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럴라인 냅, 명랑한 은둔자
회사 다닐 때라면 출근 지하철에서 짓눌려지고 있을 시간에 일어나서 각종 영양제들을 입에 털어 넣는 걸로 하루를 시작한다. 씻고 청소를 하고 간단한 요리를 해서 아침 겸 점심을 먹고 밥하기 싫으면 나가서 먹는다. 나가서 먹는 날엔 그냥 도서관으로 간다. 아닌 날엔 일이 있으면 일을 처리하고 것도 아니면 뒤적뒤적 앞으로의 일을 위해 공부할 것들을 공부한다. 커피를 직접 내려서 텀블러에 담아 에어컨 빵빵한 도서관에 간다. 이거 좀 집었다 던지고 저거 좀 집었다 또 던지고, 사람들은 다들 열심히 공부하는 데 나만 백수 같다. 아 나만 백수 같은 게 아니라 나만 백수 맞지.
모두들 동영상 강의를 듣거나 문제집을 풀며 열심히 미래를 준비하는 것 같은데 도서관에서의 나는 현재만 산다. 현재만 사는 것이 너무 대책 없이 느껴질 때는 재테크 금융 코너를 돌아다녀 본다. 뒤적뒤적 이내 생각한다. 아, 돈, 지겨워…. 앞으로는 고작 두 달 남았다. 나는 지금을 살기로 마음먹었다. 지금 가장 궁금한 주제나 그냥 읽고 싶은 걸 읽는다. 슬렁슬렁 훑다가 그 상태로 십 분쯤 지나면 좀 열심히 읽는다. 한쪽에 노트 펴고 필기하면서 읽는 책들도 있다. (공부하는 느낌내기~) 어느새 주변에 아이들이 돌아다니기 시작하고 (방과 후?) 글씨가 살짝 피곤해진다. 저녁 뭐 먹지를 고민한다.
마트에서 간단한 장을 보고 이른 저녁을 만들어 먹으면서는 쉬엄쉬엄 넷플릭스나 유튜브를 좀 보다가 낮잠을 잔다. 먹고 바로 자면 소 된다는 데, 먹으면 잠이 솔솔 온다. 일어나서 설거지를 하고 스트레칭을 하고 있으면 고양이가 찝적대고 고양이랑 좀 놀아주다가 여덟 시부터 아홉 시 사이에(때로는 좀 더 늦게) 달리러 나간다. 사람들이 트랙을 설렁설렁 돌고 있다. 보여주겠어. 중간에 지쳐하지 않고 세 바퀴쯤은 같은 속도로 뛰는 단련된 나의 모습을~ㅋㅋㅋ 웜업! 트랙을 지나 달려보고 싶은 곳으로 뛰기 시작한다. 이제 쉬지 않고 삼십 분을 뛸 수 있다. 물론 뛸 때는 항상 힘들다. 힘든 데 좋다. 우리 인체의 심장은 적응력이 좋다고 한다. 안 쓰면 되려 무뎌진다고 한다. 삼십 분 달리기에 적응된 내 심장은 속도를 높이면 아직 적응 안됐다며 바운스~!! 띵동. 알람이 울리면 손바닥을 펴고 전속력으로 질주한다. 찐으로 심장이 터질 거 같을 때 혈액이 핏줄 사이에 낀 콜레스테롤을 팡팡 무찌르며 흐르는 상상을 한다. 세로토닌 뿜뿜. 기분 너무 좋은데 숨이 가빠 당장은 죽을 거 같다. 흐어엉. 별이 총총 달도 떠있다. 오분 뛰고 삼십초 질주하고 일분 걷고 반복, 어느덧 다섯 번 완료 삼십 분. 또 예의 무릎이 흐느적거린다. 스트레칭 더했어야 했나. 괜히 어깨와 팔을 휙휙 휘저으면서 걸음을 옮겨 집으로 돌아온다. 이걸 격일로 한다. 안 달리는 날은 산책. 대략 아홉 시에서 열 시 사이, 씻고 소파에 착석한다.
지금부터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시간이다. 좋아하는 노래 틀어 놓고, 맘대로 읽는다. 어떤 의무감도 없다. 노트에 맘대로 끼적인다. 자세도 맘대로다. 내 고양이는 바닥에 누워있다. 맥주 한 캔을 아주 아껴서 홀짝이며 읽거나, 아이스크림을 먹으면서 읽기도 한다.
