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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꿈의 떨림 Nov 07. 2021

살리에리를 위한 변명 + 그림책

-  아직도 자라고 있는 열등감과 질투를 위해




  원한은 자존심이 입은 상처에서 나온다. 그런데 원한을 초래한 상처는 그것과는 관계없는 타인의 사소한 불행을 보고 들음으로써도 치유될 수 있다.

- 살리에리를 위한 변명

 


1.


  13년 전쯤 화제가 된 드라마가 있습니다. 사람들이 욕하면서 본다는 그 드라마를 저도 잠깐 봤었죠. 정말 잠깐이었습니다. 한 회를 끝까지 볼 수가 없더라고요. 부족한 개연성을 자극으로 채운 소위 말하는 막장드라마였어요. 사랑과 배신의 과정을 악다구니와 유치로 채운 그 드라마를 반 정도 보니 머리가 아프더군요. 결국 몇 분 후에 티브이를 껐습니다.  


  며칠 후에 만난 친구는 그 드라마 보는 재미에 산다고 했습니다. 대체 왜 그런 드라마에 빠져 있어,라고 물었더니 삶이 무료한데 드라마마저 극적이지 않으면 어떻게 사냐는 대답이 왔습니다. 드라마를 볼 때면 통쾌하고 짜릿해서 스트레스가 풀린다고도 했어요.


  친구는 자기를 못마땅하게 여기는 시어머니와 자기편이 아닌 남편 사이에서 힘들다면서 웃었고, 그들에게 당한 설움을 무척 재미있게 묘사했습니다. 그 때문에 친구가 얼마나 아픈지 짐작하지 못했요. 하긴 제 앞에서 친구가 펑펑 울었다 해도 달라지지 않았을 거예요. 그때 저는 제 상처에 빠져 허우적거리느라 다른 이의 아픔에 관심을 갖지 못했습니다. 그때는 사랑과 결혼에 냉소적이고 비관적이었기에 사랑에 전부를 걸고 일찍 결혼한 친구를 온전히 이해할 수 없었죠. 그래 놓고 힘들다는 친구를  품어줄 수가 없더라고요.


  도저히 볼 수 없을 것 같았던 그런 류의 드라마를 얼마 후 찾게 되었습니다. 마지막 회를 한 두 개 남겨두었을 때였죠. 안 봐도 알 것 같은 내용이었기에 지난한 과정은 보고 싶지 않았어요. 그래도 결말은 꼭 보고 싶었습니다. 선과 악이 확실하고, 권선징악으로 마무리 될 게 뻔했기에 악의 끝을 확인하고 싶었죠.


  극적이고 자극적인 마지막 회를 보는데 친구가 말한 통쾌하고 짜릿한 게 무엇인지 알겠더라고요. 여리고 순해서 바보 같았던 여자 주인공이 멋지게 변모하는 모습을 보면서 친구는 대리만족을 얻었을 거예요. 한때는 사랑했지만 지질하고 지조 없는 남편의 본모습을 깨닫고 복수를 하는 주인공을 보면서 후련했겠죠. 주인공을 괴롭혔던 인물들, 특히 남편이었던 남자와 그의 내연녀와 한때는 시집 식구들이었던 그들이 후회하고 발악하는 순간에는 스트레스가 풀렸을 거예요. 그 당시 남편은커녕 애인도 없었던 저도 속이 시원했는데 결혼생활이 힘든 친구는 오죽했겠어요. 거기다가 주인공 진정한 사랑까지 얻었으니 설렘까지 추가됐죠.


  드라마에서 착한 인물이 복을 받는 건 손발이 오글거릴 만큼 유치한데 나쁜 인물이 벌을 받는 건 자극적이면 자극적일수록 좋더라고요.


