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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혜로운달빛 Jul 23. 2023

#2. 너의 눈, 코, 입

잠든 그의 얼굴을 관찰하는 이유

 

 결혼 11년차인 지금도 나는 가끔 잠들어 있는 남편의 얼굴을 뚫어져라 바라보곤 한다. 그는 곰이라는 정체성에 걸맞게 겨울잠을 자는 것처럼 긴 잠을 잔다. (특이한 점은 겨울에만 그런 것이 아니라 사계절 내내 겨울잠을 잔다. 희귀종이다.) 깨우지 않으면 열두시간이고, 열네시간이고 스트레이트로 잠을 자곤 하는데, 너무 긴 시간동안 고요히 잠을 자고 있을 때면 살았나 죽었나 싶어 두 손가락으로 코를 한번 틀어 막아 보기도 한다. (그러면 그는 켁켁거리며 생사를 확인해 준다. 다행이다.) 


 보통은 내가 남편보다 아침에 일찍 눈을 뜨는데, 유난히 아침 햇살이 따사롭고, 나의 살갗을 덮고 있는 이불의 폭신폭신한 느낌이 너무나 좋은 데다가 남편이 때마침 코를 골지 않고 곤히 잠을 자고 있다면, 나는 여지없이 그를 바라보며 검지 손가락으로 그의 눈썹을 슬쩍 만져 본다. 나보다 훨씬 긴 속눈썹도 살금살금 위로 쓸어 보고, 오똑한 코도 쓰다듬어본다. 각질 하나 없는 보들보들한 입술도 만져보고 여전히 아이처럼 오동통한 두 볼도 살짝 꼬집어본다. 아, 이 모든 표현에는 ‘콩깍지’라는 필터가 한번 씌워졌다는 것을 밝혀둔다. 그는 여전히 미동도 없이 겨울잠에 빠져 있다. 그럴 때면 그가 잠에서 깨지 않고 계속 이렇게 잠들어 있었으면 좋겠다, 하는 마음과 어서 일어나서 나를 안아줬으면 하는 모순된 마음이 동시에 든다. 


 내가 그의 눈, 코, 입을 구경(?) 하는 이유는 ‘신기함’ 때문이다. 결혼 11년차가 되어서 무슨 신기함이냐 할 수도 있겠지만, 나는 지금도 가끔 이 사람이 내 남편이라는 사실이 신기할 때가 있다. 신혼 초에는 우리가 서로 부부가 되었다는 사실이 너무나 신기하고 생소해서 ‘이 사람이 왜 여기에 있지?’라는 느낌을 강렬하게 받았던 적이 셀 수 없이 많았다. 지금은 서로에게 너무나 당연한 존재가 되었지만 이따금 내 옆자리에서 잠을 자고 있는 그의 존재가 새삼스러운 순간이 종종 찾아온다. 그리고 그럴 때면 여지없이, ‘만약 그때 이랬더라면.’하고 우리의 시작이 떠오른다.


 모든 것이 포카리스웨트 마냥 청량하던 시절이었다. 신학기 학부 MT시간, 같은 학부였던 우리는 그 때 처음 서로 만났다. 아, 사실 ‘서로’라기보다는 나 혼자 그를 강렬한 첫인상으로 기억하고 있었다고 하는 편이 맞겠다. MT에 참석하신 교수님께서 우리에게 한 명씩 자기소개를 하라고 하셨는데, 각자 서로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길 수 있도록 해보라고 요구하셨다. 그때나 지금이나 남들 앞에 나서거나 주목받기 싫어하는 나는 어디론가 도망치고 싶었지만, 끼가 넘치던 우리 학부 사람들은 눈을 번뜩이며 자기 소개를 준비했다. 


 그의 자기소개 차례가 되었다. 그는 복학 첫 학기였고, 우리 학부에서 준비하던 공연의 무려 남자 주인공이었다. 여기 까지만 보면 모든 여학생들이 선망할만한 복학생 ‘오빠야’로 보일 수 있겠지만 여기에는 함정이 있다. 하필 그 공연이 ‘춘향전’이었는데, 그는 자기 소개 시간에 이몽룡의 ‘사랑가’ 중 ‘이리 오너라 업고 놀자’ 파트를 불러 제꼈다. 물론, 덩실덩실 춤사위도 잊지 않았다. 문제는, 그것을 정말 이몽룡처럼 아주 능청스럽게 한 것이 아니라, 그도 복학 첫 학기에 아는 사람도 없고, 갑자기 맡게 된 주인공이 낯선 상황에서 정말 어색하기 짝이 없게 떨리는 목소리로 부르는 바람에 부끄러움은 보는 사람의 몫인, 그런 상황이 연출되고 말았다. 그가 출연하는 공연의 기획팀에 소속되어 있던 나의 친구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바라보고 있던 나에게 말했다. “저 오빠 저래 보여도 분장하고 무대에 서면 은근 잘 생겼어.” 칭찬인지 욕인지 모를 아리송한 친구의 말이 귓가로 흘러가며 나의 머릿속에 그의 첫인상이 박혔다. ‘뭐야, 저 오빠 좀 특이해.’


