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93년, 영국과 프랑스의 전쟁이 발발했다. 이 전쟁은 1815년 워털루 전투까지 약 22년간 이어졌다.
워털루 전투 <출처 : 위키피디아>
제이 조약(Jay's Treaty)의 체결
해밀턴은 이 전쟁이 장차 미국의 위험이 될 것이라는 판단 하에, 영국과의 교섭을 서둘러야 한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당시 연방정부의 세입 대부분은 영국 상품의 수입 관세였다. 무역이 중단된다면, 미국 경제의 파멸을 의미했다.
하지만 친프랑스 측인 공화파는 독립전쟁 당시 도와준 프랑스 편에 서야 한다고 주장했다. 연방파(해밀턴)와 공화파(제퍼슨)의 정치적 갈등은 점점 심해졌다.
여론도 이슈를 크게 부각하여 논쟁을 부채질했다. 신문 판매 부수를 늘리는 지름길이었다.
결국 해밀턴은 가명으로 신문 사설을 게재하고 영국과의 관계를 강하게 주장했다. 워싱턴 대통령은 1794년 존 제이(John Jay, 1745~1829)를 특사 신분으로 영국에 보내 제이 조약(Jay's Treaty)을 체결하게 됐다.
존 제이 초상 <출처 : 위키피디아>
조약 체결 이후에도 국론은 둘로 갈라졌다. 다행히도 영국과의 교역은 진행되었다.
1795년 1월 해밀턴은 장관직에서 물러났다. 개인에게는 고난과 역경의 시간이었지만, 미국 경제와 금융으로서는 최고의 선물을 받은 시간이었다.
레이놀즈 스캔들의 폭로
1797년 여름, 레이놀즈 스캔들이 터졌다.
이것은 해밀턴과 마리아 레이놀즈(Maria Reynolds, 1768~1828)간의 성 스캔들이었다. 발생 시점은 1791년 여름이었고, 당시 해밀턴은 34세, 레이놀즈는 23세였다.
그녀는 남편이 자신을 버리고 도망가서, 뉴욕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상담을 하기 위해 다가갔다. 해밀턴은 그녀를 도와줘야 한다는 감정이 너무 지나쳐, 돌이킬 수 없는 잘못을 저지르고 말았다.
레이놀즈 스캔들 풍자 이미지 <출처 : 위키피디아>
둘의 관계는 약 1년 여간 이어졌고, 부인인 엘리자베스는 친정인 올버니에 있었다.
레이놀즈의 외도 사실을 알게 된 남편 제임스 레이놀즈(James Reynolds, 문서 위조로 기소된 사기꾼)는 지속적인 협박으로 해밀턴에게 돈을 요구했다. 추가적으로 재무부의 고급 정보도 보내라고 협박했다.
사실 레이놀즈 남편은 처음부터 모든 사실을 알고 있었다. 나중에는 큰돈을 뜯어내기 위해 부인을 부추 키기도 했다.
협박을 받은 해밀턴은 당장 관계를 정리하고, 자신의 돈을 일부 지급하기도 했다. 하지만 재무부와 관련된 주요 정보는 절대로 넘겨주지 않았다.
1792년 11월, 주위에서 이 사실을 알게 됐고 해명을 요구했다. 곤경에 처한 해밀턴은 잘못을 솔직히 시인하고, 이에 관련된 내용을 동료 정치인에게 설명했다.
이중 한 명이 제임스 먼로 (James Monroe, 1758~1831, 5대 대통령)였다.
제임스 먼로 <출처 : 위키피디아>
먼로는 1797년 스캔들이 본격적으로 터졌을 때, 자신의 결백을 증명해 달라는 해밀턴의 의견을 거절했다. 아울러 핵심 정보를 언론에 제공하여 해밀턴을 파렴치범으로 몰아가는데 앞장섰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 때문에 부인인 엘리자베스는 죽을 때까지 먼로에게 솔직한 내용을 공개하라고 요청했으나, 먼로는 응하지 않았다.
이 스캔들은 1797년에 악명 높은 저널리스트인 제임스 캘린더(James Callender, 1758~1803)가 신문을 통해 터뜨렸다.
그는 연방파를 미워했고, 조롱한 언론인이었다.
부인인 엘리자베스까지 싸잡아 매도했다. 개인적인 치부와 함께 재무부의 고급 정보를 이용, 레이놀즈 부부와 한 탕을 하기 위한 '세 사람의 공모'라고 떠벌렸다.
이런 상황을 견디지 못한 해밀턴은 해명을 위해 그동안 진행됐던 일들을 정리, 팸플릿으로 공개했다.
레이놀즈 팸플릿 <출처 : 위키피디아>
레이놀즈 팸플릿의 발표
일명 ‘레이놀즈 팸플릿(Reynolds Pamphlet)’이었다.
하지만 이는 치명적인 실수로 밝혀졌다. 오히려 부적절한 행동이 주목을 받아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했다.
이 사건은 이후 클린턴 대통령의 '르윈스키 스캔들(Lewinsky scandal)', 제퍼슨 대통령의 '샐리 헤밍스 스캔들(Sally Hemings scandal)'과 더불어 미국 정치계의 유명한 스캔들로 자리 잡게 됐다.
샐리 헤밍스 (상상화) <출처 : 게티 이미지>
엘리자베스는 언론의 집요한 추궁과 악의적인 풍자에도 끝내 침묵을 유지하여, 높은 품격을 보여주었다.
놀라운 인내력이었다.
이 사건은 해밀턴에게 정치적인 사망선고였다.
대통령까지 올라갈 수 있었던 그의 능력과 역량은 한 번의 잘못으로 모든 것이 물거품이 되었다. 그는 죽을 때까지 부인에 대한 죄책감에 괴로워했다.
엘리자베스는 이러한 해밀턴을 용서하고, 다시 받아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