 

  혹시 부당하게 행동한 사람이 TV에서 공격당하거나 SNS에서 마녀사냥 또는 신상 털기를 당하는 모습을 보고 흐뭇하게 미소 지었던 적은 없는가? 내가 무슨 일을 당한 것도 아니고 직접 앙갚음한 것도 아니지만 남의 불행을 보고 기뻐했던 이 같은 경험은 누구에게나 있을 것이다.
  이런 감정을 심리학에서는 샤덴프로이데 schadenfreude라고 한다. 샤덴프로이데는 '상처 입은 기쁨'이라는 의미의 독일어인데, 타인의 실패와 불행을 기뻐할 때 우리가 쓰는 '꼴좋다', '고소하다'는 말과 같은 뜻이다.

(중략)

  우리는 이런 드라마, 영화, 소설 등의 오락물을 통해 등장인물이 품은 원한을 공유하게 되는데, 등장인물이 자신의 원수를 응징하거나 그의 원수가 자업자득으로 불행해지는 모습을 보면서 기쁨을 느끼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샤덴프로이데가 어느 정도 분노와 원한을 풀어주는 역할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 살리에리를 위한 변명 -



2.


  그 당시 저는 마음에 안 드는 사람이 잘 나가는 게 싫었습니다. 저와 비슷하거나 저보다 부족하다고 여긴 이들이 저만치 앞서가는 건 견딜 수 없었죠. 그들에 대한 질투와 미움을 키울 때면 죄책감이 얹어졌고, 그 감정의 무게를 이기지 못해 점점 더 쪼그라들었습니다.


  '선한 끝은 없어도 악한 끝은 있다'라는 선배의 말을 들으면서 그들이 악이든 뭐든 저를 힘들게 했으니 어서 빨리 끝으로 향했으면 했습니다. 다른 건 다 필요 없고 제가 그들에게 부러워하는 그것 하나만 잃기를, 그들이 잃은 그것이 제 것이 되기를 참 많이 바랐습니다. 죄책감을 느낄 때면 그들의 행복을 빌었지만 저보다는  덜 행복해야 한다는 조건을 달았지요.



  처음 『살리에리를 위한 변명』을 읽었을 때, 웃다가도 뜨끔했고,  뜨끔하다가도 위로를 받았습니다. 질투와 시기심이 나만의 감정이 아니라는 것에 편안해졌어요. 어쩔 수 없으면서 자연스러운 감정이자 뇌의 활동이기에 죄책감을 덜어내도 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한편으로는 제가 느끼는 열등감에 분노와 원한이 어느 정도 있는지 가늠했습니다. 자칫 하면 위험해질 수 있겠더라고요.



  슬픔과 분노와 달리 원한은 다른 사람에게 이야기하기가 무척 껄끄럽다. 왜냐하면 원한은 그것을 품은 자신에 대한 꺼림칙함, 부끄러움, 불쾌함을 동반하는 감정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분노와 원한의 차이는 무엇일까?
  내가 당한 부당한 행위나 나를 모욕한 상대에 대한 분노가 오랫동안 계속된다면 그것은 분노가 아닌 원한이라 할 수 있다. 그러니까 원한은 나를 부당하게 상처 입힌 상대에 대해 오랫동안 품는 감정이다. 간단히 말해 지속적인 분노라고 생각하면 이해하기 훨씬 쉬울 것이다.

- 살리에리를 위한 변명 -


  시기심의 핵심은 나보다 뛰어난 사람, 내가 갖지 못한 것을 갖고 있는 사람, 내가 원하는 것을 나보다 먼저 거머쥔 사람에 대한 씁쓸한 감정이다. 돈과 재산처럼 손으로 만질 수 있는 물질에만 한정되지 않으며, 능력과 지위, 외모, 권력과 인맥, 학업과 업무성과 등 실로 다양한 요소가 우리의 시기심을 자극한다.
  물론 아무나 시기의 대상이 되는 것은 아니다. 사람은 자신에게 중요한 무언가를 먼저 가진 타인을 시기한다. 그러면서 때로는 악의적인 감정에 지배당하기도 한다.