“(40) 기분은 평온하다. 나는 찢어진 레깅스, 티셔츠, 목욕 가운을 입고 있다. 내게는 거실 소파에 흡족하게(그리고 말없이) 웅크리고 앉아 있다. 전화 자동응답기에 메시지가 몇 통 와 있다고 불이 깜박이는데, 내가 일부러 받지 않은 전화들이고 내일이 되어야 응답할 생각이다. 이때 어떤 생각 하나가 떠오른다. 단순한 사실적 진술 하나가 완전한 문장의 형태로 머릿속에 떠오른다. 나는 그 말을 듣는다.
*나는 명랑한 은둔자야.*
이것은 정말 마술적이고 변혁적인 순간이다. 이것은 일종의 만화경 같은 변화랄까, 나 자신에 대한 기정사실들이 저절로 모습을 바꾸더니 새로운 질서에 따라, 놀랍고 신선한 시각에 따라 재구성되어 내 *내면이 삽시간에 재편되는 듯한 순간*이다. 오래된 생각이 새로운 생각으로 바뀐다. 기존의 정의가 새로운 전개를, 새로운 분위기를, 새로운 의미를 취한다.(...)행복하게 혼자라고? 은둔하는데 명랑하다고? 그런 모순이 어딨어! 그건 불가능해! 안타깝게도, 이런 개념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 많다.”
이 시간의 내가 얼마나 명랑한지, 사람들은 모를 것이다. ㅎㅎㅎ 알 필요 없지만 자랑하고 싶어서 글로 써보는 중이다. 집으로 돌아와서 씻고 두시반(세시에 잠든다)까지 책을 읽거나 글을 쓰는 루틴을 만든 지 제법 되었다. 사실 백수 초반에는 엄청 헤맸다. 하루가 너무 짧게만 느껴졌고, 술 마시고 늦게까지 놀다가 열한시 다 돼서 일어나고. 하고 싶은 건 많은 데 뭐부터 해야 할지, 읽고 싶은 건 또 엄청난 데 막상 읽다 보니 피곤하고, 달리기도 밤에 했다가 아침에 했다가. 그러다 베테랑 백수 친구가 알려준 오후에 안배한 낮잠의 시간이라는 팁은 하루를 아주 길게 만들어 주었다. 예전이라면 퇴근하느라 고단할 시각에 잠을 자는 것이다(!) 피곤할 일도 없기 때문에 잠도 많이 안 온다.
삼십 분 정도 자고 일어나서 달리고 씻고 나면 그때부터는 하루 중에 가장 정신이 말똥말똥 해진다. 대부분 그냥 읽고 싶었던 것들을 읽고 정리하는 데만 몰두한다. 어제 다 읽은 책을 오늘 정리한다. 그런데 어제 읽었는 데 왜 또 새롭게 읽는 것 같지? 읽은 책을 한번 더 읽는다. 읽다가 멈춘다. 어? 나 이 책 좋아하네. 읽은 책을 한번 더 읽는 것이 굉장히… 좋다. 그러다 삘받으면 독후감 페이퍼를 쓰는 날도 있는 데, 삘은 잘 오지 않는다. 오히려 회사 다닐 때 글을 더 후다닥 써재꼈던 듯.
가끔 비가 와서 바깥을 뛰거나 산책할 수 없는 날은 혼자서의 고립된 시간들이 무한하게만 느껴진다. 널찍 널찍하게 널어놓은 시간들 사이로 보글보글 잡생각들이 끓어오르면 스마트폰 알람을 확인한다. 연결되어 있는 느낌. 하지만 실컷 연결될 수는 없는 느낌. 실컷 연결되어 있길 바란다는 건 내 욕심인 것 같다는 생각이 미치면 바쁜 일상을 보내고 있을 친구들에게 나의 심심함이 조금 미안하게도 느껴진다. 길어야 넉 달, 아마도 석 달이면 끝날 여유의 시간인 건데 난 왜 지금이 송구스럽나. 그러지 말자,라고 다짐하며 일기를 쓴다. 내용은 대체로 오늘 달리기 페이스와 이미 혼자인데 왜 혼자인 것이 두렵다고 생각하느냐와 난 뭐가 되려고 이러나, 뭐라도 될 거고 이미 무엇이다에 대한 푸념들. 사실 하루하루를 열심히 사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인식들.
