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헌법 제정을 위한 아나폴리스 회의
알렉산더 해밀턴 04
해밀턴은 변호사로 활동하면서 필라델피아와 뉴욕 의회 업무에 참여하였다.
주 정부의 욕심과 연방 규약의 유명무실
1783년에 뉴욕을 대표하는 5인 대표단의 한 명으로 위치가 격상됐다. 바쁜 와중에도 워싱턴과의 교류를 위한 편지 연락은 계속 이어졌다.
그는 주 정부 보다는 연방정부의 큰 모습을 그리고 싶어 했다. 이런 신념은 어린 시절의 경험 때문이었다.
네비스 섬에서 개인의 욕심을 위해 협력하고 단결하지 못했던 수많은 사례를 보고 자란 것이다. 사소한 이익을 위해 전체의 이익을 얻지 못하는 것에 대해 늘 아쉬워했었다.
주 의회는 대륙회의의 간섭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주 정부의 재정을 꾸려나가고 있었다. 1781년 대륙회의에서 제정한 연합 규약의 명분은 사실상 유명무실 해졌다.
2차 대륙회의 <출처 : 위키피디아>
해밀턴의 좌절과 무역 수지 적자
때문에 독립전쟁 참가 군인에게 지급할 자금이나 전쟁 후 시설 복구를 위한 재건비용을 마련할 수 없었다.
급박한 전쟁 중에도 병사 급여를 지불할 돈이 없어, 대륙군 사령부가 난감했던 상황이 재현된 것이다.
사실상 외국의 지원(프랑스 왕의 보조금), 국채의 발행, 대륙회의 지폐(콘티넨털)의 공급이 없었다면, 전쟁의 결과는 달라졌을 수도 있었다.
해밀턴은 독립 이후에도 대륙회의의 이념을 벗어난 탈중앙화 노력, 즉 자발적인 재정 지원을 해 주지 않는 주 정부에 대해 크게 실망하고 좌절했다. 독립전쟁의 명분이 나타나지 않은 것이다.
국회의사당의 해밀턴 동상 <출처 : 위키피디아>
중요한 것은 독립 이후에도 경제적 상황은 개선되지 않고 있었던 점이다.
영국에 대한 수출 의존도는 그대로였고, 수입의 규모는 더 늘어났다. 전체 수입국가 중 90%가 영국산이었다. 수출 지역은 상당히 제한적일 수밖에 없었다. 영국령 지역의 수출이 크게 감소했기 때문이다.
이로 인한 무역수지 불균형은 경제적 압박을 가져왔다.
경제적 혼란과 연뱡 규약의 맹점
무역의 불균형은 금과 은의 유출을 발생시켰다. 결국 부족한 재정을 메꾸기 위해 주 정부는 지폐를 남발해서 발행했고, 경제적 혼란은 더 가중되었다.
당시 스페인 은화 1달러(1페소)를 구하기 위해서는 대륙 화폐 100달러를 지급해야 할 정도로 인플레이션이 심각했다.
콘티넨털 지폐 <출처 : 위키피디아>
1780년대의 경제적 침제는 치명적일 만큼 암담하고 어두웠다.
독립전쟁 당시 사용된 전쟁 비용(국채 발행과 외국 차입금)은 1790~1810년까지 약 20년간의 연방정부 예산 모두를 합친 것보다 더 많았다.
결국 예산의 대부분이 전쟁 시 사용된 차입금과 이자를 갚는데 사용되었다.
독립전쟁의 재정에 많은 역할을 수행한 로버트 모리스(Robert Morris, 1734~ 1806년)는 1781년 조지 워싱턴에게 보낸 편지의 내용에서, ‘지금의 재정 문제는 헤라클레스나 해결할 수 있는 어려운 과제이다. 재정 상태가 완벽할 정도로 엉망진창이기 때문이다’라는 표현을 썼을 정도였다.
1700~1850년 경세 정장률 <출처 : 위키피디아>
자체적인 재정문제와 더불어 중요하게 부각된 것은 외국과의 외교 관계 해결이었다.
이러한 복잡하고 다양한 문제들이 쌓인 상황에서, 주 정부가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현실에 해밀턴이 실망하지 않는 다면, 오히려 이상할 정도였다.
연합 규약의 가장 맹점은 만장일치제였다. 단 한 개의 주라도 반대하면, 제도의 실행과 집행이 불가능한 것이었다.
특히 규모가 영세한 주는 자신의 이익을 위해 연합 규약에서 신설하고자 하는 수입 과세권을 철저히 반대했다.
연합 규약 <출처 : 위키피디아>
모든 것은 원점에서 시작해야 했고, 주 의회 대표자들이 모여 새로운 법률 제정을 통해 강력한 연방정부의 조직 체계를 세우는 것이 시급한 과제였다.
해밀턴의 노력과 아나폴리스 회의 주도
당시 정치인들의 생각 속에는 ‘주 정부의 문제는 스스로 알아서 해결하는 것이 최선‘이라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이런 고착화된 의식을 깨뜨리는 것이 중요했다.
특히 국가 경제정책의 근간이 되는 화폐제도, 세금, 예산집행의 기준을 마련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이 문제를 해결하게 위해 해밀턴이 나섰다.
그는 1782년 ~ 83 년까지 연방의회, 1786년에는 아나폴리스 회의에 참가했다. 아울러 1787년에 헌법 제정 회의에 참여했고, 1788년에 뉴욕의 헌법 비준에 대표단의 일원으로 참가했다.
의원 시절의 제임스 매디슨 <출처 : 위키피디아>
특히 1786년 9월 열린 아나폴리스 회의(Annapolis Convention, 1786년)는 해밀턴과 제임스 매디슨(James Madison, 1751~1836, 제4대 대통령)이 추진한 회의로, 메릴랜드 아나폴리스에서 열렸다.
이 회의의 공식적인 명칭은 '연방 정부의 단점을 치료하기 위한 대의원 모임(Meeting of Commissioners to Remedy Defects of the Federal Government)'이었다.
여기서 기존 과세 제도의 부족한 점, 연합 규약의 근본적인 개선점 등에 대해 논의하였다.
메릴랜드 주 아나폴리스 <출처 : 위키피디아>
결과적으로 5개 주(뉴저지, 뉴욕, 펜실베이니아, 델라웨어, 버지니아) 12명의 대표가 참석하였고, 다음 해인 1787년 펜실베이니아 필라델피아에서 모든 주의 대표가 참석하여 제헌회의를 개최하는 것으로 의견을 모았다.
드디어 연방정부의 구성을 위한 헌법이 만들어지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