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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석유파동(1978년): 경제의 또 다른 시련

한국 자본주의의 역사 2편 - 09

by 한정엽

1978년, 한국 경제는 다시 한번 국제 유가의 급격한 변동이라는 거대한 파도에 직면했다.


제1차 석유파동으로부터 불과 5년이 지난 시점에서 발생한 이 두 번째 충격은 한국 사회에 더욱 깊은 성찰과 구조적 변화를 요구했다.


제2차 석유파동의 직접적 발단은 1978년 말부터 시작된 이란의 정치적 격변이었다.


팔레비 왕조의 몰락과 이슬람 혁명의 전개 과정에서 이란의 원유 생산과 수출이 급격히 중단되었고, 이는 국제 석유 시장에 심대한 공급 부족을 야기했다.


이란이 세계 제2위의 원유 수출국이었던 상황에서, 일일 약 550만 배럴의 원유 공급이 중단된 것은 국제 유가를 하루아침에 폭등시키는 결정적 요인이 되었다.



이슬람 혁명 <출처 : 위키피디아>


국제 유가는 1978년 배럴당 13달러에서 1979년 말 35달러로 약 3배 가까이 상승했다.


이러한 급격한 유가상승은 단순히 공급 부족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제1차 석유파동 이후 형성된 산유국들의 협상력 강화, 달러 약세로 인한 석유의 실질 가치 하락에 대한 보상 심리, 그리고 국제 투기 자본의 개입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였다.


한국 경제 구조의 취약성과 대외 의존성


제2차 석유파동이 한국 경제에 미친 충격은 제1차 때보다 더욱 복합적이고 심층적이었다.


1970년대 중반 이후 한국은 중화학공업 육성 정책을 통해 경제 구조의 고도화를 추진해 왔으나, 이러한 발전 전략은 역설적으로 에너지 의존도를 더욱 심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1978년 당시 한국의 에너지 자급률은 15%에 불과했으며, 석유 의존도는 전체 에너지 소비의 60%를 넘어서고 있었다.


특히 중화학공업의 핵심 업종인 철강, 석유화학, 조선, 자동차 산업은 모두 에너지 집약적 산업이었기 때문에, 유가상승의 파급효과는 즉각적이고 광범위하게 나타났다.


한국의 경제 구조가 가진 또 다른 취약성은 수출 주도형 성장 전략에서 비롯되었다.


1970년대 후반 한국의 수출 비중은 GDP의 30%를 넘어섰으며, 이 중 상당 부분이 에너지 집약적 제품들이었다.


따라서 유가상승은 생산 비용 증가를 통해 한국 제품의 국제 경쟁력을 직접적으로 위협하는 요소로 작용했다.


제1차 석유파동과의 차별적 특성


제2차 석유파동이 한국 경제에 미친 영향을 정확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제1차 석유파동과의 차이점을 면밀히 분석해야 한다.


제1차 석유파동 당시 한국은 상대적으로 단순한 경제 구조를 가지고 있었으며, 주력 수출 품목은 섬유, 신발, 가발 등 노동집약적 경공업 제품이 중심이었다.


반면 1978년의 한국 경제는 중화학공업화 정책의 본격적 추진으로 인해 훨씬 복잡하고 에너지 의존적인 구조로 변화해 있었다.


포항제철의 1기 설비가 완공되고, 울산과 여수에 대규모 석유화학 단지가 조성되는 등 에너지 소비량이 급격히 증가한 상황이었다.


더욱 중요한 차이점은 한국 경제의 국제화 수준이었다.


1970년대 후반 한국은 이미 세계 경제 체계에 깊숙이 편입되어 있었고, 따라서 국제 유가 변동의 파급효과가 더욱 즉각적이고 직접적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었다.


초기 충격과 즉각적 반응 (1978년 말~1979년 초)


제2차 석유파동의 초기 단계에서 한국 정부와 기업들의 대응은 제1차 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 보다 체계적이고 신속한 양상을 보였다.


정부는 1979년 1월 '에너지 절약 종합 대책'을 발표하고, 석유 수입 다변화 정책을 강화했다.


하지만 이러한 정책적 대응에도 불구하고 경제 전반에 미친 파급효과는 즉각적이고 광범위했다.


우선 물가 상승이 급격히 나타났는데, 1979년 소비자 물가 상승률은 18.3%에 달했다.


이는 제1차 석유파동 당시의 24.3%보다는 낮았지만, 여전히 경제 전반에 심각한 인플레이션 압력을 가했다.


