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내 이름으로 이룬 건 없더라

by 윤캔두

며칠 전에 너무 부끄러운 일이 있었다. 벌써 만으로 7년 반이나 일을 했고 미친듯한 실력자는 아니어도 그래도 일을 못하지는 않는다고 생각했는데 스스로를 돌아보게 만든 일이 있었다.


세법 해석을 기반으로 내 의견을 담은 보고서를 작성할 일이 있었는데, 너무 단순하게 생각하고 쉽게 훅 팀장님한테 넘겨버렸다. 다음날 팀장님이 직접 완전 탈바꿈한 보고서를 작성해서 회신해주셨는데, 그걸 보고 많은 생각이 들었다.



1. 이직하고 다행히 좋은 선배, 배울만한 선배를 만났다.

성격은 더럽지만 일 잘하고 배울 게 많은 선배 vs. 성격은 착하지만 일은 못하는 선배. 둘 중에 하나를 고르라면 나는 성격은 더러워도 일 잘하는 선배를 고른다. 이직을 결심했던 이유 중에 하나가 같이 일하는 팀장님, 부장님이 성격도 더러우면서 배울 것도 없어서였다. 물론 세법 공부 자체는 혼자서도 할 수 있고, 결국 혼자서 해야 하는 것이지만 보고서를 썼을 때 줄 간격 틀린 것을 잡아내는 모눈종이 눈을 본받고 싶지는 않았다. 그런데 이번에 새로운 팀장님이 써주신 것을 보고 이직이 의미가 있었다는 생각을 했다. 첫 직장에서는 아마 이 일을 전문가한테 맡긴다고 하면서 회계법인에 넘겨버리거나, 공무원과의 관계 등으로 풀어버렸을 것이다. 여기서는 내가 충분히 시간을 가지고 고민하고 세법을 찾아볼 시간이 있었고, 결국에는 이게 내 자산이 될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자산을 쌓아온 팀장님 덕분에 많이 배웠다.


2. 내가 스스로 이룬 건 없었다.

첫 직장에서 나름 일 잘한다고 해준 선배들도 많았고, 상위 고과도 받았고 해서 나는 내가 일을 잘하는 줄 알았다. 그리고 비교적 이직도 쉽게 잘 됐다. 그런데 이번에 보니까 나는 내가 이룬 게 아니라 내가 거쳐온 곳들의 이름을 빌려서 살고 있었다. 그래도 난 SKY를 나왔고, 대학교 졸업하자마자 한국 최고의 대기업 중 한 곳에 취업해서 일을 했고 등등 이런 남의 것에 기대어서 내가 능력이 좋은 줄 착각했던 것이다. 그런데 그것들은 진정으로 내가 이룬 것은 아니었다. 구독자 수도 적도 라이킷도 별로 없지만 그래도 오히려 브런치가 내가 이룬 것이라고 당당히 말할 수 있는 게 아닐까.



좀 더 실력 있고, 내 이름을 부끄럽지 않게 내놓을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직장에서 인정받기 위해 혹은 연봉을 높이기 위해 실력 있는 사람이 되고 싶은 건 아니다. (물론 연봉이 높아지면 좋지만!)

나라는 사람 자체가 누군가 대체할 수 없는 무형자산을 가진, 유니크한 사람이 되어야겠다. 언젠가 굳이 학교나 직장 같은 것이 아니라 내가 찐으로 이룬 것들로 나를 설명할 수 있을 때까지.




keyword
작가의 이전글20세기에서 21세기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