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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7년 수출 100억 달러 달성

한국 자본주의의 역사 2편 - 08

by 한정엽

1977년 12월, 한국이 달성한 수출 100억 달러는 단순한 숫자를 넘어선 역사적 의미를 담고 있었다.


이는 해방 이후 분단과 전쟁의 폐허 속에서 출발한 한국 경제가 세계 시장에서 당당한 경쟁력을 인정받은 상징적 순간이었다.


1971년 수출 10억 달러를 달성한 지 불과 6년 만에 10배 성장을 이룬 이 성과는, 한국 경제의 구조적 전환을 보여주는 결정적 지표였다.


이 성취의 배경에는 1960년대부터 본격화된 수출 주도형 경제성장 전략이 자리 잡고 있었다.


박정희 정부는 수입대체 공업화에서 수출지향 공업화로의 전환을 통해 한국 경제의 근본적 체질 개선을 추진했다.


이러한 정책적 전환은 단순히 경제 정책의 변화를 넘어서, 한국 사회 전체의 의식과 문화를 변화시키는 촉매 역할을 했다.


국제적 맥락에서의 한국 경제의 위치


1970년대 중반 세계 경제는 1973년과 1979년 두 차례의 석유 파동으로 인해 극심한 불안정성을 겪고 있었다.


이러한 국제적 위기 상황에서 한국이 수출 100억 달러를 달성한 것은 더욱 주목할만한 성과였다.


당시 한국의 1인당 국민소득이 1,000달러에도 미치지 못하는 상황에서, 이는 한국 경제의 역동성과 적응력을 세계에 각인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세계 무역 질서에서 한국의 지위는 이 시기를 기점으로 근본적으로 변화했다.


1960년대까지만 해도 원조 수혜국이었던 한국이 1970년대 후반에는 세계 20위권의 수출국으로 부상한 것이다.


이러한 변화는 단순히 경제적 차원을 넘어서 한국의 국제적 위상과 발언권 강화로 이어졌다.


수출 품목의 다양화와 고부가가치화


100억 달러 수출의 내용을 분석해 보면, 한국 경제의 질적 성장을 확인할 수 있다.


1960년대 초반 한국의 주요 수출품은 농산물, 광물, 그리고 가발, 의류 등 단순 가공품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1970년대 중반을 거치면서 섬유, 신발, 전자제품, 철강 등으로 수출 품목이 크게 다양화되었다.


특히 주목할 점은 중화학공업 제품의 비중이 급속히 증가했다는 것이다.


1970년 전체 수출에서 중화학공업 제품이 차지하는 비중은 13.8%에 불과했으나, 1977년에는 37.4%로 급증했다.


이는 한국 경제가 노동집약적 경공업에서 자본집약적 중화학공업으로 산업구조를 고도화시켰음을 의미했다.


기업가 정신과 근로자 의식의 변화


수출 100억 달러 달성의 이면에는 한국인의 기업가 정신과 근로 의식의 변화가 자리 잡고 있었다.


1960년대 후반부터 본격화된 수출 드라이브 정책은 단순히 정부 차원의 정책을 넘어서 민간 기업과 근로자들의 의식을 근본적으로 변화시켰다.


"수출은 국력"이라는 슬로건 아래, 전 국민이 수출 증대에 매진하는 사회적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수출은 국력의 총화 라는 방송 화면 <출처 : ktv>

기업가들은 해외 시장 개척을 위해 적극적으로 나섰고, 근로자들은 품질 향상과 생산성 증대를 위해 노력했다.


이러한 변화는 한국 사회의 근본적 체질을 바꾸어 놓았다.


농업 중심의 전통 사회에서 공업 중심의 근대 사회로의 전환이 가속화되었으며, 이 과정에서 한국인의 의식과 생활양식에도 커다란 변화가 일어났다.


1단계: 수출 기반 조성 (1962-1966년)


한국의 수출 100억 달러 달성은 1960년대 초반부터 시작된 체계적인 준비 과정의 결실이었다.


1962년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의 시작과 함께 정부는 수출 진흥을 국가 정책의 최우선 과제로 설정했다. 이 시기의 핵심은 수출 기반 시설의 구축과 제도적 틀의 마련이었다.


정부는 수출 진흥을 위한 다양한 제도적 장치를 도입했다.


1962년 한국무역협회의 설립, 1964년 수출보험제도의 도입, 1965년 수출금융 특별회계의 설치 등이 그것이었다.


또한 환율 현실화를 통해 수출 경쟁력을 제고했으며, 각종 수출 지원책을 통해 기업들의 해외 진출을 적극 뒷받침했다.


이 시기의 성과는 1964년 수출 1억 달러 달성으로 나타났다.


