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싱턴 장군의 부관과 엘리자베스와의 결혼

알렉산더 해밀턴 03

by 한정엽

해밀턴은 독립전쟁 기간인 1777년 1월 조지 워싱턴의 부관으로 임명됐다.


조지 워싱턴 장군의 부관


독립전쟁 기간 워싱턴을 거쳐 간 부관의 수는 약 32명이었다. 그중에서 해밀턴은 단연 독보적이었다.


해밀턴과 권총 대결을 벌인 애런 버도 워싱턴의 부관이었으나, 업무 미숙과 판단력 부족으로 워싱턴에 의해 한 달 만에 쫓겨났다.


조지 워싱턴 총사령관(1776년) <출처 : 위키피디아>


해밀턴은 4년이라는 시간을 넘게 부관을 역임했으며, 사실상 참모장 역할도 수행했다. 명문가 출신이 아닌 사람 중에 가장 뛰어난 역할을 수행한 것이다.


전시 상태의 긴장감과 장기간에 걸친 전쟁은 장군과 부관 사이를 가족과도 같을 만큼 가깝게 만들었다.


해밀턴은 워싱턴을 아버지 같은 마음으로 모셨다. 직계 자손이 없던 워싱턴도 해밀턴을 친아들과 같은 심정으로 대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대륙군을 지휘하는 워싱턴 총사령관 <출처 : 위키피디아>


그러나 두 사람 모두 자신의 고집과 집념, 신념이 강했다.


정확하고 신속한 업무 수행


워싱턴은 위엄 있고 절도 있는 행동을 중시했다. 그렇기에 아무리 가까운 사이라도 긴장감은 사라지지 않았다. 해밀턴은 워싱턴의 엄격함에 맞춰 부관의 업무를 완벽하게 수행했다.


당시 총사령관의 집무실에는 수많은 편지와 연락병이 오고 갔다.


보고 서류와 행정 서류, 작전 지시 등 중요한 업무를 신속하고 명확하게 처리해야 했고, 수많은 작전 현황을 기억하고 정리해서 보고해야 했다.


작전 수행에 필요한 전략 제시에도 경험이 풍부한 워싱턴을 설득시킬 만큼 치밀하고 꼼꼼했다.


워싱턴 장군 부관 시절의 사무실 모습 <출처 : 위키피디아>


야전 전투를 꿈꾸는 해밀턴


독립전쟁 당시 대륙 군은 전투장비도 부족했지만, 언제나 보급품과 자금 부족에 시달렸다. 심지어 제때 월급을 주지 못해 몇 달간 밀리기도 했고, 탈영하는 병사들도 많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영국군과의 전면전은 패전의 지름길이었다. 병사 개개인의 전투 능력과 장비는 말할 것도 없었다. 전투 초기에는 게릴라전에 의지하며 싸워 나갔다.


하지만 악조건 에서도 독립을 위한 희망은 잃지 않았고, 끝내 원하는 바를 이루었다.


해밀턴은 야전에서의 싸움을 하고 싶어 했다. 전투에서의 승리를 꿈꾸었다.


하지만 워싱턴은 허락하지 않았고, 언제나 곁에 두고 싶어 했다. 그의 능숙한 불어로 연합이었던 프랑스군과의 연락도 원활했기 때문이다.



프랑스 라파예트 후작 <출처 : 위키피디아>


해밀턴은 프랑스 출신 드 라파예트(Marquis de La Fayette, 1757~1834, 미국 독립전쟁 시 대륙군의 주요 장군) 후작과는 절친이었다. 프랑스 군과의 핵심 정보 교환을 담당했다.


개인적으로도 후작과 서신 교환을 통해 자신의 생각과 이상을 공유하기도 했다.


깔끔한 복장과 강한 집중력


해밀턴의 복장은 언제나 단정했다. 깔끔한 복장에, 어린 인상을 보여줬다. 푸른 눈동자에 금발의 외모를 가졌고, 나이보다 어리게 보이는 것이 특징이었다.


독립전쟁은 그에게 있어 10대 후반부터 20대 중반까지 모든 것을 쏟아부은 시기였다.


전장에서의 집중력은 군 복무 중 4년 동안 한 번도 휴가를 가지 않은 사실로 증명할 수 있었다.


