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04년 알렉산더 해밀턴의 죽음
알렉산더 해밀턴 10
1804년 7월, 해밀턴이 세상을 떠났다.
알렉산더 해밀턴의 죽음
애런 버(Aaron Burr, Jr, 1756~1836)와의 결투에서 치명상을 당한 뒤, 이틀 뒤에 세상을 달리 한 것이다.
그의 죽음은 뉴욕시를 슬픔에 빠지게 했고, 성대한 장례식에 많은 이들이 참석했다. 신문 기사에는 생존에 그의 역할(독립전쟁, 재무부 장관 시절의 놀라운 업적)에 대한 기사가 쏟아졌다.
해밀턴의 묘지 <출처 : 위키피디아>
장례식은 뉴욕 트리니티 교회에서 진행됐다.
비문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부패를 모르는 청렴한 애국자, 용맹함을 인정받은 군인, 원숙한 지혜를 가진 정치인, 1804년 7월 12일, 47세로 사망”
해밀턴은 죽기 4년 전부터 바쁜 삶을 살고 있었다. 레이놀즈 스캔들과 1800년도 대통령 선거 이후 정치계의 영향력이 줄어든 그는 변호사로 활발하게 활동했다.
뉴욕 이브닝포스트 창간과 장남의 죽음
1801년에는 ‘뉴욕 이브닝포스트(New York Evening Post)를 창간했다. 이 신문은 나중에 ’ 뉴욕 포스터(New York Post) ‘로 이름이 바뀌었고, 1976년에 루퍼트 머독(Rupert Murdoch)에 3천5백만 달러에 매각됐다.
뉴욕 포스트 로고 <출처 : 위키피디아>
이 해에 가장 큰 슬픔이 발생했다.
외할아버지인 필립 존 스카일러(Philip John Schuyler, 1733~1804) 장군의 이름을 딴 장남 필립 해밀턴(Philip Hamilton, 1782~1801)이 사망한 것이다.
그는 아버지의 명예를 지키고자 해밀턴을 모욕한 조지 에커(George Eacker, 1774~1804)에게 결투를 신청, 치명적인 상처를 입고 죽은 것이다.
뉴욕 트리니티 교회 <출처 : 위키피디아>
아들의 죽음은 해밀턴에게 큰 충격과 죄책감을 가져다주었다.
평소에 결투를 진행하게 되면, 허공에 쏘거나 상대방에게 총을 쏘지 말라고 가르쳤기 때문이다.
해밀턴과 부인인 엘리자베스의 좌절감은 둘째 딸인 안젤리카(Angelica Hamilton, 1784~1857)가 정신병에 걸린 것에 더 힘든 삶을 이어갔다. 안젤리카는 이 날의 충격으로 평생 17살의 기억 속에 갇힌 정신병으로 남은 삶을 살게 되었다.
해밀턴 그레인지와 가족을 위한 삶
이 다음 해인 1802년에 해밀턴은 최초로 자신과 가족의 집을 마련했다.
해밀턴 그레인지 모습 <출처 : 위키피디아>
해밀턴 그레인지(Hamilton Grange)라는 집의 건축이 완료된 것이다.
이 집은 해밀턴의 사후, 경매로 넘어간 것을 친구들의 도움으로 되찾아 가족에게 돌려줬다. 1833년 엘리자베스가 뉴욕 이주를 위해 매각할 때까지 가족 소유였다.
해밀턴은 장남 필립의 죽음과 그레인지의 건축 이후 오직 가족만을 위해 살았다.
당시 그의 초상화를 살펴보면, 젊은 시절의 자신만만함과 패기가 사라지고, 슬픔이 깃든 표정이었다.
수없이 많은 역경과 고난을 거친, 삶에 지친 사람의 표정인 것이다. 변호사 일로 가족의 생계를 위해 살아갔다.
아울러 자신의 시대가 끝나가고 있음을 깨달았다. 주말이면 가족에게 성경 구절을 읽어주는 것으로 소소한 행복을 얻었다.
해밀턴의 초상(1801년) <출처 : 위키피디아>
하지만 세상은 그를 내버려 두지 않았다.
결투 신청과 해밀턴의 신념
1804년 해밀턴은 애런 버와 결투를 진행하게 됐다. 원인은 1800년 대통령 선거와 뉴욕 주지사 선거에 떨어진 애런 버의 명예 회복 요구였다.
버는 해밀턴에게 서면을 통한 공개 사과를 요구했지만, 해밀턴은 거절했다. 사실과 다른 내용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해밀턴은 국가 발전과 자신의 신념에 대해 굽히지 않았다.
애런 버 <출처 : 위키피디아>
모욕을 느낀 버는 결투를 신청했고, 해밀턴은 망설임 끝에 받아들였다. 자신의 명예를 위해 아들이 죽었는데, 이를 피하는 것은 필립에 대한 도리가 아니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는 독립전쟁 이후 한 번도 총을 쏴보지 않았고, 연습도 하지 않았다.
반대로 버는 죽도록 사격 연습에 몰두하고 성능이 좋은 총으로 바꾸기도 했다. 친구들을 통해 이 소식을 들은 해밀턴은 아마도 자신의 죽음에 대해 생각했을 것이다.
결투 당일인 1804년 7월 11일, 장소는 아들이 결투를 벌인 장소에서 멀지 않은 곳이었다.
해밀턴은 일부러 허공에 총을 쐈고 버는 정조준을 하여 발사했다. 의술에 출중 했던 해밀턴은 본인이 치명상을 입은 것을 직감했다.
애런 버와의 결투 (왼쪽이 해밀턴) <출처 : 위키피디아>
참관인들에 의해 집으로 이송되었고, 31시간의 극심한 고통 끝에 가족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세상을 떠났다.
너무도 허무한 죽음이었다.
헤밀턴의 사후와 그의 업적
그는 결투 전에 자신의 생각과 미래를 준비한 편지를 남겨 두었다. 사후에 가족들이 빚쟁이들에게 괴롭힘을 당하지 않을까 염려하여 미리 준비를 해 두었다. 그러나 부족했다.
현금 부족과 자산 가치 하락으로 엘리자베스를 비롯해 그의 가족은 남은 생애 동안 평생 돈 걱정을 해야 했다.
연방정부 경제는 반석에 올려놓았지만, 집안 경제는 그렇지 못했다.
재무부 해밀턴의 동상 <출처 : 위키피디아>
하지만 엘리자베스는 결코 좌절하지 않고 남편의 사후 50여 년 동안 많은 업적을 쌓았다. 그녀의 진정한 삶은 이때부터 시작된 것이다.
해밀턴의 죽음으로 한 시대가 끝났다.
그로부터 시작된 연방정부 경제와 금융 정책은 없어지지 않았고, 정적이었던 앨버트 갤러틴(Abraham Alfonse Albert Gallatin, 1761~1849)에 의해 계승되고 이어졌다.
워싱턴 DC의 연방준비제도 건물 <출처 : 위키피디아>
특히 그가 만든 중앙은행 제도(현 연방준비제도, 일명 연준, Fed)는 지금의 금융 강국으로 올라설 수 있게 된 원동력이었다.
금융 자본주의 미국은 그로부터 시작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