문득문득 올라오는 공상의 시간들도 있다. 사실 공상은 익숙하지 못한 범위라서 오래 지속되지는 않는다. 이것도 백수의 특권이려니 하면서 대놓고 공상을 시전해 보지만, 결국은 스스로에 대한 질문들로 돌아온다. 너무 심각한 자의식 아닌가 하면서도, 생각할 것이 ‘나’ 밖에 없다는 것은 어찌나 홀가분한 경험인지. 지금의 혼자임이 영원했으면 좋겠다.
“(186) 내가 외로움을 경험하는 방식에는 늘 예민한 자의식이 함께한다. 내가 방의 다른 곳에서 나를 지켜보면서 실시간 해설을 듣는 듯한 느낌이다. *여기 내가 커피를 만들고 있네. 여기 내가 설거지를 하고 있네. 여기 내가 집에 혼자 있네*. 바로 이 점 때문에 —이 내면의 영상이 너무 공허하고 황량하게 보인다는 점 때문에—외로움이 이토록 무섭게 느껴지고 내가 본능적으로 달아나고 싶은 것 같다. 하지만 그날, 나는 당장 달아나서 새 신발을 여섯 켤레 사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고 대신 소파에 앉아서 생각을 했다.
*내 경우에 이 공허함은 내면에서 나오는 것이다.* 이것은 내가 스스로 만족스럽거나 안정적이라고 느끼기 위해서, 나 자신이 편안하게 느끼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모른다는 문제와 관련되어 있다. 내 머릿속에서 울리는 예의 실시간 해설을 유심히 들어보면, 그 목소리는 더 크고 무서운 질문들을 던진다. 커피를 만들고 설거지를 하는 이 사람은 누구지? 이 사람은 무엇에서 삶의 쾌락과 즐거움과 기쁨을 느끼지? 두렵고 공허한 시간을 편안하고 만족스러운 시간으로 바꾸려면 무엇이 필요하지? 이런 것들은 어려운 질문들이다. 그리고 나는 외로움을 앞질러 달아나는 데 급급하여, 이 질문들에 답할 기회를 회피해왔다. 물론 가끔씩 기분 전환을 하는 게 나쁜 일은 아니다. 나로 말하자면, 새 신발의 치유력을 열렬히 증언하는 바다. *하지만 더 큰 질문들을 피하기만 했다가는 언젠가 반드시 역효과가 난다*. 필요하지도 않은 물건들에 돈을 펑펑 쓰면서 종종거릴 때, 보통은 내가 평범한 일요일을 계획하는 것처럼 기본적인 일조차 해내지 못하는 무능력자라는 느낌이 강화될 뿐이다.”
어쩌면 나는 캐럴라인 냅의 말대로 내면의 어떤 공허함을 피하기 위해 스스로를 혼자 두지 못했을지도 모르겠다. 공허하지 않기 위해 사람을 옆에 두고 그 사람에 대해 생각하고 그 사람에 대한 만족감과 불만족을 느끼고 미래를 생각하고 또 나의 현재를 못마땅하게 여기느라- 지난 삶을 다 써버렸을지도 모르겠다. 그들을 생각하면 나 자신을 생각하지 않아도 되었다. 나 자신을 생각하지 않으면 공허하지 않아도 되었다. 그들을 이유로 구실로 삼으면 지금 못마땅한 내 모습은 내가 아닌 것이 되었다. 나는 나 자신으로부터 달아나는 데 급급하여 타인들을 재료로 삼았다. 모든 것을 떨쳐낸 지금, 세상에 나와 고양이밖에 없다고 여겨도 좋을 지금, 먹고사는 문제를 두 달 뒤로 유보해 놓은 지금. 나는 외로움과 공허함을 마주 본다. 큰 질문들을 물어본다.
나는 누구지?
열심히 안 살았던 건 아니었다. 아니, 항상 열심히 살았다. 문제는 나 자신을 잘 몰랐던 것에 있다,라고 생각한다. 덧붙여 세상을 잘 몰랐던 것일 수도 있겠다. 그런데 돌이켜 보면 그때는 또 알고 있다고 생각했었다. 그게 문제였을지도. 지금은 잘 모른다고 생각한다. 나 자신도. 세상도. 사람들도. 지난주에는 이것이 현재의 내가 지키고픈 거의 유일한 윤리적 태도라고 적었다. 대상이 불가해한 존재이므로 알려는 노력을 포기하겠다는 선언은 아니었다. 내가 윤리적 태도라고 삼은 어떤 삶의 방식은 —안다, 모른다 단정 짓기 전에— 내 인식론에 대한 점검이다. 음. 말이 어렵다.