포병 제복을 입은 해밀턴 <출처 : 위키피디아>


그의 소망은 전투 현장에서의 무공을 세우고 이름을 드높이는 것이었다.


하지만 워싱턴은 이러한 해밀턴의 요청을 번번이 거부했고, 반복되는 과정 속에서 서로 간의 감정적 불만이 조금씩 쌓이기도 했다.


야전 전투에서의 무공


1781년 가을 24살이 되던 해, 그의 계급은 중령이 되어 있었다.


이 시기에 드디어 야전군으로 갔다. 워싱턴과 사소한 다툼으로 부관을 그만두고 전투 일선에 나가게 된 것이다.


요크타운 공성전 모습 <출처 : 위키피디아>


요크타운 전투의 연장선상인 작전에서 해밀턴과 그의 대대는 용감하게 싸웠다. 당시 그가 지휘를 맡은 부대는 경보병 3개 대대였다.


작전 계획대로 야간 전투 시, 총검을 착용한 백병전을 실행했다. 치열한 전투였다. 옆 동료가 영국군의 총검에 쓰러졌다. 그는 이에 굴하지 않았다. 결국 주목적이었던 영국군의 요새를 점령했다.


군 경력 중 정점을 찍은 순간이었다.


해밀턴이 참가한 전투 장면 묘사 <출처 : 위키피디아>



엘리자베스 스카일러와의 결혼


해밀턴은 1780년 12월 엘리자베스 스카일러(Elizabeth Schuyler Hamilton, 1757~1854)와 뉴욕 올버니(City of Albany, 뉴욕 주의 주도)의 스카일러 맨션(Schuyler Mansion)에서 결혼했다.


그녀는 명문가 집안으로 필립 스카일러 장군(Philip John Schuyler, 1733~1804)과 캐서린 반 렌 셀러(Catherine Van Rensselaer, 1734~1803)의 둘째 딸이었다.


그는 결혼을 통해 가난에서 벗어났다. 당시 스카일러 가문은 명문가였다.


해밀턴도 처음에 이 결혼이 성사되리라 생각하지 못했지만, 그녀의 아버지는 워싱턴과 절친이었고, 오랜 시간 해밀턴을 지켜본 워싱턴은 해밀턴을 강력 추천했다.


그렇다 해도 뉴욕의 신분상 위계는 뚜렷하게 구분되어 있었다.



엘리자베스 스카일러 <출처 : 위키피디아>


하지만 네덜란드 출신의 명문가인 스카일러는 가문보다는 개인의 능력과 실력을 먼저 보았다. 해밀턴을 받아들였다.


해밀턴은 그녀 와와 결혼 생활 중에 총 8명의 자녀를 가졌다(해밀턴은 그녀를 부를 때, 엘리자(Eliza) 혹은 벳시(Betsey)라는 애칭을 사용했다)


그중 장남인 필립은 나중에 아버지의 명예를 지키고자 권총 대결로 사망했다(1801년). 당시 해밀턴의 충격은 엄청났다.


장남인 필립 해밀턴 < 출처 : 위키피디아>


이후 1년 뒤에 막내가 탄생했다. 부부는 결투에서 사망한 큰 아들의 이름을 따 리틀 필립(Little Philip, 1802~1884)이라고 지었다.


군복을 벗고 변호사로


해밀턴은 1782년 군복을 벗고 엘리자베스의 고향인 올버니로 돌아와 홀로 공부를 시작했다.


당시 변호사를 취득하기 위해서는 약 3년간의 도제 생활과 공부를 병행하는 게 일반적 이었다. 하지만 몇 달 간의 개인 공부와 노력 끝에 1782년 7월, 변호사 시험을 통과했다.


해밀턴의 모습(맨 좌측) <출처 : 위키피디아>


그 해10월에 뉴욕 주 대법원에 소송을 제기할 수 있는 허가를 받았다.


올버니에서 뉴욕으로 이사와 변호사로 활동하기 시작한 나이는 26살이었다. 그는 5년 동안 변호사 생활을 하게 되고, 뉴욕 및 필라델피아의 연합의회 일에도 적극 참여하게 된다.


본격적인 정치 활동을 시작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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