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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꿈의 떨림 Nov 04. 2022

진정한 사과와 책임에 대해

- 내 탓이 아니야


  그날, 술을 꽤 마셨는데 이상하게 취하지 않았습니다. 침대에 누웠는데 잠은 오지 않고 정신만 또렷해졌지요. 결국 티브이를 켰습니다. 아마 그때가 새벽 한 시쯤 됐을 거예요. 채널을 돌리다 뉴스를 봤는데 이태원 상황을 생중계하고 있었습니다. 핼러윈 축제 때문에 생긴 약간의 갈등과 혼잡을 보여주는 거라 짐작하고 또 채널을 돌렸습니다. 거기에서도 이태원을 보여주고 있었죠. 그제야 심각한 사건이 벌어졌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대체 무슨 일인지 모르겠더라고요. 너무 비현실적인 상황이라 바로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취기는 그때부터 시작됐습니다.  


  갑자기 잠이 쏟아졌습니다. 세 시간쯤 지난 후에 눈을 떴는데 뉴스에서는 여전히 이태원을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잠이 깨지 않았기에 꿈인지 현실인지 분간할 수 없었죠. 뉴스는 그저 잠을 방해하는 소음이었기에 리모컨을 찾아 티브이를 껐습니다. 그리고 아침에 일어나 기사를 보고는 너무 놀라 움직일 수 없었습니다. 충격과 함께 든 감정은 죄책감이었습니다. 뉴스를 보고도 무심했던 제가 미웠습니다. 술기운 때문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둔하고 이기적이었습니다.


  그 후로 계속 분노가 일고 있습니다. 사과해야 할 사람들이 사과를 하지 않고 있습니다. 책임지지 않기 위해 책임을 떠넘기면서 경악스러운 말을 뱉습니다. 문제를 제기하면 애도 기간이라며 책임을 회피합니다. 버티고 버틴 뒤에 한 사과에는 진정성이 느껴지지 않습니다. 애도와 책임과 사과는 같이 할 수 없는 건가요? 애도와 책임은 기간이 정해져 있는 건가요? 진정한 사과와 반성 없이 제대로 된 해결과 예방이 가능할까요?




정말 내 탓이 아닐까?

  한 아이가 울고 있고, 그 아이 뒤에는 반 아이들이 있습니다. 아이들이 한 명씩 나와 쉬는 시간에 있었던 일을 얘기합니다. 머리가 짧은 아이는 그 일이 어떻게 시작됐는지 모른다고 합니다. 단발머리를 한 아이는 시작을 알고 있지만 자기 탓은 아니라고 합니다. 그 뒤에 나온 아이는 겁이 나서 그냥 보고만 있었다고 하고, 다음에 나온 아이는 자기는 조금밖에 안 때렸다고 하고, 또 다른 아이는 시작은 다른 애들이라며 책임을 떠넘깁니다. 이제 아이들은 피해를 입은 아이를 탓하기 시작합니다. 짜증 나게 해서, 멍청해서, 툭하면 울어서 등의 이유를 대며 맞은 아이가 맞을 짓을 했다고 합니다. 그들은 모두 똑같은 얘기를 합니다. "내 탓이 아니야."

 

  방관을 한 아이들도, 가해를 한 아이들도 모두 자기 탓이 아니라고 합니다. 몇 명은 오히려 피해자가 잘못했다면서 자기들의 폭력을 정당화합니다. 폭력을 당한 아이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눈물을 흘리고 있는데 누구도 사과하지 않습니다. 반성은 없고, 지금 이 순간만 모면하려 하지요.




 




  이제는 슬픔보다 분노가 더 크게 자라고 있습니다.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애도를 강요하고, 책임을 다른 이에게 떠넘기고, 돈으로 무마하려 하고, 어쩔 수 없이 사과하고, 입으로만 진상규명과 대책 마련을 말하는 그들에게 말입니다. 그리고 그 분노의 시작과 끝에는 제가 있습니다. 무신경하게 티브이를 껐던 제가, 사람들이 많은 곳에 갔느냐고 잠시라도 생각했던 제가 오늘도 참 부끄럽습니다.



* 내 탓이 아니야 (책임에 대하여), 레이프 크리스티안손 글, 딕 스텐베리 그림, 김상열 옮김, 고래이야기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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