시간과 여유가 생긴다면, 그것이 나에게 불편한 감정을 느끼게 한다면 더욱더 내가 이해하고 있는 방식에 대해서 꼬투리 잡고 스스로에게 질문해보기. 그러기 위해서 시간과 여유를 반드시 마련하기. 나에 대한 질문을 피하기 위해 다른 중독(알코올, 담배, 관계, 스마트폰, 연애)으로 달아나지 않기. 이 정도의 원칙을 세우게 되었다. 제대로 마주 본 공허와 외로움이 가져다준 선물이었다.
깊이 생각하는 것에는 —때로는 내가 이해하고 있는 방식에 대해 의심하면서까지— 시간이 필요하고,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힐 심리적 여유가 필요하고, 또 물리적으로는 혼자 있을 장소가 필요하다. 그리고 자본주의 사회에서 시간, 심리적 여유, 물리적 고독은 굉장히 비싼 거다. 이 비싼 것들을 불안함 없이 누리기 위해 그동안 얼마나 노력해왔는가. 퇴직금 소중해. 실업급여 소중해. 내(전세자금 대출)집 너무너무 소중해. 지금의 나는 이 것들을 풍부히 누린다. 누리는 것도 연습과 연마가 필요했다. 놀아도 되는 시간과 물리적인 고독을 얻었는 데, 심리적인 여유를 갖는 것은 도통 수월하지 않았다.
살아있는 내내 나는 대부분 불안과 싸워왔고, 불안이 삶을 굴리는 동력이기도 했다. 그러니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에 불안을 지우기란 얼마나 어려운 일이었겠는 가. 계룡산에 올라가 머리에 폭포라도 맞아야 할 판이었다. 얼마 전엔 나를 불안하게 하는 것들을 마인드 맵에서 벅벅 지우고 거기에 내가 하고 싶은 것들을 적었다. 내가 가지고 있는 욕망들. 적고 나니 불안들이 차분하게 사그라들었다. 이렇게 살아야겠다. 이젠 다른 사람이 아닌 내 욕망을 살아야겠다. 불안에 쫓겨다니면서 자책하며 살지 말고, 내 능력과 자원으로 원하는 것을 이루면서 살겠다. 불안으로 삶을 굴려온 나로서는 (현실적) 욕망이 동력인 삶이 넥스트 미션처럼 느껴진다. 아직은 욕망을 적어보는 것만으로도 만족하는 수준이다.
“(219) 불안이 다가오면, 당신은 생각한다. 내가 이래서 술을 마셨던 건데, 슬픔이 밀려오면, 생각한다. 내가 이래서 술을 마셨던 건데. 분노나 자기 의심이나 자기혐오가 일어나면, 생각한다. 내가 이래서 술을 마셨던 건데. 중독은 누가 뭐래도 자기 보호 효과가 뛰어난 방법이다. *중독은 대처 기제이고, 강렬한 감정들에 대한 해독제다.* 그러니 우리가 중독을 내려놓은 뒤에는 그동안 중독으로 마비시키고 변화시키려고 애썼던 감정들이 모조리 표면으로 부상하기 마련이다. 가끔은 급류처럼 덮쳐서 버거울 지경으로, 이것은 자명하고 불가피한 이치다.”
혼자 있는 나는 굉장히 자주, 아니 거의, 이십 분에 한 번 꼴로 멍을 때린다. 고양이를 쳐다보거나 창밖을 쳐다보거나. (지금 도 멍- 때리다 말고 글을 쓰고 있다) 멍-에 너무 오래 잡아먹히면 안 된다. 뭔가 심심해지고, 졸려지고, 비스듬해지다가 핸드폰을 하게 된다. 백수에게 스마트폰은 정말 나쁜 물질인 듯. 검색으로 불안을 떨구려는 성향이 있는 나는 중독-디톡스 등에 대한 검색을 하며 시간을 허비한다. 참, 캐럴라인 냅의 <드링킹>을 읽고부터는 취하도록 술을 마시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있다. 술 마신 나를 좋아했는 데, 술 마신 내가 좀 싫어졌다. 다음날도 다다음날도 출근이 없으므로 술을 입에 대면 절제를 못했다. (정말 싫지만 고도 적응형 알콜중독자, 임을 인정하게 된 듯하다) 아무 일 안 하고 숙취와 싸우기… 그건 좀 나 자신에게 실망스러운 경험이었다.
