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금융제도의 시작, 알렉산더 해밀턴의 탄생

알렉산더 해밀턴 01

by 한정엽

알렉산더 해밀턴의 출생은 정확하지 않다.


1755년이라는 것과 1757년이라는 설이 있다. 하지만 그의 탄생 200주년 기념우표가 1957년에 나왔기에, 역사적으로는 1757년으로 기재하고 있다.


해밀턴의 탄생 : 미국 금융제도의 시작을 알리다.


그가 미국 식민지에 처음 도착했을 때 생년월일을 1757년으로 기록하고 1월 11일에 생일을 축하한 기록이 있다. 다른 의견으로는 1755년에 탄생했지만, 학교 생활을 위해 일부러 나이를 어리게 기재했다는 주장도 있다.


이러한 부정확한 증거와 더불어 그가 가진 태생적 열등감은 죽을 때까지 이어진다. 정치적 라이벌들이 공격할 때 사용한 표현들(혼외자, 근본 없는 사람 등등)은 엄청난 정신적 고통을 가져다주었다.


하지만 미국 건국 과정과 그이후의 역할을 보았을 때, '건국의 아버지'라 불리는 사람들보다 더 월등한 능력과 결과를 가져다주었다.


세인트키츠 네비스 섬의 해밀턴 탄생지 <출처 : 위키피디아>


해밀턴의 역할과 경력, 그리고 비난


미국 건국 초기 그가 맡은 역할은 한두 개가 아니었다.


주요 업무 순으로 나열해 보면, 재무부 장관, 정치가, 법학자, 군 사령관, 변호사, 은행가 및 경제학자, 뉴욕 포스트 신문의 창립자였다.


이렇게 많은 역할을 수행해 냈다는 것도 놀랍지만, 아무것도 없었던 신생 국가의 금융 체계를 마련한 것은 그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대단한 것이었다.


평생 정치적 대척점에 서 있던 사람은 토머스 제퍼슨(Thomas Jefferson)과 제임스 매디슨(James Madison Jr.)이었다.


해밀턴은 47살에 권총 대결로 목숨을 잃었지만, 제퍼슨과 매디슨은 그 후로도 정치 생활을 이어가며 해밀턴을 싫어했다. 오랜시간 지속된 비난은 출생에 관한 것이었다.


오죽하면 해밀턴은 친구에게 보내는 편지 내용 중에 ‘가장 굴욕적인 비판은 내 출생과 관련된 내용'이라고 자책하기도 했다.


건국의 아버지 중 유일하게 미국 출신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세인트키츠 네비스 섬의 위치 <출처 : 위키피디아>


해밀턴의 출생 배경은 불투명했다.


이 뜻은 정확하게 언제 태어났는지 정확한 기록이 없는 것을 의미했고, 진짜 아버지가 누구인지도 논쟁의 대상이 되었다(친부인 제임스 해밀턴이 아닌, 고아인 해밀턴을 잠시 돌봐주었던 상인 토마스 스티븐스 였다는 의견도 있었다).


다만 서인도 제도의 작은 섬인 세인트키츠 네비스(Saint Kitts and Nevis)에서 출생한 것으로 추측된다.


당시 네비스 섬은 사탕수수 농장이 주를 이루었고 백인 1,000여명과 흑인 노예 8,000여 명이 있었다.


해밀턴은 평생 노예 제도를 싫어하고 이를 폐지하는데 적극적으로 앞장섰다. 때론 극단적인 주장까지 했는데 아마도 어린 시절 이러한 기억(노예 제도의 불합리성)이 잠재의식에 남아 있던 것으로 추정된다.


노예들이 받았던 핍박과 육체적인 학대를 목격했던 충격적인 장면들이 그의 정신세계를 지배했던 것이다.



사탕수수 농장의 노예 모습(1823년) <출처 : 위키피디아>



해밀턴의 어머니 : 레이첼 포시트


해밀턴의 어머니는 프랑스 위그노 후손인 레이첼 포시트(Rachel Faucette, 1729~1768)였다. 레이첼은 상당한 미인으로 알려져 있었으며, 해밀턴은 어머니의 외모를 물려 받은 것으로 추정된다.


레이첼은 나이 16살에 그녀보다 2배나 나이가 많은 요한 라비엔(Johann Michael Lavien, 1717~1771)과 결혼 했다.


