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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udy Oct 10. 2019

걱정, 그리고 팔자

단편소설

전화벨이 울린다.

엄마 전화다.

오늘은 또 무슨 일로 전화하셨을까?


엄마는 환갑이 넘은 나이지만 아직도 매일 시내로 출근하신다. “집에 있으면 심심하기만 해. 어디든 다니는 게 건강에도 좋지, 뭐”라 하시지만, 살기에 녹록지 않은 형편이 그 이유라는 건 내가 더 잘 안다. 이런 생각을 하면, 늙어서도 일하는 엄마가 안쓰럽고, 넉넉한 용돈을 못 챙겨드리는 게 미안한 마음이다. 하지만 엄마의 일이 한가할 때면 시도 때도 없이 내게 걸려오는 엄마의 전화는 종종 짜증을 불러일으켰다. 게다가 엄마의 전화는 늘 “응, 무슨 할 말이 있었는데, 그게 뭐였더라? 좀 있으면 생각나겠지. 근데 별일은 없지? 밥은 먹었고?”하며 용건 없이 늘어지기 일쑤였다. 그래서 엄마의 전화가 오면, 조금이라도 빨리 끊자는 생각에 “왜요? 빨리 말해요. 나 지금 바뻐”하며 말투가 금세 쌀쌀해졌고, 서리 내린 내 목소리에 화가 난 엄마는 “됐다. 됐어”하며 먼저 전화를 끊어버리셨다. 뚜-뚜-뚜- 통화 종료음과 함께 남겨진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불과 몇 분이면 될 엄마의 수다를 참아주지 못한 내 짧은 인내심에 대한 한탄뿐.


‘엄마는 손님이다. 엄마는 손님이다.’

주문을 외우며 통화버튼을 눌렀다.

“응, 엄마, 무슨 일이에요?”

주문 덕에 목소리가 상냥해졌다.

“아빠가 현관 열쇠를 잃어버리셨어. 네가 가지고 있는 열쇠, 그거 아빠한테 드려야겠다.”

“그래요. 근데, 어쩌다 잃어버리셨대?”


칠순을 넘기신 아빠는 계단을 몇 개만 올라가도 숨을 헐떡거리셨고, 걸을 때면 몸이 자꾸 오른쪽으로 기우뚱해졌다. 작년 이맘때는 뒷주머니에 넣어둔 지갑을 잃어버리셨는데, 이번엔 열쇠?


“그걸 잃어버렸다고 해야 할지, 없어졌다고 해야 할지, 아무튼 귀신이 곡할 노릇이다.”

“뭔 소리야? 어쩌다가 잃어버리셨는데? 누가 훔쳐간 거 아냐?”


TV에선 노인들을 상대로 한 범죄나 사기에 대한 뉴스가 자주 나왔다. 인지력이 떨어지는 노인의 뒤를 쫓아 슬쩍 지갑을 훔치거나, 노인정에 모여있는 노인들에게 원재료를 알 수 없는 이상한 제품을 건강식품이라고 속여 판다고도했다. 요즘은 단 몇 분이면 평생 모은 돈을 한방에 낚아채가는 피싱사기까지 기승을 부려 젊은 사람들도 속수무책으로 당한다니, 노인들의 피해를 말하자면 입만 아픈 지경이다. 아빠도 혹시 이런 일에 말려든 건 아닐까? 열쇠에 아파트 동, 호수가 적혀있었다면 열쇠를 슬쩍 빼간 도둑이 집에 들어오는 건 시간문제가 아닌가?


“아빠랑 같이 시장에 갔다 왔거든. 요즘이 매실철이잖니. 큰 시장에 가면 좀 쌀까 싶어서 갔는데, 거기도 싸지 않더라. 결국 사지도 못하고. 아이구, 매실이 얼마나 비싸졌는지 말이다. 지난 주만 해도 이렇게까지 비싸진 않았는데 말이다. 비가 와서 그러나... 아유 근데, 큰 시장인데도 어쩌면 그렇게 비싸다니? 사람은 또 얼마나 많은지, 치여 죽는 줄 알았네. 참, 밥은 먹었니? 지난가을에 준 쌀은 다 먹었….”


엄마의 전화가 한여름 땡볕 아래 엿가락마냥 늘어지기 시작했다. 이쯤 되면 ‘엄마는 손님’이라는 주문의 약효도 바닥난다. 나는 없어진 열쇠가 걱정되어 대화를 다시 열쇠로 돌렸다.


“열쇠는 어쩌다가 잃어버린 건데?”