나도 내가 싫지만 왜일까. 술을 무조건 바닥을 본다. 소주? 한병이든 두병이든 세병이든… 바닥을 본다(꽐라 잼) 와인? 바닥을… 본다…(숙취+가산탕진 잼) 다른 독주와 선택지가 많다는 것은 알지만, 안 마셔봐서 잘 모르고 어차피 바닥 보려고 먹는데 비싸면 무슨 소용이냐 싶은… 그래서 주종은 보통 맥주다(친구들이랑 마실 때는 나만 쏘맥)… 솔직히 말하면 맥주 한 캔으로는 간에 기별이 안 간다… 문제는 네 캔 만원을 사 오면 네 캔을 홀랑 다 깐다는 거다…
하지만 책을 읽다 보면 미치도록 술이 땡길 때가 있다. 그런 날을 위해 냉장고 안에 술을 떨치면 안 되는 것이다. 사실 마트에서 술을 살 때가 책을 고를 때보다 더 힘들다. 네캔 만원을 살 것인가, 딱 한캔 혹은 두캔 인가. (안사는 선택지는 없는 것이냐) 나 자신을 대상으로 한 숱한 실험의 결과로 인해 —술이 쟁여진 상태에서의 나 자신을 믿지 못하게 되었고— 주3회 바프 카라멜 솔티드 땅콩앤 프레첼(ㅜㅜ바프사랑해, 와사비 맛도 좋아요)과 750ml 캔으로의 타협하였다. 사람들과 함께 마시지 않고 더 사러 나가지 않으므로 취하지 않고 즐길 수 있다. 게다가 요즘은 밤에 혼자 있는 것이 너무 좋아서 술 약속을 만들지 않는다.
그러고보니 부모님과 복닥복닥 열흘을 지내고, 잠깐 프로젝트가 생겨서 닷새 정도 일을 했고, 친구와 함께 피카소 전시를 보러 간 것 이후로 사람을 만나지 않고 있었다. 피카소 전시는 6/9일. 오늘은 6/24일. 약 보름의 시간 동안 혼자 지냈고, 생각해보니 이번 주는 입을 한 번도 열지 않은 듯. 월요일 아침에 엄마랑 통화한 것이 살아있는 인간과 나눈 마지막 대화였다. 스마트폰이 알려주는 나의 카톡 생활은 하루 평균 9분.
책을 열심히 읽고 있어서 북플을 좀 자주 하긴 했지만 sns도 안 하는 데… 자각 조차 하지 않은 채로 히키코모리와 다름없이 지내다니, 이 몸의 혼자력이 새삼 놀랍다. 외로웠냐고? 이건 확실히 아니다. 외로웠으면 약속을 만들었을 테니. 심심했냐고? 오늘, 조금..? 문제는 아까 금요일의 약속이 취소되었는 데 기뻤다는 거다.
“(45) 내가 부적응자라는 낯익은 괴로움이 느껴졌고, 우선순위와 사회적 가치에 관한 의문이 무의식을 긁어대는 게 느껴졌다. 홀로 있음의 폭넓은 스펙트럼 중에서도 *나는 극단에 기우는 편이다.* 나는 혼자 살뿐 아니라 혼자 일하므로, 하루 종일 타인에게 “안녕하세요” 같은 말조차 건네지 않고 지내기도 한다. 하루에 나눈 대화가 동네 스타벅스에서 말한 다섯 마디, “카페라테 라지로 한 잔 주세요”가 전부일 때도 있다. 나는 또 혼자 운동하고, 혼자 장을 봐서 혼자 요리하고 먹고 TV를 보고, 개를 논외로 친다면(나는 그러지 않지만 많은 사람들이 그런다) 밤에도 혼자 자고 아침에도 혼자 일어난다. 대체로 이런 상태를 문제로 여기지 않고 지내지만 그냥 이런 거니까 체육관에서 그 여자의 말을 들으면서 머릿속에서 그의 삶을 생생하게 그려 보았더니(그에게는 체육관 옆 스테어마트에서 운동하는 단짝 친구가 있을 테고, 회사 동료들이 있을 테고, 집에는 약혼자가 있을 테고, 결혼식에 올 친구들과 친척들이 200명쯤 있을 테고, 그로부터 이삼 년 뒤에는 아이들이 생길 것이다) 내가 외계인처럼 느껴졌다. 내가 탈의실에서 옷을 갈아입은 뒤 나만의 어둡고 외로운 동굴로 조용히 돌아가는 돌연변이 종족처럼 느껴졌다….”