- 살리에리를 위한 변명 -



  영화 <아마데우스>는 아무리 노력해도 모차르트를 따라잡을 수 없는 살리에리의 좌절과 고통을 담고 있습니다. 실제의 이야기와 영화 속 이야기는 다르지 살리에리는 일인자를 향한 이인자의 비참한 심정을 대변하는 인물이 되었죠. '살리에리 증후군'라는 용어까지 생길 정도로요.


  『살리에리를 위한 변명』은 시기와 질투, 분노와 원한, 복수심과 죄책감 등의 부정적 감정에 대해 심리학자와 뇌과학자가 쓴 책입니다. 살리에리를 위한 변명이자 변호이면서 그와 다르지 않은 우리의 이야기이죠.

  우리는 어떤 사람들을 시기하고 질투하는지, 사랑이 왜 증오로 바뀌는지, 정의라는 이름으로 복수를 하는 이유는 무엇인지, 이런 상황에서 뇌는 어떤 변화를 일으키는지 등을 설명합니다. 시기심과 질투가 있기에 개인이 성장하고 인류가 발전한다는 것도, 부정적인 감정을 건강하게 만들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알려주고 있죠.


  몇 년이 흐른 지금, 다시 이 책을 읽습니다. 한동안 괜찮다 싶었던 감정이 다시 꿈틀거리고 있거든요.

  더는 그때로 돌아가고 싶지 않습니다. 타인의 불행을 나의 행복이라 여기던 진심을 또 보고 싶지 않고, 질투와 시기심에 그의 성과를 깎아내리는 못난 마음을 확인하고 싶지도 않습니다. 잔뜩 웅크리고 움츠리 저를 미워하고 싶지도 않고요. 필요한 만큼만 질투하면서 이것을 원동력으로 삼고 싶어요.  

  다행히 예전만큼의 분노는 없는데 예전에는 없던 슬픔이 올라옵니다. 가진 적도 없으면서 잃은 것 같은 상실감에 빠지고, 어차피 이번 생은 망했다며 포기하고만 싶지요. 책에서 알려준 대로 시기하는 대상과 자신 사이에 거리감을 적당하게 두고, 제 위치를 가늠하면서 저에게 만족하려 하는데 역시 쉽지가 않네요.



3.

 


키오스크는 올가의 인생이나 다름없었지요
 

  『살리에리를 위한 변명』을 읽으면서 가장 먼저 생각난 그림책이 『키오스크』였습니다. 키오스크를 족쇄나 콤플렉스로 여기지 않고 그곳에서 행복한 꿈을 꾸는 올가가 질투와 분노에 대한 문장을 을 때마다 떠올랐죠.


  키오스크는 무인 정보단말기로 식당이나 패스트푸드점에서 자주 볼 수 있는 기계입니다. 원래는 터키어 또는 페르시아어에서 유래된 말로 간이 판매대, 소형 매점을 가리킨다고 해요. 올가는 아주 작은 가판대, 바로 이 키오스크를 오래 지켜오고 있습니다.


  네모난 창이 뚫린 표지를 펼치면 키오스크의 공간이 그대로 보입니다. 예상했던 것보다 키오스크는 훨씬 작고, 물건은 가득하고, 올가는 풍만합니다. 이 공간이 갑갑할 것도 같은데 올가는 그렇지 않나 봅니다. 소파에 앉아 과자를 씹으며 여행 잡지를 보는 그녀는 무척 편안하고 여유롭게 보입니다. 그녀의 모습이 너무 사랑스러워 표지와 면지만으로도 이 그림책은 충분했어요. 짐작대로 그녀는 친절합니다. 손님들이 말하지 않아도 뭘 사려고 하는지 알고 있죠. 이곳을 벗어나고 싶을 때도 있는데 그때마다 올가는 여행 잡지를 읽습니다. 잡지를 배 위에 올려놓고 눈을 감고 있으면 무척 행복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올가는 뜻하지 않은 사건으로 키오스크를 들어 올릴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뜻하지 않은 사고로 올가는 키오스크와 함께 바닷가로 떠내려죠.


