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이 영역을 심판관이라 부르기로 했다. 잘하고 있는데도 높은 기준을 들이밀며 부족하다고 책망하는 마음, 들떠있는 기분을 다그치며 어떻게든 가라앉히려는 목소리,끊임없이 다른 이와 비교하며 엄하게 꾸짖는 눈빛을심판관 영역이라 하기로 했다.
상담사는 내게 이 영역이 너무 강하다고 했다. 유능하게 일을 처리하거나, 열심히 하고 있는 순간에도 심판관이 나타나 왜 이 정도밖에 못 하느냐고 다그치고 있단다. 그러니 아무리 노력해도 마음에 들지 않고, 아무리 잘해도 만족하지 않는다면서 내가 무기력해질 수밖에 없는 이유를 설명했다. 눈물을 참기 위해 어금니를 깨물었다. 어금니를 깨문 채 고개를 끄덕이며 어색하게 웃었다. 심장이 저리고, 아리고, 쑤셨다.
상담사는 심판관이 나타나는 이유에 대해 물었다. 한 번도 생각한 적이 없었다. 왜 그가 나타나는지, 어떤 순간에 나를 지적하는지 헤아린 적이 없었다. '나타난다'라는 말도 낯설었다. 심판관이 사라진 적이 있긴 있었는지 확신할 수 없었다. 심판관과 나는 분리될 수 없는 하나였기에 내가 존재하듯 그 영역도 쭉 계속되었다. 그래서였나 보다. 나는 심판관의 영역과 그렇지 않은 영역을 혼동해서 말했고, 그때마다 상담사가 정정했다. 완벽이라는 잣대를 들이밀며 꾸짖는 심판관의 영역과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며 불신하는 영역이 나의 중심을 흔들어놓고 있다는 얘기에 혼란스러웠다. 내 중심에는 늘 그들이 있었기에 그 파트가 나의 본질이라 여겼었다.
심판관에 대해 더 깊이 알기 위해 이런저런 질문과 답을 이어갔다. 그리고 그 영역이 강해지는 이유가 불안과 절박 때문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실수를 할까 봐, 문제를 해결할 수 없을까 봐, 용감해져야 할 때 비굴해질까 봐, 내가 이곳에 있다는 사실을 누구도 알아주지 못할까 봐 등등 일어나지도 않은 일 때문에 나는 나를 엄격하게 대하고 있었다. 이만큼 하지 않으면 존재가 부정당한다는 두려움, 당당하게 나를 증명하지 못할 거라는 절망이 내 안에 가득했다. 해결할 자신이 없으니 어떻게든 문제를 일으키면 안 됐다.
"칭찬을 받지 않는다고 무시를 당하는 게 아닌데 저는 그 이분법적인 사고에서 자유롭지 못해요. 막상 칭찬을 받으면 불편해서 어쩔 줄 몰라하고요. 인정받고 싶은 욕심 때문인 줄 알았는데 문제가 일어나면 안 된다는 절박함 때문에 저를 다그치고 있는 건 아닌지 생각이 들더라고요. 원하는 대로 되지 않으면 모든 게 다 제 탓인 것 같아서 견딜 수가 없거든요."
어렸을 때, 반 아이들 모두가 받았는데 나만 받지 못한 일이 있었다. 담임은 나를 보지 못한 채 다음 아이에게 내 몫을 주었다. 받지 못했다고 얘기하면 됐는데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머릿속에는 뱉어내지 못한 문장과 나를 책망하는 소리가 뒤섞였다. 내가 눈에 띄게 예쁘지 않아서, 내가 활발하고 명랑하지 않아서, 내가 손을 들고 받지 못했다고 말하지 못해서 등등 내가 부족한 점은 너무나 많았다. 상담사는 담임이 실수한 건데 왜 자신을 책망했느냐고 했다.
"저는 늘 그랬어요. 뭐든 다 제 잘못이었어요. 그래도 지금은 저와 외부를 분리하려 하는데 잘 안 될 때가 많아요. 제가 능력자라면 어떤 환경이든 뛰어넘을 수 있을 텐데, 하는 생각을 해요. 아무래도 초인이 되고 싶나 봐요."
내 말에 나도, 상담사도 웃었다.
"기능적인 면에서는 완벽을, 인간적인 면에서는 성숙을 추구하고 있더라고요, 제가."
이 엄청난 비현실을 꿈꾸는 내가 웃겨서 또 한 번 소리 내 웃었다. 웃음 끝에 슬픔이 시작됐다. 대체 무엇 때문 이런 황당한 불가능을 실현시키고 싶어 하는지 어이가 없다가 안타까웠다. 그동안 인정받고 싶은 욕심인 줄 알았다. 내 안에 그득 찬 과시욕이 나를 힘들게 한다고 여겼다. 상담을 통해 존재 자체가 부정당할 수 있다는 두려움과 절박함이 심판관을 강화시켰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또 나를 발견하지 못하고 지나칠까 봐, 모두가 갖고 있는데 나만 없을까 봐, 내 몫을 받지 못했다고 말할 수 없을까 봐 나는 뛰어난 사람이어야 했다.
상담사는 심판관 영역이 너무 크고 강해서 내 본질이 제 역할을 하지 못한다고 했다. 상냥하고, 긍정적이고, 창의적이고, 가능성을 확장시키고, 사람들과 연결할 수 있는 힘을 지닌 내 중심을 심판관이 가리고 있다고 했다. 회의적이고, 염세적이고, 소심하고, 겁이 많고, 부족하고, 어설프고, 무기력하고, 이상만 꿈꾸는 내가 진짜 나라고 여겼던 나는 잠시 어리둥절했다. 내가 꽤 괜찮은 사람이라는 게 놀랍다가, 기뻤다가, 또 많이 슬퍼졌다. 내가 나를 망치고 있는 건 아닌지, 하는 불안과 내가 원하는 내가 될 수도 있다는 희망이 섞이자 심장이 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