남편 라비엔은 덴마크 인으로, 허풍이 심하고 씀씀이가 헤프면서 잔인한 성격을 가진 사람으로 추정된다. 아마도 본인이 가진 빚을 감추고, 레이첼과 그녀의 어머니 재산을 목적으로 결혼을 빙자하여 의도적으로 접근한 것으로 예상된다.


결혼은 레이첼의 최대 실수이자, 고통의 시작이었다. 라비엔 사이에서 아들을 낳고(Peter Lavien, 1746~1781) 기르게 되지만, 남편의 성격을 견디지 못한 그녀는 결국 이 곳을 탈출했다.


인근 다른 섬으로 옮겨 생활하던 그녀는 스코틀랜드 출신의 제임스 해밀턴(James A. Hamilton)을 만나게 되고, 동거를 하게 된다. 사실상 두번째 결혼이었다.


이후 리워드 제도 네비스(Nevis) 섬의 수도인 찰스타운(Charlestown)에서 아들 둘을 낳게 된다.


그중 한 명이 알렉산더 해밀턴이었고, 위로 형이 있었는데 이름은 제임스 주니어 해밀턴(James Hamilton Jr. 1753~1786)이었다.


찰스타운의 모습 <출처 : 위키피디아>


해밀턴의 나이 8살이 되었을 때, 아버지(제임스 해밀턴)는 가족을 버리고 다른 곳으로 이주를 했다(사실 도망이었다).


이 시기에 레이첼의 첫 번째 남편 라비엔은 끝까지 레이첼의 행방을 찾고 있었다. 법적인 이혼을 하기 위해서는 그녀의 위치를 알아야 했기 때문이다.


어머니의 죽음과 해밀턴의 생존법


결국 레이첼을 찾게 되고, 그녀와 해밀턴과의 관계를 알게 되자, 법원에 간통죄로 고소했다.


네덜란드 판사의 명을 받은 레이첼은 2개월을 감옥에서 살아야 했다. 축축하고 어두운, 죄수들만 가득한 그곳에서의 2개월은 그녀에게 죽음 이상의 정신적 고통을 가져다주었다.


감옥에서 나와 홀로 남은 그녀는 아들 둘을 데리고 세인트 크로이(St. Croix)로 이주해서 그곳에서 작은 가게를 열며 생계를 꾸려 나가게 된다.


그러던 중 해밀턴과 함께 황열병(지역 황토병으로 추정)에 걸리게 되고, 고열에 신음하게 되었다. 하지만 결국 회복하지 못하고 죽고 말았다.


옆자리의 해밀턴이 열병에서 깨어나 정신을 차렸을 때, 어머니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녀의 나이 39살이었다.



세인트 크로이 섬 지도 (1754년) <출처 : 위키피디아>


형과 홀로 남은 해밀턴은 어머니의 남은 유산과 재산도 모두 빼앗기게 된다.


라비엔의 아들인 피터가 본인이 정식 아들이라는 소송을 진행, 법원의 명령으로 그녀의 남은 재산과 유산을 모두 가져간 것이다. 냉혹하고 무자비한 성격은 아버지인 라비엔을 닮은 것이다.


해밀턴과 형은 말 대로 아무 재산이 없는, 거지가 됐다.


이 당시 9살이었던 해밀턴이 받은 정신적 상처는 평생동안 남아 있게 된다.(이후 성인이 되어 특정 주제에 대해 논쟁이 붙게 되면, 상대방을 거세게 몰아붙여 감정적 갈등을 가져온 사례가 무수히 많았다)


결국 무일푼이 된 형제는 따로따로 떨어져 살게 된다. 형과 헤어진 해밀턴은 이후 강한 집중력과 함께 끈기 있게 살아가는 법을 배우게 됐다. 홀로 살아남는 생존법을 체험으로 깨우친 것이다.


당시 세인트 크로이 섬의 인구 중 90%는 노예였다.


아울러 사기꾼과 투기꾼, 떠돌이 뱃사람 등 온갖 종류의 사람이 살고 있었다. 그는 다양한 인간상의 모습을 직접 경험하면서, 너무도 어린 나이에 삶의 경험을 일찍 알게 됐다.


노예 매매 모습 <출처 : 위키피디아>


그는 십대 시절에 냉정하면서도 불합리한, 현실적인 면을 볼 수 있는 혜안이 생긴 것이다.


참고로 그는 프랑스어를 능숙하게 구사 했는데, 프랑스계 혈통이었던 어머니의 영향이 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