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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H무역사건과 박정희 대통령 피살

한국 자본주의의 역사 2편 - 10

by 한정엽

1979년은 한국 현대사에서 가장 극적인 전환점 중 하나로 기록된다.


이 해는 18년간 지속되어 온 박정희 체제의 종막이자, 한국 사회 전반에 축적되어 온 구조적 모순이 폭발적으로 분출된 시점이었다.


1970년대 후반 한국 경제는 중화학공업화 정책의 추진으로 외형적 성장을 이루었으나, 동시에 심각한 내재적 불균형을 노정하고 있었다.


박정희 정권의 경제 개발 전략은 강력한 국가 주도의 성장 모델을 기반으로 했다.


그러나 이러한 발전 방식은 필연적으로 노동자들의 희생을 전제로 했으며, 특히 여성 노동자들은 저임금과 열악한 노동 환경 속에서 한국 경제의 기적을 뒷받침하는 숨겨진 주역이었다.


섬유산업을 중심으로 한 수출 지향적 경제 구조는 여성 노동력에 크게 의존했으나, 이들의 노동권과 인간적 존엄성은 체계적으로 무시되었다.


YH무역회사는 이러한 시대적 맥락 속에서 등장한 전형적인 수출 기업이었다.


1966년 설립된 이 회사는 가발과 의류를 주요 생산품으로 하는 섬유업체로, 주로 젊은 여성들을 고용하여 미국과 유럽 시장을 겨냥한 제품을 생산했다.


회사의 성장 과정은 한국 경제의 압축 성장과 궤를 같이했으나, 동시에 그 성장의 그림자 역시 고스란히 품고 있었다.


유신 체제의 모순과 사회적 갈등의 심화


1972년 10월 유신 이후 박정희 정권은 더욱 강압적인 통치 방식을 구사했다.


유신 헌법 체제는 경제 발전을 위한 정치적 안정이라는 명분하에 기본권을 제약하고 노동 운동을 억압했다. 이러한 정치적 억압은 경제 영역에서도 그대로 반영되어, 노동자들의 권익 보호보다는 자본의 이익과 수출 증대가 우선시되었다.


1970년대 중반 이후 국제 경제 환경의 변화는 한국의 수출 기업들에게 새로운 도전을 제기했다.


1973년과 1979년 두 차례의 석유 파동은 원자재 가격 상승과 세계 경기 침체를 야기했으며, 특히 노동집약적 산업인 섬유업계는 심각한 경영난에 직면했다. YH무역 역시 이러한 구조적 위기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회사의 경영진은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생산비 절감과 구조조정을 추진했으나, 이는 필연적으로 노동자들의 희생을 요구하는 것이었다.


임금 삭감, 노동 강도 증가,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대량 해고가 검토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노동자들, 특히 여성 노동자들의 생존권 자체가 위협받게 되었다.


노동 운동의 새로운 양상과 여성 노동자의 각성


1970년대 한국의 노동 운동은 전태일의 분신 이후 새로운 전기를 맞았다.


1970년 11월 13일 전태일의 죽음은 한국 사회에 노동 문제의 심각성을 각인시켰으며, 이후 노동자들의 권익 보호와 인간다운 삶에 대한 요구가 점차 확산되었다.


특히 여성 노동자들은 이중적 억압 구조 속에서도 자신들의 권리를 주장하기 시작했다.


YH무역의 여성 노동자들은 1970년대 한국 여성 노동자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주었다.


대부분 농촌 출신의 미혼 여성들로,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기 위해 도시로 나온 이들이었다. 이들은 낮은 임금과 열악한 작업 환경 속에서도 묵묵히 일해왔으나, 회사의 일방적인 구조조정 방침에 직면하면서 저항 의식을 갖게 되었다.


1979년 초부터 YH무역의 경영난이 심화되면서 노사 갈등이 표면화되기 시작했다.


회사 측은 경영 정상화를 위해 인력 감축이 불가피하다는 입장을 고수했으나, 노동자들은 이를 일방적인 해고 통보로 받아들였다.


특히 여성 노동자들에게 해고는 단순한 직장 상실을 넘어 생존권의 박탈을 의미했다.


