엄마는 택배를 뜯자마자 하나를 맛보시고 저에게 전화를 해 뜻밖의 말을 하셨습니다.
“황남빵이 이렇게 맛있어서 네가 그렇게도 좋아했구나?”
“엄마? 작은 아버지가 나 고등학교 때까지 매년 사 왔는데 왜 한 번도 안 먹었어요?”
“나한테 까지 올 빵이 없었지. 그래도 그때가 좋았다. 내 몸이 건강하니 힘든 줄도 몰랐고, 밥도 다 같이 먹으니 맛있었어. 요즘은 소화도 안 되고 음식도 다 예전 같지 않아.”
그날 이후로 엄마에게 택배를 조금 더 자주 보내드리게 되었습니다.
살아오며 인생의 진미는 변합니다. 한때 진미였던 음식의 맛이 달라졌다고 느끼는 건 그 시절이 아니기 때문일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