 그 이후 몇 개월이 지나 우리는 같은 공연에서 배우로 다시 만났다. 그 공연은 소중한 방학 기간을 공연 연습으로 반납해야 했기 때문에, 처음엔 할까 말까 고민을 많이 했었다. 그러나 나와 이전에 같은 작품을 했던 선배의 추천으로 결국 공연에 참여하게 되었다. 나는 이미 그를 ‘특이한 복학생 오빠’로 기억하고 있었지만, 그는 그때 나를 처음으로 인지했다. 나중에 그에게 나의 첫인상에 대해 물어보니 “솔직히 별로 기억이 안 나는데 귀여운 후배라고 생각했던 것 같아.”라고 했다. (그러다 나에게 응징을 당하고 “별로 기억이 안 나는데 귀여운 후배라고 생각했던 것 같아했지.”로 정정했다.) 내가 그 공연에 참여하지 않았더라면, 우리의 지금은 없었을지도 모른다.


 즐거웠던 공연 연습 분위기 덕분에 우리는 급속도로 가까워졌지만, 남녀사이로 발전하지는 않았다. 나에게는 남자친구가, 그에게는 짝사랑녀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와 나는 주로 잘 안 풀리는 서로의 연애에 대해 이야기하며 서로를 위로해 주곤 했다. 나는 그의 이야기를 듣고, 짝녀가 오빠에게 관심이 있는 게 틀림없으니 어서 고백하라며 부추겼고, 그는 나의 이야기를 들으며 세상에, 남자친구가 너무했네! 하며 맞장구를 쳐주었다. 그 당시 내 마음 속 그의 포지션은 옆집언니(?)가 분명했다. 당시 우리가 서로의 연애에 골머리를 썩고 있지 않았더라면, 우리의 지금은 없었을지도 모른다. 


 우리가 함께 했던 공연은 역대급 흥행을 하며 성황리에 마쳤고, 나는 곧 호주로 워킹홀리데이를 떠날 준비를 하고 있었다. 호주로 출발을 몇 주 앞둔 어느 날, 호주에서 안타까운 사건이 발생했다는 뉴스가 떴고, 그 뉴스를 보고 겁이 덜컥 나셨던 나의 부모님은 호주행을 만류하셨다. 나도 막상 갈 때가 되니 마음이 뒤숭숭하고 이상하게 설레는 마음이 전혀 없었다. 나는 고민고민하다가 호주 워킹홀리데이를 취소했다. 내가 그 때 호주로 떠났더라면, 우리의 지금은 없었을지도 모른다.


 갑작스럽게 워킹홀리데이를 취소하고 붕 떠버린 나는, 학부에서 준비하던 ‘춘향전 시즌2’ 공연에 뒤늦게 오디션을 보고 부랴부랴 합류했다. 물론, 그도 같은 공연에 참여하고 있었다. 이전 시즌에서 이몽룡이었던 그는 다음 시즌에 동네 주민으로 급격하게 강등되었고, 나는 향단이었다. 공연은 이몽룡, 춘향, 변사또 세 사람의 분량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주인공 세 사람은 연습하느라 한 눈 팔 새가 없었지만, 연습 시간보다 대기 시간이 많았던 우리 두 사람은 무대 양 옆의 윙에서 대기하며, 또 한번 서로의 거리를 좁혔다. 호흡이 긴 공연 기간을 거치며 나는 남자친구와 이별을 겪었고, 그는 짝사랑을 끝냈다. 만약 그가 다시 한번 남자주인공 이몽룡을 맡았었더라면, 우리의 지금은 없었을지도 모른다. 


 우리가 준비했던 공연은 ‘에든버러 프린지 페스티벌’ 참여하게 되었다. 모두가 아낌없이 땀방울을 흘렸다. 약 한 달간의 페스티벌 기간 동안 우리팀은 하루도 빠짐없이 공연을 올렸고, 그 바쁜 와중에 짬을 내어 다시없을 프린지 페스티벌을 즐겼다. 그러던 중 나와 남편을 포함한 총 3명이 어떤 공연을 하나 보러 갔다. 지금 생각해도 의도를 알 수 없는 난해한 공연이었다. 그런데, 남편은 그 때 공연이 아닌, 나를 보았던 것 같다. 나중에 들은 바로는, 내가 다른 남자와 공연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시시덕거리는 것이 이상하게 질투가 났다고 했다. 공연의 내용은 이상했지만, 그 공연은 내용이 아닌 다른 방식으로 그의 잔잔한 마음에 돌멩이를 던졌다. 우리가 남, 남, 여 조합으로 그 공연을 보러 가지 않았더라면 우리의 지금은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 이후 나와 남편은 모두의 예상대로, 선배가 오빠되고, 오빠가 아빠되는 수순을 거쳤다. 4년간의 열애 끝에 우리는 부부가 되었고, 부부는 두 아이의 부모가 되었다. 우리는 요즘도 가끔 우리가 처음 만났던 당시를 회상하며, 그 때 우리가 했던 많은 선택 중 하나만 달랐더라도 지금의 우리는 없었을지도 모른다며 신기해한다. 서로를 바라보고 있음이 새삼스러워지는 순간이다.


 나는 인연을 믿는다. 인연은 마치 두 사람을 예쁘게 본 누군가가 우리의 삶에 몰래 놓아둔 징검다리같다. 두 사람은 아무것도 모른 채 그 징검다리를 하나하나 밟아 가다가, 막다른 곳에서 서로를 마주하고 사랑에 빠진다. 지금 그 징검다리를 건너가고 있다면, 혹은 이미 징검다리 가운데에서 누군가를 만났다면, 그 소중한 인연을 새삼스레 돌아보며 감사하는 시간을 가져 보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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