YH무역 여성근로자들이 1979년 8월 서울 마포구 신민당사에서 농성하고 있다. <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YH무역 노동 분쟁의 발단과 확산


1979년 5월, YH무역의 경영진은 회사의 경영난을 이유로 대대적인 구조조정을 발표했다.


이는 전체 직원의 절반에 가까운 200여 명을 해고하는 것을 골자로 했다. 해고 대상자 대부분이 여성 노동자였으며, 이들에게는 제대로 된 사전 통보나 보상도 없었다.


회사 측의 일방적인 조치에 분노한 노동자들은 즉각적인 반발에 나섰다.


5월 9일부터 시작된 노동자들의 저항은 처음에는 회사 내부에서의 항의와 농성 형태로 나타났다.


그러나 회사 측이 강경 대응으로 일관하면서 갈등은 점차 격화되었다. 여성 노동자들은 자신들의 절박한 현실을 호소하며 대화를 요구했으나, 경영진은 이를 묵살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노동자들은 더욱 조직적이고 공개적인 투쟁 방식을 모색하게 되었다.


노동자들의 저항 과정에서 주목할 점은 이들이 보여준 단결력과 조직력이었다.


대부분 20대 초반의 젊은 여성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체계적인 투쟁 조직을 구성하고 명확한 요구 사항을 제시했다. 이는 1970년대를 통해 축적된 노동 운동의 경험과 의식화 과정의 결과였다.


신민당사 농성의 시작과 정치적 파장


8월 9일, YH무역 여성 노동자들은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


회사와의 협상이 결렬되고 정부 당국의 중재도 기대할 수 없는 상황에서, 이들은 신민당사로 향했다.


당시 신민당은 유일한 야당으로서 민주화와 인권 보호를 표방하고 있었으며, 노동자들에게는 마지막 희망의 끈이었다.


신민당사 농성은 단순한 노동 분쟁을 넘어 정치적 사건으로 발전했다.


180여 명의 여성 노동자들이 당사 건물을 점거하고 자신들의 요구를 관철할 때까지 농성을 계속하겠다고 선언했다. 이들의 요구는 명확했다. 부당한 해고 철회, 적정한 퇴직금 지급, 그리고 노동자들의 기본권 보장이었다.


농성 초기 신민당 지도부는 당황스러워했다.


당시 신민당은 정부와의 관계에서 미묘한 균형을 유지하려 노력하고 있었으며, 과격한 노동 운동과의 연루를 원하지 않았다.


그러나 여성 노동자들의 절박한 호소와 언론의 관심이 집중되면서, 당은 이들을 지지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직면했다.


정부의 강경 대응과 폭력적 진압


박정희 정권은 YH무역 사건을 단순한 노동 분쟁으로 치부하지 않았다.


정권은 이 사건이 반정부 세력의 선동에 의한 것이며, 유신 체제에 대한 도전이라고 판단했다.


특히 신민당사 농성은 야당과 노동 운동 세력의 연대를 보여주는 위험한 선례로 인식되었다.


8월 11일 새벽, 정부는 강제 진압을 결정했다.


경찰 특공대가 신민당사에 투입되어 농성 중이던 노동자들을 해산시켰다. 이 과정에서 김경숙이라는 21세의 여성 노동자가 추락사하는 비극적 사건이 발생했다.


김경숙의 죽음은 한국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으며, 정권의 폭압성을 상징하는 사건으로 기록되었다.


진압 과정에서 나타난 정부의 폭력성은 당시 한국 사회의 민주주의 수준을 적나라하게 보여주었다.


젊은 여성 노동자들의 절규를 폭력으로 짓밟은 정권의 모습은 국내외적으로 큰 비판을 받았다.


특히 김경숙의 죽음은 정권의 정당성에 치명적인 타격을 입혔다.


정치적 파장과 야당의 대응


YH무역 사건은 한국 정치사에서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신민당을 비롯한 야당은 이 사건을 정권 비판의 핵심 소재로 활용했으며, 민주화 운동 세력 역시 유신 체제의 모순을 고발하는 상징적 사건으로 받아들였다.


김영삼을 비롯한 야당 지도자들은 정부의 폭력적 진압을 강력히 규탄했다.


사건 이후 정치권의 대립은 더욱 격화되었다.


