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마음에 오래 남은 새벽의 풍경 하나

오롯이 혼자인 시간이 주는 힘

by 지하


쉽게 잠들지 못하는 밤이 찾아오면 나는 나의 오래된 일기를 읽는 것을 좋아한다. 차분하게 검은 펜을 들고 이 노트 앞에 앉아 고개를 숙여 그날의 일을 적어 내려 갔던 그때의 나를 보듬는 지금 나만의 위로의 방법인 것이다.

어려운 단어들과 형용들, 어쭙잖게 꾸며낸 표현들로 그날의 진짜 감정을 잔뜩 치장한 듯한 일기를 읽으며, 그 일과 감정들이 모두 지나간 일이라는 사실에 은근한 위로를 받기도 한다. 그렇게 오롯이 나에게 집중하는 새벽의 그 시간을 나는 정말로 좋아한다. 어둠이 모두를 잠재우고 간간히 숨소리만이 가득한, 복잡한 저 도시마저 조용해진 그 푸르스름한 정적의 시간.


내 마음에 오래 남은 새벽의 풍경 하나. 캐나다에서 머물던 그 해 가을의 어느 날. 타국에 머문 지 거의 일 년째였던 나는 그때 향수병을 꽤 심하게 앓고 있었다. 마음을 달랠 곳이 없어 와인을 마시고 겨우 잠이 들었는데, 한밤중에 갑자기 무슨 소리가 들려 눈을 떴다. 설마, 해서 창 밖을 내다보니 세상에, 세상이 하얗게 폭설 같은 눈이 펑펑 내리고 있는 게 아닌가. 아직 11월인데.


모두들 잠든 그 새벽에 혼자만 깨어 창 밖에 소복이 쌓이고 있는 눈을 바라보고 있는 기분이 얼마나 묘했던가. 마치 누구에게도 말하면 안 되는 엄청난 비밀을 혼자만 알게 되어 버린 느낌이랄까. 어쩐지 조금 더 외로워져 버려서 한참 동안 가로등 불빛 아래 흩날리는 눈발을 보고 있었다.


눈이 오는 소리를 어떻게 들은 걸까 나는. 아직 미온이 남은 침대 이불속에 다시 웅크리고 들어가 생각했었다. 눈이 나를 깨운 걸까. 이 순간에 누구에게 이 걸 말할 수 있나. 이 경이롭고 감동스러운, 새벽의 고요에 기대어 폭신하게 쌓이도록 날리는 그 눈 내리던 장면을. 같은 집에는 왕래가 크게 없는 집주인이 살고 있고, 머나먼 타국의 지인들은 바쁜 오후일 테고. 그 순간을 오롯이 고요하게 아무도 모르는 비밀처럼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고 품어내 보아야지. 그런 다짐은 한참이 지나서야 정리하게 되었다. 고독과 고요가 마주친 평온의 시간이었다. 그리고 오롯이 혼자였다.



그 새벽은 오래도록 마음에 남아서.

삶이 갈피를 잡을 수 없게 지치는 때에 불쑥 떠올라서, 위로가 되어준다. 누구에게도 다정하지 못할 것 같은 그런 지친 마음의 날에도, 오롯이 혼자 고독할 수 있었던 그 시간을 견뎌낸 힘이 내게도 있었다. 그 사실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지금의 힘듦을 견뎌내고자 애쓰던 마음의 결이 느슨해진다. 아무에게도 설명하지 않아도, 의미를 애써 증명하지 않아도 그 자체로 괜찮다는 사실을 떠올린다. 그런 장면이 내게도 있고, 결국 나를 살게 하는 힘은 그런 순간이라는 걸. 그 힘으로, 나와 나의 소중한 이를 한껏 끌어안아 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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