“아, 그게 말이야. 시장에 갈 때 분명히 아빠가 현관문을 잠갔어. 근데 집에 와서 문을 열려고 하니까, 열쇠가 없는 거야. 어떻게 열쇠고리에 있는 그 많은 열쇠들 중에 하필이면 딱 그 현관문 열쇠만 쏙 빠져나갔다냐? 귀신이 곡할 노릇 아니니?”


그렇다면 내가 걱정한 대로 도둑놈이 아빠를 노리고 있다가 열쇠를 훔친 건가? 정말 그렇다면 큰일인데. 내 머릿속에는 이미 도둑놈이 들어앉았다. 그는 집이 빈 틈을 이용해서 현관문을 따고 들어간다. 집에 침입하는 데 성공한 그는 집안 구석구석을 여유롭게 살피며 귀중품들을 찾아내 가방에 차곡차곡 담는다. 시커먼 잠바에 야구모자를 푹 눌러쓴 도둑놈의 모습. 상상 속 그의 가방이 불러올수록 내 심장은 더 세게 고동쳤다. 반면 ‘귀신이 곡할 노릇’이란 말만 반복하는 엄마의 목소리는 ‘평소의 엄마’ 답지 않게 차분했다.


“그래서 집엔 어떻게 들어갔어? 열쇠, 잃어버렸다면서?”

“경비실에 있는 열쇠로 열고 들어왔지.”

“경비실? 거기에 왜 열쇠가 있어?”

“경비실에 가면 아파트 세대 열쇠가 다 있어.”

“경비실 사람들, 뭘 믿고 거기다 열쇠를 맡겨?”


그렇다면 전자 도어록이나 보조 열쇠가 없는 집엔 경비실 사람들이 언제든 드나들 수 있단 말인가? 내 걱정은 즉시 경비실 사람들에 대한 불신으로 번졌다. 이젠 좀도둑 같은 작은 문제가 아니었다. 집을 경비해야 할 가장 중요한 시간에 늘 잠만 자는 경비들. 하나를 보면 열을 알 수 있지 않나? 그들에게 믿을 구석이라고는 눈 씻고 찾아도 찾을 수 없었다. 이런 그들이 언제라도 내 집에 들어올 수 있다고 생각하니, 부모님 집뿐만 아니라 아파트에 사는 나를 포함한 언니, 오빠네 집까지 걱정될 판이었다. 그런데 엄마는 이런 내 걱정에는 아랑곳없이 태평했다. 도대체 엄마가 언제부터 이렇게 태평한 사람이 된 거야?


“못 믿어도 할 수 없지. 그게 아파트 규칙이라는데. 월요일에 아빠가 니 집 쪽으로 가실 거니까, 열쇠 드려. 알겠지?”

“아무튼, 알았어요.” 난 태연한 척하며 대답했지만, 이번엔 경비실 사람들이 열쇠 꾸러미를 들고 현관문을 여는 망상이 머릿속에 가득 찼다.


열쇠를 어떻게 보관하셨길래, 현관문 열쇠만 쏙 빠져나갔을까? 누가 주워서 그걸로 집에 들어가면 어쩌지? 그보다 경비실에 열쇠가 있는 게 더 찜찜해. 이 참에 열쇠함을 통째로 바꾸는 게 좋지 않을까? 그리고 나서 경비실에는 바꾼 열쇠를 맡기지 않으면 되지. 엄마한테 다시 전화해서 말할까? 우리 집 열쇠는 어쩌지? 우리 아파트 경비실도 우리 집 열쇠를 가지고 있을까? 우리 집엔 보조 열쇠가 있어서 좀 안심이 되긴 하지만, 그래도……. 아악! 그만! 이제 그만!! 오늘 엄마의 전화는 평소보다는 짧았지만, 내게 심각한 걱정거리를 또 던져주었다.


내가 엄마의 전화를 꺼리는 이유는, 그 전화가 늘 용건 없이 길게 늘어지기 때문만은 아니다. 엄마에겐 내 속에 숨어있는 불안과 걱정을 단박에 끄집어내는 재주가 있었다. 모처럼 집을 떠나 바깥바람을 쐬고 있으면 엄마는 내게 전화를 걸어 이런 말을 툭 뱉으셨다.


“문단속은 잘하고 간 거야? 가스 밸브는 잠갔고?”


