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무부 장관과 공공 신용에 관한 첫번째 보고서

알렉산더 해밀턴 06

by 한정엽

해밀턴은 1789년 9월에 재무부 장관으로 지명을 받고, 약 5년 뒤인 1795년 1월에 그 자리를 떠났다.


공공 신용에 관한 첫번째 보고서


재직 기간 동안 재무부 외 연방정부의 복잡하고 어려운 업무도 수행했다. 일부 역사가는 '그의 역할이 총리급에 해당됐다'라고 표현하였다.


워싱턴 대통령은 여러 가지 국정 사항에 대해 해밀턴에게 조언과 자문을 구했고, 그는 이에 보답했다.



공공 신용에 관한 첫번째 보고서 <출처 : 위키피디아>



1789년 9월, 하원은 막 취임한 해밀턴에게 연방정부의 신용을 개선하기 위한 보고서 제출을 요청했다.


다음 해 1월에 ‘공공 신용에 관한 첫번째 보고서(Report on Public Credit)’를 제출했다.


(‘공공 신용에 관한 첫번째 보고서" 내용은 기 작성된 '11화 알렉산더 해밀턴의 업적' 참고 요청 드립니다)




그는 이 보고서를 통해 초창기 미국 경제의 장기적인 불안 요소를 제거하려 했다.



연방정부 부채 해결을 위한 노력


1789년은 독립이 이루어진 해로부터 6년의 시간이 지나 있었지만, 독립전쟁 시에 발생된 부채에 대해 그 누구도 책임감을 갖고 있지 않았다. 당연히 부채를 상환할 방법에 대한 고민과 대안도 마련되어 있지 않았다.


이런 어려운 경제여건 속에서 외부 국가(영국, 프랑스, 스페인)의 보이지 않는 위협은 계속 진행되고 있었다.


지리적으로 프랑스는 루이지애나 지역을, 스페인은 플로리다와 전략적 요충지인 뉴올리언스의 항구를 지배하고 있었다.


특히 영국은 아메리카 내 인디언과의 동맹관계를 맺어, 새로운 정착민들에게 큰 위협이 되고 있었다.



1800~1810년대 미국 영토 <출처 : 위키피디아>


경제적으로는 연방정부의 세금 수입 대부분이 전쟁 때 빌려온 부채 상환에 사용되고 있었다.


지리적, 경제적 모두 어려운 상황이었다.


해밀턴은 관세법을 도입하여 처음으로 연방정부의 주요 세입 기반을 마련했다. 수입 관세는 이후 소득세가 주요 세원으로 등장하기 전까지, 가장 중요한 연방정부의 수입원이 되었다.


이후 부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했다.


다행히 재부무 인력은 해밀턴의 업무를 지원 가능할 정도로 많았고, 이들을 통해 각종 자료 조사 및 세입 관리, 예산 운용에 필요한 수많은 업무를 진행할 수 있었다.


해양 국경 감시대 창설


1790년 밀수 무역을 방지하기 위해 ‘미국 해양 국경 감시대(United States Revenue Cutter Service, 이후 1915년 미국 해안 경비대(National Coast Guard)로 통합 운영됨)’를 창설했다.



해양 국경 감시대 <출처 : 위티피디아>



이 국경 감시대는 밀수입을 적발하는 것은 물론, 미국 상선의 원활한 무역 활동이 이루질 수 있게끔 지원하였다.


사실상 정상적인 무역거래를 통한 관세 수입이 목적이었다.


참고로 해군 경찰의 역할을 수행한 해양국경감시대는 유사전쟁(준 전쟁, 1798~1801년)과 1812년 미국-영국 전쟁 시에도 큰 역할을 했다.


이 시기에 가장 큰 사건은 위스키 제조에 대한 세금 부과였다.


위스키 세금 부과와 서부 지역의 반발


이것은 국내에서 생산되는 제품의 소비세 성격으로, 세금을 부여받은 서부지역의 극심한 반발로 ‘위스키 반란(Whiskey Rebellion, 1791~1794)’으로 커지게 됐다.



위스키 반란 - 세금징수원 모욕 <출처 : 위키피디아>



위스키 세는 연방정부 수립 후 최초로 시행된 국내 세금이었다. 과세의 기준이 사실상 동부의 대량생산 체제를 갖춘 이들에게 유리한 방식으로 제시되어, 서부 지역 농민들의 반발이 심했다.


더구나 세금이 판매가의 40퍼센트나 될 정도로 부담이 되어, 납세 거부 운동까지 벌어졌다.


조직적인 저항과 세금징수원까지 폭행한 사건이 발생하자 연방정부도 강경하게 나섰다.


결과적으로 압도적인 군사력을 동원, 진압에 성공하나 후유증은 제퍼슨 대통령 시대까지 이어지게 됐다.


위스키 반란 진압 <출처 : 위키피디아>


참고로 제퍼슨 시대에 재무부 장관인 갤러틴(Albert Gallatin, 1761~1849)은 이 사건(위스키 반란)으로 해밀턴과 완전히 대척점에 서게 됐다.


위스키 세는 별다른 성공을 거두지 못한 채 1802년 폐지됐다.


해밀턴의 연방파와 제퍼슨의 공화파 갈등은 더 커지게 됐다.



이전 05화불멸의 저술, 연방주의자 논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