나는 스타벅스도 안 가는 데… (커피도 집에서 내려마심) 이번 주엔 가난해져서 어쩐지 꼬박꼬박 밥도 만들어 먹었다. 지금까지 나의 일상을 이렇게 낱낱이 적어내려 온 것을 지루해하지 않고 당신이 읽었다면 아시겠지만, 정말인지 지금의 내가 기꺼이 겪고 있는 이 고독은 명랑하고 충만한 경험이다.
어… 나 혼자 있는 거… 생각보다 더… 많이… 좋아했네? 체질이었을지도…?
모든 사람들이 열심히 공부하고 있는 도서관에서 혼자 잭 리처를 읽으며 낄낄 거릴 때처럼, 남들이 두려워하는 외로움을 아주 실컷 쌓아놓고 지내는 중인데도 되려 실컷 충만하다니, 어쩐지 음흉한(!) 쾌감이 든다. 어쨌든 진짜 은둔생활 15일 돌파 기념으로 냅의 <명랑한 은둔자>를 다시 읽다가 이걸 썼다. 다시 읽으니, 지금 내 상황과 똑 닮아 책에 별 다섯개를 아니드릴 수 없었다.
숱한 관계의 헛발질을 거쳐 비로소 자기 자신과 잘 지내게 된 캐럴라인 냅의 이야기를 따라 읽다 보면, 나 역시 나와 더 잘 지내고 싶어 진다. 혼자가 외롭다고 느껴질 때, 무언가에 중독되어 또 나 자신을 잊어버리고 싶어질 때, 내가 취약해진 상태라는 느낌을 받을 때, 그녀의 에세이를 다시 찾아 쓰다듬으며 읽겠다.
“(49~50) 함께 저녁을 먹던 친구가 내게 아무도 사귀지 않는 것은 어떤 기분이냐고 물었을 때, 나는 혼자라는 상태에 절망하고 혼자 있는 것은 무섭고 열등한 상태라고 생각했던 시절의 기분이 어땠는지가 생생하게 떠올랐다. 주말에 계획이 없다는 말에 친구 웬디가 불편해하는 것을 볼 때, 나는 한때 내가 아무 계획 없는 시간을 얼마나 겁냈는지, 그냥 가만히 앉아서 내 안의 감정이 밖으로 나오도록 여유를 주는 일을 얼마나 어려워했는지 새삼 떠올린다. 그리고 체육관에서 만난 여자처럼 사람들이 ‘우리’라는 단어를 수시로 입에 올리는 걸 들을 때, *나는 마치 타인과 결부되지 않은 나는 존재 가치가 없다는 듯이 남들과의 관계로만 나 자신을 정의하려고 애썼던 고통스러운 시절을 떠올린다.*
그날 밤 부엌에서 켈로그 만찬을 준비하며 내 집의 단정함과 조용함을 즐길 때, *그 시간이 고마운 선물이자 일종의 승리로 느껴졌다.* 예전에 내가 애쓰며 괴로워했던 일들이 과거로 좀 더 멀리 물러났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나는 원래 숫기 없는 성격이다. 타인과의 소통을 늘 부담스럽게 느껴왔고, 앞으로도 아마 어느 정도는 계속 그럴 것이다. 따라서 나는 혼자 있는 걸 늘 대단히 편하게 여겼지만, 그러면서도 그 상태를 만끽할 줄은 잘 몰랐다.
위로와 인정을 얻을 수 있다고 느끼는 것, 내가 가진 자원만으로도 나라는 사람, 내가 하는 선택만으로도 고독의 어두운 복도를 끝까지 걸어서 밝은 곳으로 나아갈 수 있다고 믿는 것, 이런 것은 잘하지 못했다. 나는 시리얼 그릇을 들고 거실로 가서 TV 앞에 자리 잡고 않았다. 그리고 생각했다. 정말로 명랑하게. 이게 내 집이야.”
2021-06-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