그 순간 나는, 내가 가스 밸브를 잠갔던가? 하는 의심이 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어서 끝없이 떠오르는 생각들(보일러 전원은 내렸나? 전기코드는 모두 뽑았고? 참! 아까 다리미질하고 나서 코드를 뽑았겠지?)이 나를 불안감에 휩싸이게 했다. 내가 평화를 되찾을 방법은 오직 하나, 지금 당장! 집으로 돌아가서 가스 밸브와 보일러 전원, 전기코드와 다리미를 확인하는 것뿐.


해외여행이라고 가면 상황은 더 심각해졌다. 인터넷 전화는 전 세계 어디서든 저렴하게 통화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지만, 그 덕분에 엄마의 걱정은, 내가 어디에 있든(파리든 런던이든 쿠알라룸프르든) 내 뒤를 LTE-A급으로 쫓아다녔다.


“집을 이렇게 오래 비워둬도 괜찮은 거야? 도둑이라도 들면 어떡해? 내가 가볼까?”

“가셔도 들어가지도 못해요.”


현관문은 보조 열쇠까지 잘 잠갔다. 이번엔 가스 밸브도 확실히 잠갔고 전기코드도 모두 뽑았다. 보일러 전원도 확실히 내렸다. 이 모든 걸 세 번 이상 확인했으니, 이번에는 정말 걱정할 게 없다고 자신했다.


“엄마가 가 볼게. 혹시 모르잖니? 요즘은 도둑놈들이 밖에서 요로고 쳐다보고 있다가 밤에 불이 안 켜지는 집들만 골라서 노린다더라. 열쇠도 못 따는 게 없다잖니? 그 좋은 기술을 왜 그렇게 못된 짓 하는 데다 쓰는지 몰라, 안 그러냐?”


안방 전등엔 일정한 시간이 되면 자동으로 전깃불이 켜졌다가 꺼지게 할 수 있는 방범기능이 있었다. 그런데 그 기능을 한 번도 사용해 본 적이 없어서 방범설정을 하지 않고 왔다는 생각이 번뜩 떠올랐다. 내 심장이 두근대기 시작했다.


“아냐, 열쇠로도 잠그고 와서, 현관문 번호 알려줘도 못 들어가요. 문단속 잘했으니까, 걱정 마세요.”


말은 느긋하게 했지만, 내 속에선 이미 걱정과 불안이 시작되고 있었다. 방범기능을 설정하고 올 걸 그랬어. 현관문에 광고지들이 잔뜩 붙어 있는 건 아닐까? 그런 게 붙어 있으면 빈집인 티가 바로 날 텐데. 진짜, 엄마한테 한번 가보시라고 할까? 안으론 못 들어가도 밖에서라도 집이 안전한지 어떤지 확인할 수는 있지 않을까?


여행 온 지 고작 3일밖에 안 됐지만, 집 걱정이 내 머릿속에 가득 차 버리자, 등허리에 식은땀이 솟았고 현기증이 나려고 했다. 나는 정신을 차리기 위해 머리를 세게 흔들었다. 이건 병이야, 병. 그것도 무지 심각한 정신병.

결국 난 예정보다 일정을 앞당겨 비행기에 올랐다. 물론 집에는 내가 상상했던 그 어떤 일도 일어나 있지 않았다.


나는 어쩌다가 이렇게 심각한 병에 걸린 걸까? 엄마는 왜, 가만히 내버려 둬도 이미 충분히 심각한 내 병을 매번 더 들쑤시는 걸까?


나는 PC가 조금만 느려져도 바이러스에 감염된 건 아닌지 걱정되어, PC의 입을 벌리고 ‘알약’을 먹인 후 ‘진단수:0, 치료수:0, 검역수:0’이라는 메시지를 봐야만 안심할 수 있었다. 인터넷뱅킹에 필요한 공인인증서는 반드시 별도의 USB에 보관했고, 꼭 필요할 때만 사용한 후 PC에서 즉각 분리시켰다. 반지니 목걸이니 하는 것들은 손이 잘 닿지 않는 곳에 꽁꽁 숨겨두었고, 그 덕에 난 매일 똑같은 귀걸이와 반지만 끼고 다녀야 했다.


휴가를 가기 위해 오래 집을 비워야 할 때는 노트북 컴퓨터와 카메라 같이 부피는 작지만 값나가는 물건들은 이불장이나 벽장 깊숙이 숨겼다. 설령 도둑이 집에 들어왔다고 해도 고가의 물건이 당장 보이지 않으면 “에이, 이 집은 별거 없네. 김샜다” 하고 그냥 나가버릴 수도 있지 않을까 싶어서다. 맘 같아서는 거실에 있는 LCD TV도 벽장에 숨기고 싶지만, 혼자서 들었다 놨다 할 수 없어서 참고 있을 뿐이다.