  『살리에리를 위한 변명』을 읽으면서 이 그림책이 가장 먼저 떠올랐던 건 부정적인 감정에 얽매여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저와 올가가 대비되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매순간 키오스크 탓을 하면서 이것때문에 행복할 수 없다고 하는데 올가는 키오스크를 자의 인생으로 받아들인 채 행복한 꿈을 꿉니다. 저는 키오스크에 묶여 아무것도 할 수 없다며 무기력한 채 있는데 올가는 키오스크를  움직이게 할 수 있음을 깨닫습니다. 저는 무릎까지 오는 얕은 냇물에서도 허우적거리는데 올가는 깊은 바다에 몸을 맡긴 채 새로운 세상을 향해 나아가지요. 올가는 키오스크 밖에 있는 사람시기하거나 질투하지 않고, 키오스크 때문에 고통받지도 않요.


  올가는 던져버릴 수도, 벗어날 수도 없는 키오스크를 족쇄라 여기지 않고 인생의 한 부분으로 받아들입니다. 오히려 기회로 만들면서 새로운 꿈을 꾸지요.


  올가처럼 편안하게  받아들면 제 콤플렉스도 선물이 될 수 있겠죠.



  다루기에 따라서 시기심은 나의 상황을 다시 돌아보게 만드는 긍정적인 효과를 낼 수 있다. 스스로 제어할 수 없는 의사 결정이나 운명 때문에 괴로워하는 것은 귀한 시간을 낭비하는 것에 불과하다. 우리는 이번에 원하는 것을 얻지 못했을 뿐이지 전부를 잃은 것이 아니다. 잃어버린 듯한 기분에 속아서는 안 된다. 이렇게 생각하면 오히려 시기심은 미래에 무언가 새로운 것을 획득할 계기를 만들어주는 감정이다.

- 살리에리를 위한 변명 -




어느새 동굴 속은 여우의 냄새로 가득 차 버렸어
분노와 질투와 외로움의 냄새였지
 

  시기와 질투는 같은 의미로 쓰일 때가 많지만 학술적으로는 전혀 다른 감정이라고 합니다. 『살리에리를 위한 변명』에 의하면 시기심의 핵심은 나에게 없는 것을 가진 사람에 대해 품는 나도 갖고 싶다는 욕망이고, 질투는 내가 갖고 있는 것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과 분노에서 파생된 감정이라고 합니다. 가끔 이 두 가지 감정은 뒤섞여 발생하기도 하죠. 그림책  『여우』에는  시기와 질투, 그로 인한 배신과 분노가 담겨있습니다.

  

  숲에 큰불이 나 까치는 날개를 다칩니다. 개는 까치를 간호해 주려 하지만 날개를 잃은 까치는 거부합니다. 개는 한쪽 눈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사는 게 멋진 일이라고 말하죠. 까치에게는 개의 이런 말이 위로가 되지 않습니다. 슬픔이 커져 버린 까치를 등에 태우고 개가 달립니다. 이제 둘은 특별한 사이가 됩니다. 까치는 개의 눈이 되고, 개는 까치의 날개가 되어 늘 함께 합니다. 어느 날, 여우 한 마리가 개와 까치 앞에 나타납니다. 개는 여우를 반겨주지만 까치는 여우가 두렵습니다. 절대로 개를 떠나지 않겠다던 까치는 여우의 유혹에 넘어가 개와 떨어집니다. 여우는 그런 까치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이제 너와 개는 외로움이 뭔지 알게 될 거야."


  여우는 개와 까치를 보면서 부러웠을 겁니다. 자기도 그 틈에 들어가고 싶은데 이 둘의 관계가 너무 특별해서 어떻게 할 수 없었겠지요. 혹은 너무나  원했지만 단짝이 되지 못했던 과거의 누군가를 떠올리며 까치와 개를 미워했는지도 모르고요. 아무튼 여우는 둘을 보면서 더 외로웠을 테고, 더 부러웠을 테고, 그래서 시기하고 분노했 거예요.