제조업 부문에서는 원자재 가격 상승과 에너지 비용 증가로 인해 생산성이 급격히 하락했다.


특히 중화학공업 부문의 타격이 심각했는데, 철강업계는 코크스와 중유 가격 상승으로, 석유화학업계는 원료인 나프타 가격 급등으로 극심한 경영난에 직면했다.


제2차 석유파동 당시의 모습 <출처 : 위키피디아>


정부의 정책적 대응과 경제 구조조정 (1979년~1980년)


정부는 제2차 석유파동에 대응하기 위해 다층적이고 종합적인 정책 패키지를 마련했다.


먼저 에너지 절약 정책을 대폭 강화했는데, 이는 단순한 절약 캠페인을 넘어서 법적, 제도적 기반을 갖춘 체계적 접근이었다.


1979년 12월 '에너지 이용 합리화법'이 제정되어 에너지 다소비 업체에 대한 강제적 절약 목표를 설정하고, 에너지 절약 시설 투자에 대한 세제 혜택을 확대했다.


또한 에너지 절약형 산업 구조로의 전환을 촉진하기 위해 에너지 집약적 업종에 대한 투자를 억제하고, 고부가가치 업종 육성에 정책 역량을 집중했다.


국제 석유 수급 측면에서는 공급선 다변화 정책을 적극적으로 추진했다.


중동 지역에 대한 의존도를 낮추기 위해 멕시코, 북해, 인도네시아 등으로 수입선을 확대하고, 장기 도입 계약을 통해 공급 안정성을 확보하려 노력했다.


산업계의 적응과 구조 변화


제2차 석유파동은 한국 산업계에 근본적인 패러다임 전환을 요구했다.


기업들은 에너지 효율성을 경영의 핵심 과제로 인식하기 시작했고, 이는 생산 공정의 혁신과 기술 개발로 이어졌다.


포항제철은 이 시기에 에너지 절약형 제철 공정 기술 개발에 집중 투자했으며, 부생가스 회수율 향상과 폐열 이용 시설 확충을 통해 에너지 원단위를 대폭 개선했다.


석유화학업계에서도 공정 효율 개선과 에너지 절약 기술 도입이 활발히 진행되었다.


자동차 산업에서는 연비 향상이 핵심 경쟁력으로 부상했다.


현대자동차의 포니는 이미 1970년대 중반부터 소형차 시장을 겨냥해 개발되었지만, 제2차 석유파동을 계기로 연비 효율성이 더욱 중요한 판매 포인트로 인식되었다.


금융 부문과 거시경제 정책의 변화


제2차 석유파동은 한국의 거시경제 정책 운용에도 중대한 변화를 가져왔다.


높은 인플레이션과 경상수지 악화라는 이중고에 직면한 정부는 긴축 정책과 구조조정 정책을 병행하는 복합적 접근을 택했다.


한국은행은 1979년 하반기부터 금리를 단계적으로 인상하여 인플레이션 압력을 억제하려 했다.


동시에 정부는 재정 지출을 조정하여 내수 과열을 방지하고, 경상수지 개선을 위한 수출 촉진 정책을 강화했다.


외환 정책 측면에서는 원화 평가절하를 통해 수출 경쟁력 회복을 도모했으나, 이는 수입 원자재 가격 상승을 통해 인플레이션을 가중시키는 딜레마를 야기했다.


이러한 정책적 딜레마는 1980년대 초 안정화 정책의 필요성을 더욱 부각했다.


현대자동차 포니의 모습 <출처 : 현대자동차>


사회적 파급효과와 국민 생활의 변화


제2차 석유파동은 경제 지표상의 변화를 넘어서 한국 사회 전반의 생활양식과 의식 구조에 근본적 변화를 가져왔다.


에너지 절약이 단순한 경제적 필요를 넘어서 사회적 덕목으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정부는 '에너지 절약 실천 운동'을 전국적으로 전개했고, 이는 국민들의 일상생활 깊숙이 스며들었다.


실내 온도 조절, 대중교통 이용 활성화, 에너지 효율적 가전제품 사용 등이 사회 전반의 관심사로 부상했다.


교육 부문에서도 에너지 교육이 강화되었고, 언론에서는 에너지 절약 관련 캠페인과 정보 제공이 활발히 이루어졌다.


이러한 사회적 변화는 장기적으로 한국 사회의 에너지 의식 수준을 한 단계 끌어올리는 계기가 되었다.


제2차 석유파동의 역사적 의미와 평가


제2차 석유파동은 한국 경제사에서 단순한 위기 상황을 넘어서 경제 발전 패러다임의 전환점으로 평가된다.