몇 달 전엔 남편이 출장을 가면서 집에 놓고 간 회사 출입카드를 숨긴 후, 어디다 숨겼는지 기억해내지 못해서 애를 먹은 적도 있었다. 회사 출입카드에는 사무실 출입기능뿐만 아니라 점심값 명목으로 매월 10만 원의 현금이 충전되었다. 이 카드만 들고 가면 회사 부근 어느 식당에서든 마음대로 먹고 마실 수 있다는 소리를 들은 후로 내 눈에 남편의 회사 출입카드는 현금카드로 보였다.


“마누라, 제발! 숨기지 좀 마. 제발!”


늘 숨기던 것들은 숨긴 곳을 쉽게 기억해냈지만, 새롭게 뭔가를 숨긴 때는 가끔씩 이런 일이 생겼다. 회사 출입카드 일이 있은 후론 수첩에 숨긴 물품과 장소를 반드시 기록했다. 숨기는 것마저 할 수 없다면, 난 너무 불안해서 집 밖으로 한 발자국도 나가지 못할 것 같았다.


‘장자’는 ‘장천하어천하(藏天下於天下)’라고 말했다. 어리석은 사람은 작은 것을 큰 것 속에 감추고 안심하지만, 힘센 사람이 와서 그 큰 것을 번쩍 들고 가버리면 숨기는 게 무슨 소용이 있겠냐는 뜻이라고 한다. 또한 이 말속엔, 이 세상에 진짜로 숨길 수 있는 건 없을 뿐만 아니라 시간이 흐르면 허물어 없어질 것들을 숨기는 것 자체가 부질없는 짓이라는 뜻도 담겨 있단다. ‘어니 젤린스키’라는 심리학자는 우리가 하는 걱정의 96%는 이미 지나갔거나 절대로 일어나지 않을 일이라고 말하지 않았는가! ‘달라이 라마’도 비슷한 말을 했다. 문제에 해결책이 있다면 걱정할 필요가 없고, 해결책이 없다면 걱정해도 소용없는 일이라고. 나같이 걱정, 근심이 많은 사람들을 위해 ‘바비 맥퍼린’은 노래까지 만들어 전 세계를 돌며 부르고 다녔다. Don’t Worry Be Happy.


돌이켜 생각해 보면 내가 걱정하고 불안해했던 일이 실제로 일어난 적은 거의 없었다. 아니 한 번도 없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나는, ‘달라이 라마’의 말처럼 쓸데없는 걱정을 하고 있는 게 분명하다. 이 사실을 너무도 잘 아는 나는 왜 이런 걱정과 불안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일까? 한동안은 이렇게 날 죽도록 쫓아다니는 걱정들이 평생 내 등짝에 붙어 다니는 건 아닐지 너무도 걱정돼서 이런저런 책들을 수도 없이 찾아 읽은 적도 있었다. 하지만 그 어떤 책도 내 고질병을 조금도 낫게 하진 못했다.


내일모레면 공모전 원고 마감이다. 원고는 어젯밤에 마무리했고, A4지에 인쇄해서 사각봉투에 잘 담아놓았다. 등기우편으로 보내면 하루면 도착한다 하니, 오전 중에 부치면 마감일 전까지 안전하게 도착할 것이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긴 글을 썼다. 공모전에 내가 쓴 글을 보내는 건 이번이 처음이다. 우체국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성적표를 받으러 교탁 앞으로 갈 때처럼 떨렸다. 우체국 직원에게 사각봉투를 건네고 우체국 문턱을 나서는데 기분이 묘했다. 어떻게 될까? 원고는 잘 도착하겠지? 설마 혼동해서 수정 전 원고를 넣은 건 아니겠지? 으이그, 걱정도 팔자란 말은 이럴 때 하는 거다.


새벽까지 원고를 쓰느라 잠을 설쳐서인지 멍한 기분으로 집으로 향했다. 출근시간이 지나서 거리는 한산했다. 원고를 발송하고 나니 시험을 끝낸 학생처럼 마음이 느슨해져, 거리 여기저기를 기웃대며 천천히 걸었다. 그러다가 길 한쪽에 오똑 서있는 작은 광고판을 보게 되었다.


당신의 운명이 궁금하십니까?

