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 이주와 미국 독립전쟁의 시작

알렉산더 해밀턴 02

by 한정엽

어린 해밀턴은 뉴욕에 기반을 둔 '버크먼과 크루거(Beekman and Cruge)'의 지역 상인 회사에서 일을 시작했다.


홀로 깨우친 경제 개념


처음부터 중요한 업무를 맡기보다는, 잡다한 일을 도맡아 처리했다. 이후 자잘한 업무에서 벗어나 회사의 관리 업무를 담당했고 특유의 총명함과 끈기로 바로 인정을 받았다.


당시 그가 맡았던 업무는 수많은 나라에서 유통되었던 돈의 환전과 수입 상품의 가격 결정, 대금 지급의 조정, 어음 결제 등이었다. 상당히 어려운 상업적 지식을 필요로 했다.


버크먼과 크루거(Beekman and Cruge) 장부 사본 <출처 : 위키피디아>



그는 어려운 업무 내용과 과정, 행정 절차 등을 본인의 힘으로 습득했다.


어린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빠른 속도로 별다른 사건사고 없이 업무를 처리했다. 사장이 자리를 비운 경우에는 본인의 판단하에 직접 의사결정도 했다.


잠시 네비스의 상인인 토마스 스티븐스(Thomas Stevens)의 집에서 살았는데, 형제 중 한 명(에드워드 스티븐스(Edward Stevens, 1754~1834))이 해밀턴과 매우 비슷하게 생겨 둘이 친형제가 아니냐는 오해를 받았다. 둘 다 프랑스어에 능숙했고, 관심사도 비슷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단순 추측일 뿐, 확인된 문서나 증명할 만한 증거는 없었다. 이로 인해 해밀턴의 친아버지가 누구냐에 대한 논쟁이 생기기도 했었다.


참고로 도망간 아버지 제임스 해밀턴은 끝까지 친자 관계를 포기하지 않았다. 가끔씩 “다정한 아버지”라는 표현을 실어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1823년 사탕수수 공장의 모습 <출처 : 위키피디아>


허리케인과 해밀턴의 글, 그리고 유학


어린 해밀턴은 이 섬을 빠져나가 더 큰 세계로 가는 것을 희망했다. 환경이나 생활방식의 모든 것이 너무도 답답했던 것이다.


1772년 강력한 허리케인이 섬을 덮쳐 큰 피해를 입혔다. 그는 지역 신문에 이 내용의 기사를 게재했다.


내용이 명문장이었다. 폭풍우로 인해 손해를 입은 기독교인들의 내용을 담았다.


‘허리케인에 의한 피해는 인간의 욕심과 탐욕에 대한 신의 경고이자 긍정적인 신호이다. 우리가 신에게 보여줄 수 있는 숭고한 책임이자 의무'라는 내용을 비유적으로 표현했다. 지역 지도자들이 감탄을 했다.


세인트키츠 네비스 섬의 동쪽 모습 <출처 : 위키피디아>



나이에 비해 뛰어난 문장력과 글쓰기 능력은 놀라움과 많은 관심을 받았다. 정규 교육 없이도 분석력이 뛰어난 그에게 좋은 교육을 받을 수 있게 해 주자는 의견이 나왔고, 유학 기금을 모았다.


이렇게 해서 미국으로 가게 되었다. 지긋지긋하던 섬을 벗어나게 된 것이다.


그는 1772년 미국 보스턴에 도착하여 바로 뉴욕으로 이동했다.


윌리엄 리빙스턴 초상 <출처 : 위키피디아>



킹스칼리지(컬럼비아 대학교) 입학


해밀턴은 대학 입학을 위해 뉴저지의 엘리자베스 타운에 있는 프랜시스 바버(Francis Barber)가 운영하는 엘리자베스 타운 아카데미(Elizabethtown Academy)에서 부족한 교육을 받았다.


당시 지식과 혁명을 주도하는 윌리엄 리빙스턴 (William Livingston, 1723~1790)의 영향을 받아 그의 집에서 기숙하며 뉴저지칼리지(현 프린스턴 대학교) 입학을 준비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입학 허가를 받지 못했다.


결국 1773년 가을 뉴욕의 킹스칼리지(현 컬럼비아 대학교)에 입학했다. 당시 나이 16살이었다.


이 곳에서 대학생 룸메이트이자 평생 친구인 로버트 트로프(Robert Troup, 1757~1832)를 만났다.


로버트 트로프 <출처 : 위키피디아>


대학 1학년 때 그 유명한 보스턴 차 사건이 발생했다. 아울러 1774년에는 1차 대륙회의가 열렸다.


첫 팸플릿과 독립전쟁의 시작


이 해(1774년)에 그의 첫 팸플릿이 나왔다.


40쪽 분량으로 제목은 '의회의 조치에 대한 완전한 입증(A Full Vindication of the Measures of Congress)'이었다. 본인의 이름이 아닌, '미국의 친구'라는 필명을 사용했다. 내용은 미국의 독립을 지지하는 것이었다.


'미국의 독립은 천부인권 사상의 준수는 물론 장기적으로 식민지의 경제적 이익이 커진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날카로운 논리적 정교함이 앞으로 시작될 그의 수많은 글의 시작을 알렸다.


컬럼비아 대학교의 해밀턴 동상 <출처 : 위키피디아>


두 달 뒤에 또 하나의 팸플릿을 발표했다.


'농부를 반박한다(The Farmer Refuted)‘라는 제목으로 대륙회의를 공격한 글에 대한 반박 내용이었다. 여기서도 순차적인 논리를 중요시 한 점이 특징이었다.


1775년 독립전쟁이 시작되었을 때 그의 나이 18살이었다. 전쟁 발발 후, 민병대에서 초기 역할을 맡게 됐다. 이후 1776년 뉴욕 주 60대 포병대를 창설하여 19살에 이 부대의 장교로 독립전쟁에 임했다.


실질적인 부대 사령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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