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동네에는 오래된 빌라 단지가 있다. 88 올림픽이 개최되던 해에 지어진 빌라답게, 오랜 세월의 흔적이 곳곳에 배어 있다.
이곳은 약 30동이 모여 있는 대단지로, 여기저기 아름드리 나무들이 많이 심겨있다. 소나무, 벚나무, 은행나무, 목련까지. 숲 속에 온 건가 싶을 정도이다. 그 나무들 사이에 감나무 한 그루가 있다.
이 감나무의 열매가 단감이 될지, 연시가 될지는 아는 사람도 드물고, 아무도 관심을 두지 않는다. 그런데 감나무 앞에 의자를 대놓고 앉아 계신 할머니 한 분을 종종 보게 되었다. 할머니의 임무는 감을 쪼아 먹는 까치들을 쫓아내는 일이다. 그날도 어김없이 할머니는 까치를 쫓아내고 계셨고, 쫓겨난 까치가 허둥지둥 날아갔다.
"워이~ 워이~ 이놈의 새들은 어쩜 그렇게 잘 익은 감만 용케 찾아내는지, 쯧쯧!"
나는 할머니를 힐끔 바라보았다.
"이 나무는 단감나무여."
"아, 네. 그렇군요."
"내가 이사 올 적에 직접 심은 나무여."
"아, 그러세요? 여기 오래 사셨겠네요."
"작년엔 새들이 감을 다 쪼아 먹어서 하나도 맛을 못 봤어."
"아, 네. 이 단지는 나무가 많아서 새들도 꽤 많이 사는 것 같아요."
"감은 서리가 내릴 때까지 따면 안 돼. 서리를 맞아야 맛이 제대로 들지."
"....."
할머니의 마지막 말씀에 나는 아무런 대답을 하지 못한 채 잠시 생각에 잠겼다.
'사람도 모진 풍파와 고통을 견뎌내야 비로소 사람다운 맛과 향이 나는 법인데…
감나무도 마찬가지구나.'
나는 할머니께 눈인사를 하고 돌아섰다. 몇 걸음을 떼고 나서 문득 뒤돌아보니, 할머니 머리 위에도 하얗게 서리가 내려앉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