당신의 인생길을 속 시원히 보여드리겠습니다.  –동양 철학관


철학관? 말이 좋아 철학관이지, 점집 아닌가. 내 인생길을 보여주겠다고? 헐~ 이런 건 다 사기야. 하지만 마음 한편에선 혹시 정말 내 운명을 알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호기심이 생기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이번 공모전 결과나 점쳐달래 볼까? 잡아먹기야 하겠어? 이상한 곳이면 얼른 나오면 되지, 하며 나는 계단 위로 발을 디뎠다. 내가 아는 점집은 벽에 무섭게 생긴 그림들을 걸어놓은 으스스한 곳이었다. 그리고 울긋불긋한 한복을 입고 얼굴에 허옇게 분을 칠한 사람이 뭐든 잡아먹을 듯한 눈으로 무섭게 앉아 있었다. 그런데 지금 내 앞에 보이는 이곳은 7080 카페 같은 분위기였다. 벽에는 오래된 사진액자가 몇 개 걸려있고, 테이블이 서너 개, 구석에는 물통을 거꾸로 꽂는 정수기와 인스턴트커피, 그리고 종이컵들이 보였다. 나는 유리문을 살짝 밀었다. 문에 달린 풍경이 흔들리며 나의 등장을 알렸다.


“어서 오세요.”

나는 소리가 난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목소리의 주인은 나이가 쉰 살 정도 돼 보이는 평범한 아저씨였다. 주인장이 무섭게 생겼거나 무당처럼 보이면 얼른 돌아나가려고, 나는 문 안으로 몸을 반쪽만 내밀고 있던 터였다.

“저기… 지나다가….”

“네, 들어오세요.”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내게 말했다.


나는 문에서 가장 가까운 테이블에 앉았다.

“여긴 뭐 하는 곳이죠? 밖에 운명을 알려준다고 쓰여있던데... ”

“아, 철학관이 처음이시구나. 사주팔자도 보고, 궁합이나 택일, 작명도 해드리고. 요즘은 시험운, 연애운 같은 걸 보러 많이들 오시죠. 동네 분이신가? 사주팔자 한번 보세요. 운명을 알려면 사주팔자부터 봐야죠. 오늘 개시니까, 내 특별히 싸게 봐드리지요. 헤헤.”


운명이란 말에 호기심이 동한 나는, 그가 내민 쪽지에 내 생년월일시를 적고 말았다. 그리고 지갑을 열어 만 원짜리 한 장을 그에게 건넸다. 뒤통수가 불룩한 컴퓨터를 한참 만지작거리던 그는 뭔가를 인쇄한 종이 한 장을 손에 들고 다시 내 앞으로 와 앉으며 이렇게 말했다. “사주에 수(水) 기운이 세내요.”

“‘수’ 기운요?”

“사주에 물이 많다는 얘기는 들어보셨죠?”


작명소에서 내 이름을 지을 때, 사주에 물이 많아서 이름에 불과 나무를 많이 넣었다는 말을 들은 게 생각났다. 이 사람이 영 엉터리는 아닌 것 같아 조금 안심됐다.

“사주는 여덟 글자로 이루어져요. 그래서 팔자라고 하죠. 사주팔자. 그런데 손님의 팔자 중 절반이 물이네요. 그것도 아주 힘차게 흐르는 물.”

“물요? 물이... 많으면 나쁜 가요?”

“하하. 사주는 좋고 나쁘고가 없어요. 그걸 어떻게 운용하느냐에 따라 달라지죠.”

“네...”

“이것만 보고는 뭐라 말하기는 어렵죠. 더 심도 있게 봐야지만 제대로 말씀드릴 수 있지만서도...” 그는 이렇게 말하면서 내 지갑을 흘끗 쳐다보는 것 같았다. “암튼. 손님의 사주를 음양오행적으로 풀어보면, 그렇게 나쁜 것도 아니에요. 단지... 물은 수렴하는 기운이 강해서 뭐든 끌어들이죠. 그래서 ‘수’ 기운이 센 사람들이 고집이 셉니다. 아, 그리고 ‘수’는 지혜와도 연결되죠. 그래서 손님처럼 물이 많은 사람들 중에 똑똑한 사람들이 많아요. 반면 뭐든 끌어당기는 성질이 있으니 걱정, 근심도 많고요.”

그의 마지막 말은 내 관심을 단박에 끌어당겼다. 그럼 내가 걱정 많고 늘 불안한 이유가 내 사주팔자 때문인 거야? 머릿속이 아득해졌다. 걱정과 불안이 마치 주홍글씨처럼 내 사주에 각인되어 있는 것이라면 내가 아무리 발버둥 쳐도 떨쳐버릴 수 없단 말이 되는 건가?