비록 절대 규모는 작았지만, 이는 한국 경제가 본격적인 수출 드라이브 체제로 전환했음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수출 품목도 1차 산품에서 경공업 제품으로 서서히 변화하기 시작했다.


2단계: 수출 급성장기 (1967-1972년)


1960년대 후반부터 1970년대 초반까지는 한국 수출의 급성장기였다.


이 시기 한국 수출은 연평균 30% 이상의 고성장을 기록했다. 1967년 3억 달러를 돌파한 이후, 1968년 4억 달러, 1969년 6억 달러, 1970년 8억 달러를 차례로 달성하며 가파른 성장세를 보였다.


이러한 급성장의 배경에는 국제적 요인과 국내적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했다.


국제적으로는 베트남 전쟁으로 인한 특수와 세계 경제의 호황이 한국 수출에 유리한 환경을 조성했다.


국내적으로는 풍부하고 질 좋은 노동력을 바탕으로 한 경공업의 경쟁력이 세계 시장에서 인정받기 시작했다.


특히 섬유, 의류, 신발, 합판 등 노동집약적 제품들이 수출의 주력을 이루었다.


이들 제품은 상대적으로 낮은 기술 수준과 저렴한 노동력을 바탕으로 가격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었으며, 미국과 일본 등 선진국 시장에서 큰 인기를 얻었다.


1971년 수출 10억 달러 달성은 이 시기의 정점을 보여주는 성과였다.


이는 한국이 본격적인 수출국 대열에 합류했음을 의미하는 상징적 사건이었다.


정부는 이를 기념하여 '수출의 날'을 제정하고, 수출 유공자에 대한 포상을 확대했다.



수출 100억 경축 아치 <출처 : 경향신문>


3단계: 중화학공업화와 수출 다각화 (1973-1977년)


1970년대 중반 이후 한국 수출은 새로운 단계에 접어들었다.


1973년 정부가 발표한 중화학공업 육성 정책은 한국 수출 구조의 고도화를 촉진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철강, 조선, 기계, 전자, 석유화학 등 중화학공업 분야에 대한 집중 투자가 시작되었고, 이는 수출 품목의 다양화와 고부가가치화로 이어졌다.


1973년과 1979년 두 차례의 석유 파동은 한국 경제에 큰 충격을 주었지만, 동시에 수출 구조 고도화의 필요성을 더욱 부각했다.


정부와 기업들은 에너지 절약형 고부가가치 제품 수출에 집중했으며, 이는 결과적으로 한국 수출의 경쟁력을 한층 강화시켰다.


이 시기의 특징적인 변화는 수출 시장의 다변화였다.


1960년대까지 미국과 일본에 크게 의존했던 수출 시장이 유럽, 중동, 동남아시아 등으로 확산되었다.


특히 중동 건설 붐과 함께 건설 서비스 수출이 급성장했으며, 이는 한국 수출의 새로운 영역을 개척하는 계기가 되었다.


4단계: 100억 달러 달성과 그 의미 (1977년)


1977년 한국의 수출은 마침내 100억 달러를 돌파했다.


구체적으로는 100억 4천만 달러를 기록하여 전년 대비 30.2% 증가한 놀라운 성과를 거두었다.


이는 1971년 10억 달러 달성 이후 6년 만에 10배 성장을 이룬 것으로, 세계 무역사에서도 유례를 찾기 어려운 급성장이었다.


100억 달러 수출의 내용을 살펴보면, 한국 경제의 구조적 변화를 명확히 확인할 수 있다.


섬유류가 여전히 최대 수출품목(23.1%)이었지만, 철강(8.7%), 전자제품(7.2%), 기계류(6.8%) 등 중화학공업 제품의 비중이 크게 증가했다.


또한 선박, 자동차 등 고도기술을 요하는 제품들도 수출 품목에 본격 등장하기 시작했다.


지역별 수출 현황을 보면, 미국(32.0%), 일본(21.8%)이 여전히 주요 수출 대상국이었지만, 독일(5.2%), 홍콩(4.1%), 영국(3.8%) 등 시장 다변화도 진전되었다.


특히 중동 지역으로의 수출이 급증한 것은 이 시기의 특징적 현상이었다.



10억불 수출 기념 우표 <출처 : 경향신문>


100억 달러 달성의 역사적 의의


1977년 수출 100억 달러 달성은 한국 경제사에서 하나의 분수령을 이루는 사건이었다.


이는 단순히 무역 규모의 확대를 넘어서, 한국이 세계 경제 체제의 주변부에서 준주변부로 상승했음을 의미하는 상징적 성과였다.


해방 이후 원조에 의존했던 한국 경제가 자립적 성장 궤도에 안착했음을 보여주는 명확한 지표이기도 했다.


