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사전쟁과 1800년 대통령 선거
알렉산더 해밀턴 09
1797년 레이놀즈 스캔들로 한창 시끄러울 때, 영국과 프랑스의 관계는 악화되고 있었다.
유사전쟁(Quasi-War)의 발발
1794년에 영국과 체결된 제이 조약(Jay's Treaty) 이후, 불편한 프랑스와의 관계 개선을 위해 애덤스 대통령은 특사단을 파견했다.
하지만 1797~98년 사이에 발생된 ‘XYZ 사건(XYZ Affair, 미국과 프랑스 사이의 외교적 충돌)’으로 오히려 최악으로 치달았다.
결국 프랑스 해군에 의해 미국 상선의 납치가 계속 증가하자 참다못한 미국의 결의로 전쟁은 시작됐다.
유사전쟁(Quasi-War) <출처 : 위키피디아>
이 전쟁은 ‘유사전쟁(Quasi-War, 1798~1800)’, ‘선전포고 없이 진행된 전쟁(Undeclared War with France)’ 또는, ‘준 전쟁, 절반전쟁’(the Half-War) 으로도 불린다.
전쟁이 터지자 해밀턴은 대통령에서 물러난 워싱턴(당시 나이 86살)을 대신하여 육군 총사령관 직을 맡았다. 기간은 1798년 7월부터 1800년 6월까지 였다.
워싱턴 다음으로 높은 직책이었고, 워싱턴 사후(1799년)에는 실질적인 미 육군의 최고 책임자였다.
장군 복장의 해밀턴 <출처 : 위키피디아>
해밀턴은 프랑스 동맹국인 스페인의 북미 식민지를 공격하자는 주장을 했다. 후임 재무부 장관인 올리버 월콧 주니어(Oliver Wolcott Jr, 1769~1833)에게 전시 자금 마련을 요청했다.
이와 더불어 육군을 재건하는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하지만 전쟁은 해상에서 이루어졌고, 확전을 원하지 않은 애덤스 대통령(John Adams)에 의해 1800년 협상이 진행되면서 전쟁은 끝이 났다.
1800년 대통령 선거
1800년도에 대통령 선거가 시행됐다.
해밀턴은 같은 연방파(Federalist Party)인 애덤스 대통령과의 갈등으로 찰스 핑크니(Charles Cotesworth Pinckney, 1746~1825)를 적극 밀었다. 하지만 내부 단결의 실패로 대통령은 공화파의 제퍼슨에게도 돌아갔다.
1800년 대통령 선거 <출처 : 위키피디아>
정권이 연방파에서 공화파로 넘어간 것이다.
연방파는 해밀턴 계열의 강경파와 애덤스의 온건파 간의 갈등이 계속되었고, 해밀턴의 죽음 이후 서서히 힘을 잃어 제임스 먼로 대통령 시기인 1824년에 소멸했다(국민공화당으로 통합됨).
1800년도의 대통령 선거는 지금처럼 러닝메이트 제도가 아니었다. 선거인단은 모두 2표를 행사해, 투표 결과 1위가 대통령, 2위가 부통령을 맡는 구조였다.
때문에 대통령과 부통령이 같은 당이 아닌 결과가 나오기도 했다. 그럴 경우, 부통령은 사실상 아무 역할도 할 수가 없었다.
2대 대통령인 존 애덤스 시절, 부통령은 공화파(민주공화당, Democratic Republican Party)의 토머스 제퍼슨(Thomas Jefferson, 1743~1826)이었다. 부통령인 제퍼슨은 대통령의 정책에 지지가 아닌, 반대의 입장에서 사사건건 대립했다.
이런 불합리한 제도는 1804년에 바뀌게 됐다.
미국 수정 헌법 제12조(Twelfth Amendment to the United States Constitution 또는 Amendment XII)를 통해 대통령 선거제도가 러닝메이트 제도로 수정된 것이다.
연방정부 휘장 <출처 : 위키피디아>
1800년 선거에서 공화파 지지자들은 2개의 표를 1표씩 제퍼슨과 에런 버( Aaron Burr, Jr, 1757~1836, 1800년 공화파의 부통령 후보, 자신의 욕심을 위해 연방파에서 공화파로 당적을 옮겼다)에게 투표했다.
투표수 배분의 착오로 둘 다 똑같은 73표씩 얻게 되었다.
둘 중에 한 명이 대통령으로 선정하는 역할을 하원이 맡게 되었다.
1800년 대통령 선거의 최종 결과
1800년대 하원선거에서는 공화파가 압도적인 대승을 거두었다. 결과는 68 : 38이었다.
하지만 대통령 결과는 이전 하원 의원이 결정해야 하는 웃지 못할 구조였다. 연방파가 공화파의 대통령을 정해야 했다.
이제 물러나야 하는 연방파 하원 의원들은 정적인 제퍼슨을 미워했다. 한때 같은 당적이었던 애런 버에게 투표했다.
애런 버 흉상 <출처 : 위키피디아>
일주일간 진행된 35번의 투표에 어느 한 쪽의 과반수가 나오지 못했다. 결국 36번째 투표에서 기권표와 지지표 쏠림으로 제퍼슨이 최종 당선되었다.
이 상황에서 가장 큰 역할을 한 사람이 해밀턴이었다.
그는 애런 버와 30년간 알고 지냈다. 하지만 욕심 많고 야심가인 그가 대통령이 되면, 국가의 존립이 위험할 수 있다고 생각해 제퍼슨을 적극 밀었다.
제퍼슨의 초상 <출처 : 위키피디아>
해밀턴과 제퍼슨의 관계는 세상이 다 아는 앙숙 중의 앙숙이었다. 해밀턴은 이상주의자 제퍼슨이 탐욕스런 애런 버 보다는 국가 발전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결국 해밀턴의 설득에 넘어간 연방파 의원들은 제퍼슨에게 표를 주거나 기권을 했다.
1801년 3월, 미국의 제3대 대통령으로 제퍼슨이 취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