야당은 국정감사와 국회 질의를 통해 정부의 책임을 추궁했으며, 여론 역시 정부에 비판적으로 돌아섰다.


특히 지식인과 종교계, 그리고 학생들은 YH무역 사건을 계기로 반정부 투쟁에 더욱 적극적으로 나섰다.


정부는 사건을 무마하기 위해 다양한 조치를 취했으나, 이미 확산된 여론의 비판을 되돌리기는 어려웠다.


오히려 사건을 은폐하려는 정부의 시도는 더 큰 의혹을 불러일으켰으며, 정권의 도덕적 권위는 크게 실추되었다.



1979년 10월 부마항쟁 당시 부산 서면의 시위대 <출처 : 시빅뉴스>



부마민주항쟁과 정치적 위기의 절정


YH무역 사건의 여파는 10월 부산과 마산에서 발생한 대규모 시위로 이어졌다.


부마민주항쟁은 YH무역 사건에서 시작된 반정부 정서가 전국적으로 확산된 결과였다.


대학생들을 중심으로 시작된 시위는 시민들의 광범위한 참여로 발전했으며, 유신 체제에 대한 근본적인 도전으로 발전했다.


부마항쟁 과정에서 시민들은 YH무역 사건을 정권의 폭압성을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로 거론했다.


김경숙의 죽음은 시위 참가자들에게 강력한 동기를 제공했으며, 정권에 대한 분노를 결집시키는 상징이 되었다.


이는 YH무역 사건이 단순한 노동 분쟁을 넘어 정치적 변혁의 기폭제 역할을 했음을 보여준다.


정부는 부마항쟁에 대해서도 군대를 동원한 강경 진압으로 대응했다.


계엄령 선포와 무력 진압은 일시적으로 상황을 안정시키는 듯했으나, 정권 내부의 균열은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깊어졌다.


박정희 대통령과 측근들 사이의 갈등이 표면화되기 시작했으며, 정권의 결속력은 급속히 약화되었다.


10.26 사건의 발생과 역사적 의미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이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에 의해 피살되는 충격적인 사건이 발생했다.


10.26 사건은 표면적으로는 정권 내부의 권력 갈등에서 비롯되었으나, 그 근본적 배경에는 YH무역 사건으로 시작된 정권의 위기가 자리하고 있었다.


김재규의 박정희 저격은 갑작스러운 우발적 행동으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유신 체제의 모순이 극한에 달한 상황에서 발생한 필연적 결과였다.


YH무역 사건과 부마항쟁을 통해 드러난 정권의 도덕적 파산과 사회적 고립은 정권 내부의 결속력을 약화시켰으며, 이는 궁극적으로 박정희의 죽음으로 귀결되었다.


박정희의 피살은 18년간 지속된 유신 체제의 종말을 의미했다.


그러나 이는 동시에 새로운 정치적 불확실성의 시작이기도 했다. 경제 정책의 연속성과 사회적 안정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높아졌으며, 민주화에 대한 기대와 우려가 교차했다.


1026 사건 현장 검증 <출처 : 경향신문>


경제 정책의 방향성 변화와 불확실성


박정희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한국 경제 정책에 근본적인 변화를 야기했다.


18년간 강력한 대통령 중심의 경제 운영 체제가 한순간에 붕괴되면서, 경제 정책의 연속성과 일관성에 큰 공백이 생겼다. 중화학공업 육성 정책, 수출 드라이브 정책 등 박정희 시대의 핵심 경제 정책들이 재검토의 대상이 되었다.


YH무역 사건은 한국의 수출 지향적 경제 발전 모델의 한계를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저임금 노동력에 의존한 성장 방식이 더 이상 지속가능하지 않다는 점이 명확해졌으며, 노동자의 권익과 복지를 고려한 새로운 발전 패러다임의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특히 여성 노동자의 인권과 노동권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크게 높아졌다.


과도기적 상황에서 최규하 대통령과 정부는 경제 정책의 안정성을 유지하려 노력했으나, 정치적 불안정은 경제계에도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다.


투자 심리가 위축되고 대외 신용도에 대한 우려가 제기되면서, 한국 경제는 새로운 도전에 직면했다.