이 성취는 한국인의 자신감과 국가적 자긍심을 크게 높였다.


"한강의 기적"이라 불리는 한국의 경제발전 신화가 국제적으로 인정받기 시작한 것도 이 시기부터였다.


많은 개발도상국들이 한국의 발전 모델을 연구하고 벤치마킹하기 시작했으며, 한국은 개발도상국의 성공 사례로 주목받게 되었다.


사회경제적 파급효과와 구조적 변화


수출 100억 달러 달성은 한국 사회 전반에 광범위한 파급효과를 가져왔다.


경제적으로는 고용 창출과 소득 증대를 통해 국민 생활 수준 향상에 기여했다.


1970년대 후반 한국의 1인당 국민소득은 1960년대 초반의 10배 이상 증가했으며, 이는 주로 수출 증대에 기인한 것이었다.


사회적으로는 계층 구조의 변화를 가져왔다.


수출 산업의 발달과 함께 새로운 중산층이 형성되었으며, 도시화와 산업화가 급속히 진행되었다. 농촌에서 도시로의 인구 이동이 가속화되었고, 이는 한국 사회의 근본적 체질 변화를 의미했다.


문화적으로는 서구적 가치관과 생활양식의 확산을 촉진했다.


수출을 통한 해외와의 접촉 증대는 한국 사회의 개방성을 높였으며, 전통적 가치관과 근대적 가치관의 혼재라는 특징적 현상을 낳았다.


도전과 한계, 그리고 미래에 대한 시사점


하지만 수출 100억 달러 달성이 모든 문제를 해결한 것은 아니었다.


수출 주도형 성장 전략은 대외 의존도 심화, 소득 분배 악화, 환경 파괴 등의 부작용도 함께 가져왔다.


특히 수출 기업과 내수 기업, 대기업과 중소기업, 수도권과 지방 간의 격차가 확대되는 문제가 심화되었다.


또한 수출 상품의 기술 수준이 여전히 선진국에 비해 낮고, 핵심 기술과 부품을 해외에 의존하는 구조적 한계도 노출되었다.


이는 향후 한국 경제가 기술 집약적 고부가가치 산업으로의 전환이 필요함을 시사했다.


국제 정치경제적 측면에서도 새로운 도전이 예상되었다.


한국의 급속한 수출 증가는 주요 수출 대상국들과의 무역 마찰을 야기할 가능성이 높았으며, 실제로 1980년대 들어 미국, 유럽 등과의 통상 갈등이 본격화되었다.


100억불 수출의 날 기념식장 모습 <출처 : ktv>


한국 경제발전 모델의 역사적 평가


1977년 수출 100억 달러 달성으로 상징되는 한국의 경제발전 모델은 후발 개발도상국들에게 하나의 전형을 제시했다.


정부 주도의 수출지향 공업화 전략, 교육을 통한 인적 자원 개발, 근면성실한 국민성 등이 성공 요인으로 평가받았다.


그러나 동시에 이 모델이 갖는 시대적 특수성과 한계도 인정해야 한다.


냉전체제 하에서의 미국의 지원, 일본과의 국교 정상화, 베트남 특수 등 유리한 국제 환경이 뒷받침되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측면이 크다.


또한 권위주의적 정치체제 하에서 추진된 것이어서, 민주주의와 인권 측면에서는 많은 문제점을 노정했다.


21세기 한국 경제에 주는 교훈


수출 100억 달러 달성의 경험은 오늘날 한국 경제에도 중요한 시사점을 제공한다.


무엇보다 국가적 목표 설정과 이를 달성하기 위한 전 국민적 의지의 중요성을 보여준다.


또한 변화하는 국제 환경에 능동적으로 적응하고, 지속적인 혁신을 통해 경쟁력을 유지해야 한다는 교훈을 준다.


현재 한국 경제가 직면한 저성장, 양극화, 고령화 등의 구조적 문제들을 해결하는 데도 1970년대의 경험에서 배울 점이 많다.


새로운 성장 동력 발굴, 혁신 생태계 구축, 인적 자원 개발 등은 당시나 지금이나 경제발전의 핵심 과제이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1977년 수출 100억 달러 달성은 한국이 후진국에서 중진국으로 도약하는 결정적 계기였다.


이는 한국인의 잠재력과 가능성을 세계에 증명한 역사적 성과이자, 지속적인 발전을 위한 새로운 도전의 출발점이기도 했다.


오늘날 우리가 K-pop, K-뷰티, K-푸드 등을 통해 세계 문화를 선도하고 있는 현실의 뿌리에는 바로 이 시기의 성취가 자리 잡고 있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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