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범한 악, 그리고 삶이 교차하는 순간의 구원에 대해

<쇼맨 ; 어느 독재자의 네 번째 대역배우> 리뷰

by 졔졔니모
2022.4.3 일요일 @정동극장, 강기둥 박란주 안창용 이현진 김대웅 이다정


1961년 4월 11일, 홀로코스트의 주동자였던 아돌프 아이히만의 재판이 시작되었다.

수백만명의 유대인을 학살했다는 악랄한 그의 죄목과는 달리 퍽 평범한 외모의 그는, 재판장에서 뻔뻔하게도 자신의 무죄를 주장하는 시도를 한다.


"나는 아무것도 한 것이 없다. 크건 작건 아돌프 히틀러나 그 외 어떤 상급자의 지시에 아무것도 덧붙이지 않고 성실히 임무를 수행했을 뿐이다"


"나는 지시받은 업무를 잘 처리하기 위해서 열심히 일했을 뿐이다. 내가 제작한 ‘열차’ 덕분에 우리 조직은 시간 낭비 없이 일을 처리할 수 있었다."

(수많은 유대인이 그가 고안한 가스실이 달린 '열차'에서 죽어갔다.)


명령에 따랐을 뿐이며 자신의 역할을 성실하게 수행했을 뿐이라는 그의 주장에 재판부는

"명령이 잘못되고 불법적인 경우에는, 명령을 마지못해 따른 것 또한 불법적인 행위로 성립된다"라는 명제로 유죄를 선고한다. 그리고 1962년 5월 31일, 교수형이 집행되었다.


아이히만은 홀로코스트를 설계할 때 그 프로세스를 세분화하는데 주력했는데, 이는 작은 역할을 맡김으로써 그 역할을 수행하는 개개인이 책임의식을 덜 느끼게 하기 위함이었다고 한다. (책임의 소재가 분명하지 않고 책임을 전가하기에 쉬운 환경에서 양심이 발동되기 어렵다는 것은 밀그램의 실험에서 밝혀진 바 있다.) 사람들이 자신에게 주어진 작은 업무를 성실히 수행한 결과 홀로코스트라는 거대한 톱니가 돌아갔고 결국 이 더럽게 효과적인 분업체계는 수백만명의 유대인을 죽였다.


네불라가 어느 독재자의 첫 번째도 아닌 '네 번째' 대역 배우였다는 건 나치가 추구했던 홀로코스트의 분업화를 연상시킨다. 독재자는 한 사람이었지만, 동시에 여러 곳에서 존재했다. 그를 연기했던 수많은 대역들은, 또는 네불라는,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에 성실히 임했을 뿐이다. 그리고 수많은 시민들이 학살당했다.


"나는 아무것도 알지 못했어요. 그분(미토스)의 걸음걸이, 말투, 행동, 그분이 정해주신 것 외 어떤 것도 덧붙이지 않고 성실히 대역을 수행했을 뿐이에요."


"나는 내게 주어진 차량유세 대역이라는 역할을 잘 수행하기 위해 열심히 했을 뿐이에요. 내 연기 덕분에 대중들은 즐거워했고, 그분은 다른 중요한 일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인지 아이히만의 개소리에서 단어만 몇 개 바꿔봤을 뿐인데, 위화감이 없다. 놀랍지도 않지.


"감옥에 있는 동안 다시 알아봤어요. 그동안 내가 뭘 했는지..그리고 그 사람들은 정말 뭘 했는지. 처음으로 그것들이 궁금해졌어요."

무지에서 비롯된 체계에의 순응은 얼마나 비극적인가.

악은 요란하지 않게 평범한 사람들의 수동적 태도 속에서 자라난다. 그리고 뒤늦게 깨닫고 후회한들 절대 사라지지 않는 죄라는 무거운 흔적과 상처를 남긴다. 그저 남을 흉내 내는 것을 잘했던 착하고 성실했던 네불라에게도 그랬다.


"나를 판단해줘요"

이미 답을 알고 있는 질문에 대한 답을 내가 아닌 타인에게서 찾는 것은, 결국 다른 답을 원하기 때문이다. 독재정권이 무너지고, 실형을 살면서야 미토스와 미토스를 위시한 독재정권이 자행한 악행들을 정면으로 마주했던 네불라는 아무 생각 없이 '독재자의 대역'을 해온 자신에 대한 부끄러움과 죄의식을 느꼈다. 그런 그에게는 지난 삶에 대한 후회와 부끄러움을 안은 채로 살아온 자기 자신을 너그럽게 이해해주고 잘 해왔다고 위로해줄 누군가의 한 마디가 절실했을 것이다.


네불라는 어쩌면 오랜 시간 원숭이탈 뒤에서 자신의 삶을 따뜻한 시선으로 평가해줄 수 있는 사람을 찾고 있었을지 모른다. 어린아이와 함께 울고 웃어주던 수아를 본 순간, 그는 자신이 그토록 기다려왔던 사람이라는 확신이 들었을 것이다. '저 사람이라면 나 자신보다도 나의 삶을 따뜻하게 봐줄 수 있지 않을까...'라는 기대를 안고 수아에게 다가가지 않았을까. 그렇게 어렵게 둘러둘러 건넨 조심스러운 한 마디에서 두 사람의 인생이 교차했다.

"저... 나도 찍어줄 수 있어요?"


그렇게 공들여 토해낸 네불라의 인생사를 수아는 역겨워하며 힐난한다.

그러나 한편으론 자신에게 그를 비난하거나 평가를 내릴 자격이 있는지 스스로 의문을 갖는다. 네불라의 인생을 통해 수아는 자신의 인생을 들여다보기 시작한다. 아픈 동생을 보살피기 위해 입양된 good girl. 칭찬받기 위해 가족들이 바라고 원하는 착한 아이로 살아왔던 어린 시절, 그리고 그로부터 도망쳐 온 지금. 누군가의 대역으로 살아왔고, 그를 후회하며 나 자신을 찾고 사랑하고 싶어 하는 노인의 삶과 자신의 삶은 어딘지 모르게 닮아있지 않나.


서로의 인생의 교차하는 지점에서 인간은 서로를, 그리고 자기 자신을 구원한다.

네불라는 수아와의 만남을 통해 자기 자신과 자신의 인생을 온전히 받아들인다. 수아 또한 네불라와의 만남을 통해 자신을 돌아보고 또 앞으로 나아갔다.


사람들은 꽤나 자주 자신이 이미 갖고 있는 답을 스스로 발견해내는 것은 어려워하면서 나도 모르는 사이 너무도 쉽게 타인에게 답을 찾아주곤 한다. 네불라는 극이 끝날 때까지 수아의 이야기를 듣지 못했다. 그와의 만남이 수아를 어떻게 변화시켰는지도 영원히 알 수 없겠지. 수아의 이야기는 대신 우리(관객)에게 전해졌다. 그녀 또한 그녀의 이야기가 우리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알 수 없을 테지만, 한 가지 분명한 건 우리의 인생이 2시간이라는 찰나의 순간 교차했고, 이 느슨한 인연이 서로를 구원했고 또 구원할 것이라는 것이다.


인생은 내 키만큼 깊은 바다.

자신의 바다에서 버둥대는 것에 지칠 때 필요한 건 어쩌면 내 옆에서 또는 멀리서 버둥대는 누군가와 눈이 마주치고 서로를 향해 씨익 웃어주는 찰나의 순간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