노동 운동과 사회의식의 변화


YH무역 사건은 한국 노동 운동사에서 하나의 분수령이 되었다.


여성 노동자들의 용기 있는 투쟁은 이후 노동 운동의 새로운 동력이 되었으며, 노동자의 권익 보호와 인간다운 삶에 대한 사회적 논의를 확산시켰다.


특히 여성 노동자의 지위와 권리에 대한 인식 개선에 중요한 계기를 제공했다.


김경숙의 죽음은 한국 사회에 깊은 성찰을 요구했다.


경제 성장의 그늘에 숨겨진 노동자들의 고통과 희생이 가시화되면서, 성장 위주의 경제 정책에 대한 비판적 검토가 시작되었다.


이는 1980년대 민주화 운동과 노동 운동의 중요한 밑거름이 되었다.


사건을 통해 드러난 여성 노동자들의 조직력과 투쟁 의지는 기존의 여성에 대한 사회적 편견을 극복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들의 투쟁은 단순한 경제적 요구를 넘어 인간의 존엄성과 권리를 위한 투쟁이었으며, 이는 한국 사회의 민주주의 발전에 중요한 기여를 했다.


정치 체제의 변화와 민주화의 전망


YH무역 사건과 박정희 피살로 이어진 1979년의 격변은 한국 정치사에서 결정적인 전환점이 되었다.


유신 체제의 종말은 새로운 정치적 가능성을 열어놓았으나, 동시에 권위주의 체제의 잔재와 민주화 세력 간의 새로운 갈등 구조를 낳기도 했다.


정치적 변화는 경제 정책의 운영 방식에도 변화를 요구했다.


강력한 국가 주도의 일방적 정책 결정 과정에서 벗어나, 사회 각계각층의 의견을 수렴하는 보다 민주적인 정책 결정 과정의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특히 노동자와 시민사회의 목소리를 반영하는 새로운 거버넌스 체계의 구축이 과제로 대두되었다.


그러나 1979년의 변화가 곧바로 민주화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12.12 군사반란과 5.18 광주민주화운동으로 이어지는 또 다른 격변이 기다리고 있었으며, 진정한 민주화는 1987년 6월 항쟁을 통해서야 실현될 수 있었다.


그럼에도 YH무역 사건은 한국 민주화의 중요한 출발점이자 원동력이 되었다.


박정희 대통령 서거 뉴스 <출처 : 경향싱문>


역사적 교훈과 현재적 의미


YH무역 사건과 박정희 피살이 남긴 역사적 교훈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경제 성장과 사회 정의, 효율성과 민주주의 사이의 균형을 어떻게 잡을 것인가 하는 문제는 현재에도 중요한 과제로 남아있다.


1979년의 경험은 지속가능한 발전을 위해서는 경제적 성과와 함께 사회적 형평성과 민주적 가치가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는 점을 보여준다.


YH무역 여성 노동자들의 투쟁은 노동의 존엄성과 인간의 기본권이 경제 논리에 희생되어서는 안 된다는 보편적 가치를 확인시켜 주었다.


이는 오늘날 노동 환경의 변화 속에서도 여전히 중요한 지침이 되고 있다. 특히 비정규직 문제, 성별 임금 격차, 산업 안전 등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있어 YH무역 사건의 경험은 소중한 참고가 된다.


1979년의 격변은 또한 정치적 안정과 경제 발전이 상호 의존적 관계에 있다는 점을 보여주었다.


정치적 억압과 사회적 불평등이 심화될 때, 이는 궁극적으로 경제적 불안정과 사회적 혼란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교훈을 제공한다.


따라서 지속가능한 발전을 위해서는 정치적 민주화와 경제적 발전이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


한국 현대사에서 1979년은 권위주의 발전 모델의 한계가 명확히 드러난 해였다.


YH무역 사건에서 시작되어 박정희 피살로 절정에 달한 이 해의 사건들은 한국 사회가 새로운 발전 패러다임을 모색해야 할 시점에 도달했음을 알리는 역사적 신호였다.


이후 한국 사회는 민주화와 경제 발전의 조화를 추구하는 새로운 여정을 시작하게 되었으며, 그 출발점에는 YH무역 여성 노동자들의 용기 있는 외침이 자리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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