이 사건은 한국이 중진국으로 도약하는 과정에서 직면해야 했던 구조적 한계를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동시에, 이를 극복하기 위한 새로운 발전 전략 모색의 계기를 제공했다.


제1차 석유파동이 한국 경제에 외부 충격의 심각성을 각인시켰다면, 제2차 석유파동은 에너지 효율성과 산업 구조 고도화의 필요성을 확실히 인식시켰다.


이는 1980년대 이후 한국의 경제 정책이 양적 성장에서 질적 성장으로, 에너지 집약적 구조에서 기술 집약적 구조로 전환하는 중요한 동력이 되었다.


장기적 파급효과와 구조적 변화


제2차 석유파동의 가장 중요한 장기적 효과는 한국 경제의 에너지 효율성 개선과 산업 구조 다변화였다.


1980년대 들어 한국의 에너지 원단위는 지속적으로 개선되었고, 이는 국제 경쟁력 향상의 핵심 요소가 되었다.


또한 이 시기를 계기로 한국 기업들의 기술 개발 역량이 크게 강화되었다.


에너지 절약 기술, 공정 효율 개선 기술, 대체 에너지 기술 등에 대한 연구개발 투자가 급격히 증가했고, 이는 1980년대 후반 기술 집약적 산업으로의 전환을 가능하게 하는 기반이 되었다.


정책적 측면에서는 에너지 정책의 체계화와 장기 계획 수립 능력이 크게 향상되었다.


에너지 절약 정책, 에너지 공급 다변화 정책, 대체 에너지 개발 정책 등이 종합적으로 추진되면서, 한국의 에너지 정책 역량이 한 단계 성숙해졌다.


국제 경제 환경 변화에 대한 적응력 강화


제2차 석유파동을 통해 한국 경제는 국제 경제 환경 변화에 대한 적응력과 대응력을 크게 강화했다.


이는 단순히 에너지 부문에 국한되지 않고, 전반적인 경제 운용 능력의 향상으로 이어졌다.


특히 정부의 위기관리 능력과 정책 조정 능력이 크게 향상되었다.


제1차 석유파동 때의 시행착오를 바탕으로 더욱 체계적이고 효과적인 대응 방안을 마련할 수 있었고, 이는 이후 다양한 대외 충격에 대한 대응에서도 중요한 자산이 되었다.


기업 차원에서도 리스크 관리 능력과 경영 효율성이 크게 개선되었다.


에너지 비용 관리, 원자재 조달 다변화, 생산 공정 효율화 등이 기업 경영의 핵심 요소로 자리 잡았고, 이는 한국 기업들의 국제 경쟁력 향상에 직접적으로 기여했다.



석유화학단지의 모습 <출처 : 위키피디아>


한국형 발전 모델의 진화


제2차 석유파동은 한국형 경제 발전 모델의 진화 과정에서 중요한 전환점 역할을 했다.


1960년대와 1970년대 전반의 노동집약적, 수출 주도형 성장 모델이 한계를 드러내면서, 보다 고도화되고 지속가능한 발전 모델의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이러한 인식의 전환은 1980년대 이후 한국이 추진한 기술 집약적 산업 육성, 연구개발 투자 확대, 교육 투자 강화 등의 정책적 기반이 되었다.


또한 환경과 에너지 효율성을 고려한 지속가능한 발전 개념이 정책 담론에 본격적으로 등장하는 계기가 되었다.


위기를 통한 성장과 성숙


제2차 석유파동은 한국 경제에 심각한 충격과 시련을 안겨주었지만, 동시에 구조적 취약성을 극복하고 한 단계 더 성숙한 경제 체제로 발전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이 사건을 통해 한국은 단순히 외부 충격에 대응하는 수준을 넘어서, 장기적이고 전략적인 관점에서 경쟁력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발전해 나갔다.


특히 에너지 효율성 개선과 기술 혁신 역량 강화는 1980년대 이후 한국이 아시아의 신흥공업국에서 선진국으로 도약하는 과정에서 핵심적인 경쟁 우위 요소가 되었다.


제2차 석유파동은 이러한 변화의 출발점이자 촉매 역할을 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결국 제2차 석유파동은 한국 경제사에서 위기가 어떻게 기회로 전환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로 남아있다.


외부 충격에 대한 적극적이고 창의적인 대응을 통해 오히려 경제 체질을 강화하고 발전 역량을 한 단계 끌어올린 한국의 경험은, 개발도상국의 경제 발전 과정에서 참고할 만한 중요한 교훈을 제공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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