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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정엽 May 03. 2020

알렉산더 해밀턴의 업적

미국 경제 역사 이야기 11

독립전쟁 후 미국의 건국에 이바지한 사람들을 일컬어 ‘미국 건국의 아버지(Founding Fathers of the United States)’라는 명칭을 사용하고 있다. 독립전쟁에 된 대통령을 포함, 독립 선언에 참여한 정치인을 일컫는 표현이었다.


알렉산더 해밀턴의 성장 과정


이 중에 알렉산더 해밀턴(Alexander Hamilton,  1755 or 1757 ~ 1804)이 포함되어 있다. 그는 ‘미국 금융의 아버지’라는 표현을 받고 있다. 그만큼 미국 건국 초기의 금융 제도 수립에 크게 이바지한 사람이다.


해밀턴은 영국령 카리브해의 네비스(Nevis)라는 섬에서 태어났다.


존 애덤스의 회고록에는 ‘가난한 스코틀랜드 행상인의 서자’로 기록되어 있다. 그는 어린 시절 가난한 집안 형편으로 인해 닥치는 대로 일을 해야 했다.


알랙산더 해밀턴의 초상화  <출처 : 위키피디아>


9살이 되던 해 지역 무역업하고 있던 니콜라스 크루거(Nicholas Cruger)의 사환으로 일을 하였다.


특유의 총명함과 끈기로 인정을 받고 있던 차에 크루거의 도움으로 뉴욕으로 가게 되었다. 뉴욕의 킹스칼리지(지금의 컬럼비아 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했다. 독립전쟁이 발발하면서, 조지 워싱턴 장군의 보좌관으로 활약하게 되었다.


그는 독립 전쟁 후 1789년 초대 재무부 장관으로 임명을 받았다. 혼란스러운 정부의 재정 문제를 풀어야 하는 크나큰 숙제를 안게 되었다.


당시 연방정부가 해결해야 하는 문제점은 2가지였다.


첫 번째는 새로운 세금 제도를 만들어 연방정부의 수입원이 될 수 있는 과세 체계를 수립하는 것이었다. 두 번째는 독립전쟁 중에 발생한 다양한 부채를 해결하는 것이었다.


장관 임명 동의안이 의회에서 처리되자마자, 하원은 그에게 1790년 1월까지(석 달의 시간을 제공) 국가의 채무 처리 및 정부의 재정 운용에 관한 계획을 요청했다.


공공 신용에 관한 보고서(Report on Public Credit) - 첫 번째 보고서


1790년 1월, 해밀턴은 파격적인 계획을 담은 보고서를 제출했다.


 그것은 '공공 신용에 관한 보고서(Report on Public Credit)'였다. 이 보고서는 주 정부와 연방정부의 현 재정 상황을 솔직하게 표현하고, 장기적인 자본 관리를 통해 안정적인 정부 운용을 해야 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공공 신용에 관한  보고서  <출처 : 위키피디아>


여기에는 몇 가지 주요 내용을 담고 있었다.


첫 번째는 독립전쟁 기간 중 발행한 국외 부채(차관)에 대해 액면가대로 상환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기존의 부채를 상환하기 위해 새로운 부채(상환 채권)를 만들겠다는 의미다.


두 번째는 전쟁 중에 발생한 국내 부채에 대해 새로운 채권을 발행, 이를 통해 액면가 기준으로 상환하겠다는 것이었다. 이 사항에 대해 격렬한 논쟁이 발생하였다.


세 번째는 주 정부가 안고 있는 부채를 모두 연방정부가 떠안고, 넘겨받은 주 정부의 부채는 연방정부가 상환하겠다는 것이었다. 물론 세 번째 내용도 치열한 논쟁을 일으켰다.


마지막은 새로 발행할 채권의 이자율을 낮춘다는 것이었다. 연방정부의 신용도를 높여 원리금 상환이 정상적으로 이루어진다면 외국 투자자들도 낮아진 이자율에 기꺼이 응할 것이라고 예상한 것이다.


이를 통해 20년간 정부가 줄일 수 있는 부채 금액을 제시하였다(당시 재부무 자금 대부분은 부채의 원금은 고사하고 발행된 채권 이자를 갚는 것에도 허덕이는 상황이었다)



미국 재무부 상징  <출처 : 위키피디아>


내용이 발표되자 즉각 엄청난 반발을 불러왔다.


액면가 대비 엄청나게 할인되어 유통되고 있는 정부 채권을 원금 대로 상환한다는 것은, 헐값에 채권을 사들인 투기꾼들에게 막대한 이익을 가져다줄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아울러 주 정부가 안고 있는 부채를 연방정부가 가져가는 것은 더더욱 반대가 심했다.


남부의 주는 부채를 대부분 갚아 나가고 있었고, 북부의 주만 많은 부채를 안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렇기에 북부를 위한 모럴해저드를 보여주는 전형적인 상황이라는 주장을 펼친 것이다.


그러나 해밀턴은 이에 굴하지 않고 자신의 생각을 주장했다.


'독립전쟁 시 발행된 채권은 원리금 상환이 불확실했기 때문에, 투자금을 돌려받지 못할 수 있다는 불안감이 늘 존재했다. 그렇기에 액면가 대비 낮은 금액으로 할인되어 거래되는 것이다. 연방정부가 높은 신용을 바탕으로 투자금을 보존해 준다는 인식을 심어 주면, 다시는 문제가 발생되지 않을 것이다'라는 의견이었다.


연방정부가 어려운 시기에 발행한 채권을 모두 상환해 준다는 믿음을 보여주면, 정부에 대한 신용이 회복될 것이라는 뜻이었다. 그렇게 되면 기존 채권보다 낮은 금리로 발행된 정부 채권으로 교환이 가능해지며, 장기적으로 이자 부담이 크게 내려갈 것이라는 의미였다.


아울러 주 정부의 부채를 모두 가져가는 것은, 연방정부와 주정부가 하나로 연결되어 강력한 연방이라는 일관된 목적하에 '하나의 국가'라는 의식을 갖게 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의회 통과는 쉽지 않았고 한동안 치열한 논쟁 속에 어수선한 날들이 계속되었다.


미국 의회 의사당  <출처 : 위키피디아>


놀라운 사건이 발생했다.


해밀턴의 주장에 반대가 심했던 제임스 매디슨(James Madison, 미국 4대 대통령)과 토마스 제퍼슨(Thomas Jefferson, 미국 3대 대통령)이 의회 통과에 협조하였다.


해밀턴의 안건은 1790년 7월 의회에 승인을 받게 되었고 8월에 최종 의결이 되었다.


이는 새로운 수도를 포토맥 강변 지역 워싱턴 DC에 건설하기로 합의하면서 생겨난 극적인 결과였다. 10년간 필라델피아가 임시 수도로 정해지고, 이후 미국의 수도는 새로 건설된 워싱턴 DC로 정해지게 되었다.


정치적 타협 속에 중요한 금융 제도가 수립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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