“사주팔자를 바꿀 순 없나요?” 뭐든 바꿔서라도 걱정과 불안에서 해방될 수만 있다면 그렇게 하고 싶은 기분이었다.

“사주팔자를 바꿔요?” 그는 어이없다는 듯 날 빤히 쳐다보았다. “여기 좀 보세요. 이건 오행에 손님의 팔자를 넣은 거예요. 여기 ‘수’에 네 개가 있죠? 나머지 ‘목(木)’에 하나, ‘토(土)’에 하나, ‘금(金)’에 두 개. 자, 이제 제가 화살표를 그릴 거예요.” 그는 별을 그리듯 종이에 화살표를 그리며 설명을 이어갔다. “사주팔자를 바꿀 순 없어요. 그러려면 생년월일시를 바꿔야 하는데, 그건 불가능하잖아요? 그 대신….”

“무슨 방법이라도 있나요?” 나는 그의 말에 완전히 집중하고 있었다.

“대신... 팔자를 보완할 방법은 있어요. 여기 화살표를 보세요. 손님에게 많은 ‘수’의 기운을 누를 수 있는 건 ‘화(火)’에요. 그런데 손님 팔자에는 ‘화’가 없어요. 그러니 ‘화’의 기운을 돋을 수 있는 일들을 하세요.”

나는 뭔가 방법이 있다는 말에 솔깃했다.

“‘화’의 기운을 돋우는 일이요?”

“‘수’가 수렴의 기운이라고 했죠? 반대로 ‘화’는 발산의 기운이에요. ‘발산’을 하려고 노력하세요.”

“발산요? 그건 어떻게 해야 하는 건대요?”

그는 내 질문에 헛기침을 몇 번 한 후 이렇게 말했다. “그렇게까지 자세히 보려면 공임이 더 드는데….” 그는 다음의 말을 하고는 처음 앉았던 자리로 돌아가버렸다. “간단히 말하죠. 발산이라. 손님이 가지고 있는 것을 다른 사람에게 주면 돼요. 돈도 좋고 재능도 좋고. 길 가다가 누굴 돕는 것도 발산이에요.”


그토록 떼내고 싶었던 걱정과 불안이 내 팔자소관이라니. 나는 심란한 기분이 되어 멍하니 앉아 있었다. 돈을 더 내야만 좀 더 상세한 이야기를 해주겠다는 그의 신호를 뒤늦게 눈치챘지만, 나는 돈을 더 내고 뭘 더 묻고 싶은 기분조차 들지 않았다. 잠시 후 철학관 문을 나서려는 내게 그는 이런 말을 했다.

“빨간색 옷을 입는 것도 한 가지 방법일 수 있어요. 빨간색은 ‘화’의 기운을 대표하는 색이니까요. 어디 가서 만 원 주고 사주 봤단 얘긴 하지 마세요. 그럼 안녕히 가세요.”


그새 날씨가 변했는지 부슬비가 내리고 있었다. 정말 내가 물을 부르긴 부르나 보다. 집 쪽으로 걸음을 옮기며 철학관에서 들은 말을 되새김질했다. ‘화’의 기운을 돋우는 ‘발산’이라. 정말 그렇게 하면 걱정을 줄일 수 있을까? 그럼 뭐부터 하면 좋을까? 아무나 붙잡고 도와주겠다고 할 수도 없고, 자원봉사 자리라도 하나 알아봐야 하나? 그런데 어딜 가야 봉사자릴 찾을 수 있을까? 이런 생각에 빠져 아파트 단지 앞 횡단보도 신호를 기다리고 있는데 길 건너편에 있는 옷 가게의 쇼윈도가 눈에 확 들어왔다. 쇼윈도 한가운데에는 새빨간 티셔츠가 걸려있었다. 철학관에서 들은 마지막 말이 머릿속에서 메아리쳤다.

“‘화’의 기운을 대표하는 빨간색 옷을 입으세요.”


이런 미신을 믿는 내 자신이 우습게 느껴졌지만, 밑져야 본전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빨간 티셔츠 한 장으로 내 팔자에 있는 ‘수’ 기운을 조금이라도 증발시킬 수 있다면, 그래서 내 속에 있는 걱정, 불안을 얼마나마 없앨 수 있다면. 나는 횡단보도를 뛰듯이 건너가 가게 문을 열고 말했다.

“아줌마, 이 빨간색 티셔츠 얼마예요?”

<끝 : 2013 영등포문예 우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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