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멸의 저술, 연방주의자 논집

알렉산더 해밀턴 05

by 한정엽

아나폴리스 회의 연설문 초고는 해밀턴이 작성했다.


그는 현 상황의 어려움에 대해 설명하고, '연방의 모든 구성원들 지혜를 모아 단합된 힘을 보여주자‘고 촉구했다.


회의 결과로 1년 뒤에 각 주의 대표들이 모여 제헌회의 소집(장소는 필라델피아)을 열기로 했다.


셰이즈의 반란과 영향


1786년 ‘셰이즈의 반란(Shays' Rebellion)’ 사건이 발생했다.


이것은 주 정부의 부채 압박에 따른 과도한 세금 징수가 불러온 사건이었다.


독립전쟁 군인이었던 다니엘 셰이즈(Daniel Shays, 1747~1825)는 서부 매사추세츠에서 농민 시위를 조직하여 농장 압류와 징역에 이르는 과도한 세금 정책에 반발하였다.


셰이즈의 반란 - 세금 징수원과 다투는 모습 <출처 : 위키피디아>


이들은 스프링필드에 있는 연방 무기고를 탈취하려고 시도 하였으나, 벤저민 링컨(Benjamin Lincoln, 1733~1810) 장군이 이끄는 민병대에 의해 격퇴 당한다.


반란은 진압되고, 붙잡힌 이들은 반역죄로 사형을 선고받으나, 얼마 후 사면되었다.


셰이즈의 반란은 연합 규약의 근본적인 문제점이 폭발한 사건이었고, 연방정부 헌법을 조속히 마련해야 한다는 필요성을 가져왔다.


필라델피아 제헌 회의


헌법을 만들기 위한 제헌회의는 1787년 5월 필라델피아에서 시작되어 4개월 동안 비공개로 진행되었다. 대표단의 전체 인원은 55명이었고 해밀턴도 참석했다. 그의 나이 30살 이었다.


제헌회의(Constitutional Convention) 논의 과정에서 2가지 안이 제시되었다.


연방정부의 권한을 축소하고 주 정부의 권한을 강화한 ‘뉴저지 안’과 반대로 강력한 연방정부를 지향하는 ‘버지니아 안’ 이었다. 결과적으로 ‘버지니아 안’ 에 가까운 내용으로 마무리 되었다.


미국 헌법의 서명 <출처 : 위키피디아>


하지만 참석자간의 이견과 정치적 다툼은 지속되어 중간에 되돌아 가버린 주 대표자도 있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연방정부 보다, 현실적인 개별 주 정부에 대한 믿음이 강했던 것이다.


회의에 참석한 55명 중 총 39명이 작성된 문서에 최종 서명을 했다.


서명을 통해 모든 것이 끝난 것은 아니었다. 각 주 정부의 비준을 받아야 하는 엄청난 과제가 남아 있었다. 사실상 더 어려운 문제였고 쉽지 않은 과제였다.


여기서 해밀턴의 업적 중 법률가로서 작성한 ‘연방주의자 논집(The Federalist Papers)‘가 탄생했다.



연방주의자 논집 <출처 : 위미피디아>



불멸의 저술, '연방주의자 논집'의 탄생


불멸의 저작물은 헌법의 비준을 지지하는 글로서, 총 85편이 작성되었다. 이 글을 통해 헌법을 만든 사람들의 생각과 이념, 사상적 철학 등을 살펴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85편 중 해밀턴은 51편의 글을 작성했다. 약 60퍼센트의 비율로 압도적인 영향력을 발휘한 것이다.

1787년 10월부터 1788년 8월까지 '인디펜던트 저널'을 비롯한 뉴욕 시 신문에 연속으로 게재되었고 작성자는 ‘퍼블리우스(Publius)’라는 가명을 사용했다.


연방주의자 논고 안내 <출처 : 위키피디아>


매디슨은 총 22편, 존 제이는 5편을 썼다.


'연방주의자 논집'은 지금까지도 미국 행정 및 정치 이론에 많은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


이러한 각고의 노력 끝에 헌법은 13개 중 9개 주의 비준이 완료되고 1789년에 발효되었다. 효력은 서명한 9개 주에만 적용되었다.


1789년 대통령 선거 결과 <출처 : 위키피디아>


워싱턴 대통령과 초대 재무부 장관


이제 연방정부를 구성 할 수 있는 법적인 요건들이 다 갖춰졌다. 1789년 대통령 선거에서 초대 대통령으로 조지 워싱턴이 만장일치로 추대되었다.


선거인단 투표와 일반 투표 모두로부터 100%의 지지를 받은 유일한 사례로 역사에 남게 됐다.


이후 워싱턴은 정부 구성원을 꾸리게 되고, 첫 재무장관을 로버트 모리스에게 제안했다. 하지만 그는 독립전쟁 당시 너무도 많은 정신적, 경제적 어려움을 겪었고, 자신의 사업을 위해 정중히 사양했다.


그리고 해밀턴을 추천했다. 당시 해밀턴의 나이 32세 였다.



조지 워싱턴 대통령 <출처 : 위키피디아>


워싱턴 대통령은 자신의 부관을 4년간 역임한 해밀턴을 초대 재무부 장관으로 임명했다. 산전수전 다 겪은 해밀턴은 본격적으로 자신의 능력과 역량을 발휘할 기회를 얻은 것이다.


초창기 미국 경제로서는 행운이었다.


역사적으로 해밀턴의 재무부 장관 시절부터 시작된 수많은 보고서와 정책은, 경제적 혼란에 처한 미국 경제를 구해낸 중요한 요소로 판명났다.


해밀턴의 초상화 (1792년) <출처 : 위키피디아>


그로 인해 탄생한 경제 정책은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아울러 미국이 초강대국으로 올라 설 수 있었던 중요한 밑바탕이 되었다.


해밀턴의 역할은 이제부터가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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