  

  여우를 조심하라는 까치에게 개는 여우는 좋은 아이니 그렇게 말하지 말라고 합니다. 그런 개에게 까치는 서운했겠죠. 여우에게 개를 빼앗기지 않을까 불안했을 거고요. 개는 누구에게나 친절하고 긍정적입니다. 그래서 무심하게도 보입니다.


  여우는 날고 싶은 욕망과 우정 사이에서 흔들리는 까치를 알아봤겠죠. 그래서 누구에게나 친절하고 어떤 상황에서도 인생이 멋지다고 하는 개가 아닌 까치를 공략했나 봐요.


  여우는 어디에도 속할 수 없고, 누구도 사랑하지 않는다는 까치의 말은 틀릴 수 있습니다. 어디에든 속하고 싶고, 누구든 사랑하고 싶은 열망이 있기에 여우는 시기와 질투를 느끼고, 분노하고 있 거죠. 개와 까치를 만나기 전에 여우는 이미 깊은 좌절과 상처를 받았을지 모릅니다. 그게 외로움이 되고, 원한이 되어 까치와 개에게 앙갚음을 해야만 했던 거죠.  여우의 행동은 섬뜩하지만 그런 여우에게 마음이 가는 이유가 분명 있겠죠.  



  우리는 크든 작든 상처를 입으면 분노를 느낀다. 미국의 심리학자 제임스 애버릴 James Averill에 따르면 분노의 목적은 잃어버린 자존감의 회복이다. 여기서 자존감이란 자존심과 자기 평가로 바꿔 말할 수 있다. 사람은 자존심이 상했을 때 분노하게 되며, 분노는 자존심이 입은 상처를 치유하기 위한 하나의 방법으로서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 이론에 따르면 우리는 원한을 품고 있을 때 상처 입은 자존심을 회복시키기 위한 행동을 취하기 쉽다. 그중 하나가 '앙갚음'이다. 이는 상대에게도 나와 똑같은 상처를 주어 똑같은 괴로움을 맛보게 하려는 행동이다.

- 살리에리를 위한 변명 -




달은 좋겠다. 저렇게 토실토실해도 다들 예쁘다고 하니까

  일곱 살 오데트는 아빠 엄마에게는 삐쩍 마르고 허약한 딸이지만 친구들에게는 너무 뚱뚱한 아이입니다. 담임 선생님에게는 너무 순한 학생이고, 체육 선생님에게는 너무 둔한 학생이고, 피아노 선생님에게는 너무 가르치기 힘든 학생이죠.  어쨌든 오데트는 좋아하는 게 많습니다. 사탕과 초콜릿을 좋아하고, 책 읽기를 좋아하고, 거울 앞에서 꿀벌 옷을 입고 춤을 추는 것을 좋아합니다. 그리고 레오 다비드 작가를 무척 좋아하지요. 그런데 토실토실한 자신은 싫습니다. 다른 여자애들처럼 날씬하고 예뻐지고 싶어요. 그래야 다들 자기를 좋아해 줄 테니까요. 그러려면 좋아하는 음식을 참아야 하는데 그게 너무 어렵습니다. 어떻게든 참으려 했는데 엄마의 꼬드김에 넘어가 초콜릿을 마셨네요. 오데트는 그런 자신이 밉습니다.  다른 사람과 자신을 비교하면서 그들의 기준에 맞추려 한 오데트는 레오 다비드 작가를 만난 후 달라집니다. 더는 다른 사람들이 자기를 어떻게 생각하든 상관없어요. 진짜 자기가 좋아하는 게 무엇인지, 무엇을 하고 싶은지 알았거든요.


  심리학에서 부러움에 가까운 가벼운 시기심을 '온화한 시기심'이라고 합니다. 부정적인 느낌이 강한 시기심은 '악의적 시기심'이라 하지요. 악의적 시기심은 시기하는 대상이  불행해지기를 바라면서 자신까지 괴롭힙니다. 드러내기에는 너무 수치스러운 감정이기에 '나는 너를 시기한다'라고 말하기가 어렵죠. 하지만 '부럽다'는 말은 비교적 쉽게 할 수 있습니다. 온화한 시기심이기에 부정적이지 않아요. 오히려 긍정적인 효과를 낸다는 연구결과가 있습니다.


  오데트는 날씬한 친구들처럼 되고 싶을 뿐 그 아이들을 미워하지 않습니다. 토실토실해도 예쁨을 받는 달에게 부러움을 느끼지만 분노와 원한을 담지는 않지요. 초콜릿을 먹은 자신을 미워하지만 이 감정 역시 성장에 필요한 자양분입니다. 오데트는 행복한 얼굴로 당당하게 자기만의 춤을 출 줄  아는 아이이기에 자신에 대한 미움을 얼마든지 긍정적인 감정으로 바꿀 수 을 거예요.

 


  나는 부정적 감정을 콘트롤하는데 가장 좋은 방법은 뭐니 뭐니 해도 자존감을 강화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시기나 질투, 원한, 정의감을 가장한 쾌감 등에 빠진 사람에게는 공통적으로 자존감 저하가 나타났다. 자존감 저하로 인한 불쾌감을 해소하기 위해 부정적인 감정이 생겨나며, 뇌는 개체에 그 원인 요소를 배제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그러므로 자존감이 저하되지 않으면 부정적 감정도 발생하지 않는다. 그런데 자존감이 낮아지는 주요 원인이 인지 왜곡이므로 이를 고쳐나가는 것이 중요하다. 자신의 존재만으로도 풍요하다는 사실, 자신이 존중받아 마땅한 존재라는 사실을 왜곡 없이 인정하는 것이 감정 제어의 첫걸음이다.

- 살리에리를 위한 변명



4.


  부정적인 감정과 그에 따른 뇌의 작용에 대한 책을 읽었다고 해서, 부족한 자신을 받아들이고 자존감을 회복하는 그림책을 읽었다고 해서. 이렇게 글을 쓰면서 생각을 정리한다고 해서 평온해지지는 않습니다. 머릿속은 여전히 복잡하고, 심장은 울렁거리기를 반복하고 있죠.

  

  다만 예전처럼 질투와 시기심이 분노와 원한으로 번지지는 않을 겁니다. 망했으면 좋겠다 싶을 만큼 누군가를 미워하지도, 죽었으면 좋겠다 싶을 만큼 저를 증오하지도 않겠지요. 질투 때문에 그의 성과를 깎아내리지도 않을 거고요.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거겠죠.


  언젠가는 당신의 성공을 진심으로 축하해줄 날이 오면 좋겠어요. 부럽다고 말할 수 있는 용기와 함께요.  

 


  인생의 규칙은 그런 것이다. 원한이든 분노든 시기든 질투든, 부정적 감정을 마음껏 불태우며 날뛰는 것도 자기 자유고, 그런 감정을 능숙하게 제어하며 장래의 성장을 꾀하는 것도 자기 자유다. 감정과 인지의 모드를 자유자재로 콘트롤하면서 자신이 만족할 만한 우아한 생활을 설계하고 그에 따라 살아가는 것이야말로 부조리한 세상에 태어난 우리 ‘생’의 원한을 시원하게 풀어내는 최대의 복수라고 나는 생각한다.

- 살리에리를 위한 변명 -




* 살리에리를 위한 변명, 나카노 노부코 X 사와다 마사토 지음, 노경아 옮김, 플루토 펴냄

* 키오스크, 아네테 멜레세 지음, 김서정 옮김, 미래아이 펴냄

* 여우, 마거릿 와일드 글, 론 브룩스 그림, 강도은 옮김, 파랑새 펴냄

* 난 나의 춤을 춰, 다비드 칼리 글, 클로틸드 들라크루아 그림, 이세진 옮김, 모래알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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