퀴즈 하나 풀어보자. ‘음지에서 일하고 양지를 지향하는’ 게 우리 조직이다. 어디서 많이 들어본 문구일 거다. 벌써 감이 올지도 모르겠다. 살벌한 모 정부 조직 사훈으로 기억한다. 과거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던 시대도 있었다. 얼마 전 본 영화 『미션 임파서블』 에서도 비슷한 대사가 나왔는데 남 일 같지 않았다. “우리는 음지에서 살고 죽는다.” 이쯤이면 어딘지 거의 맞출 수 있다. 아~ 거기. 날카로운 눈매를 숨긴 검은 선글라스에 한 올도 풀리지 않는 완벽한 8대 2 가르마, 날렵하면서도 균형 잡힌 몸매, 보일 듯 말 듯 한 허리춤 권총, 발차기에 최적화된 구두로 무장된 요원들이 있는 그곳...이 유감스럽게도 아니다. 그렇다고 비슷한 구석이 없진 않다. 싱글 정장 같은 멋지게 폼 잡을 수 있는 유니폼은 아니지만, 우리도 일할 때 입는 작업복이 있다. 검은 선글라스 대신 보안경을 착용하고 현란한 손놀림으로 쓰는 총이나 칼은 없어도 전동 드릴, 그라인더 같은 기계 공구를 자유자재로 다룬다. 번들번들한 구두는 못 신어도 작업할 때 신는 안전화도 있다. ‘공돌이’라는 낮잡아 부르는 수식어가 있지만 ‘기사'ㅡ엔지니어가 조금 더 고급스럽긴 하다ㅡ라는 엄연한 타이틀이 진짜 이름이다.
기계실, 전기실, 방재실 같은 거칠고 근육질의 문패가 달린 사무실이 똑같은 유니폼을 입은 우리 기사들의 소속을 구분해 준다. 하는 일은 다르지만, 음지에서 일하고 양지를 지향하는 목적은 같다. 사무실이 지하(음지)에 있다 보니 종일 햇살 한줄기(양지) 보기가 쉽지 않다. 자연스레 해 바라기가 될 수밖에 없다. 점심시간 한 시간은 기사들이 광합성 작용을 할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이다. 옥상 작업이라도 하는 날은 마른하늘에 빨래 널 듯 버짐 핀 얼굴과 눅눅해진 온몸을 햇살에 말린다. 도시 한복판에서 뿜어져 나오는 매연이지만, 지하 3층의 온갖 오염된 잡내에 비하면 피톤치드라 해도 믿을 수 있기에 콧구멍 털이 다 빠지도록 들이마신다.
근무환경에 따라 직원들 성격이 영향을 받는다는 글을 읽은 적이 있다. 햇빛이 부족한 지역의 사람들일수록 대인관계에 어려움이 있고, 우울증 환자도 많다는 조사 보고다. 정신건강을 위해선 자연 면역제인 햇빛에 적당한 노출이 필수라는 거다. 그런 근무지의 특성 탓인지 우리 직원들의 성향도 그리 긍정적이나 밝지 않다.
대체로 작업복 입은 남성들은 신랑감으로서 좋은 점수를 얻지 못한다. 육체노동이라는 이미지가 주는 낮은 직업의식이 여성들의 눈높이에 모자라기 때문이다. 여전히 사무직 노동자들과는 차별된 시선이 있다. 같은 노동직이라도 소위 꿀 빠는 직장이라 부르는 대기업의 킹산직(킹+생산직) 노동자들처럼 높은 연봉과 복지제도라도 잘 보장되어 있으면 이성의 마음을 흔들어 보겠지만 꿈같은 얘기다. 그러다 보니 직원의 반 이상이 총각이고 그중 또 반은 노총각이다. 어린 노총각이 40대이고 50에 이르는 부서도 있다. 그들 대부분이 일찍부터 먹고사니즘을 위해 사회생활을 시작해서인지 연애 같은 건 애초에 잊고 살았을지 모른다. 뭐든 뚝딱거려 고치고 만드는 이들이지만 자신들의 모양을 내는 데에는 서툴렀다. 생활이 안정되면서 미래를 위한 충분조건은 갖췄으나 배우자라는 필요조건이 쉽게 채워지지 않았다. 점점 이들의 결혼관은 무관심에 가까워지고, 사무실에 갇혀 사는 현실에 순응하면서 더욱 음지로 숨어들게 돼버렸다.
“왜 장가 안 가는 거야?” 한번은 노총각의 수장 격인 쉰 살의 정기사에게 물었다.
“안 가는 것이 아니라 연애를 해봐야지 꿈이라도 꾸죠.”
“그러니까 왜 연애를 안 하냐고.”
“이 나이에 무슨 연애를 하겠어요. 우리 같은 직업 가진 남자 좋아할 여자도 없고. 차라리 동남아 처자를 데려오는 게 낫죠.” 자조적인 한탄이었다. 결혼에 대한 환상은 둘째치고 연애의 기회조차 녹록지 않은 현실에 부딪혀 아예 포기해 버린다. 저녁이 있는 삶이라는 워라벨이 그들에게는 또 다른 삶의 결핍으로 이어지고, 술로 채워지는 일상이 다반사가 됐다.
나는 처음부터 작업 노동자로 직장생활을 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경력 대부분은 대기업의 스마트한 사무실에서 종일 컴퓨터와 씨름하는 머리 노동자로 살아왔다. 느지막한 나이로 현장 노동일에 관여한 터라, 처음 대면한 낯선 조직문화에 적응하기가 쉽지 않았다. 이 바닥에 발을 담그고 날것의 노동을 경험하면서 직원들의 목소리를 듣다 보니, 그들에게 시급한 건 노동운동이 아니라 배우자 찾기 운동일 것 같았다. 한두 사람이라면 큐핏의 화살을 날려주거나 기꺼이 중매쟁이라도 자처하겠지만, 집단을 장가보내는 건 모 종교의 교주가 아닌 이상 나도 버겁다. 아직도 남아있는 배우자의 선택적 직업관이나 귀천이라는 낡은 통념이 그들을 영원한 연애 낙오자 속으로 몰아넣고 있는 건 아닌지 우려스럽다. 사회적 약자라는 의미가 소외되거나 관심 밖에 있는 사람을 지칭한다면, 이들 역시 그런 테두리에 갇혀있는 사람들 아닐까.
언젠가 인터넷에 어느 생산직 근로자가 결혼정보회사에 가입할 수 있는지 문의하는 글을 읽다가 달린 댓글을 보고 깜짝 놀랐다. “가능은 하겠지만 등급이 낮아지겠죠.“ 고기 등급 매기듯 회원들에게도 정해진 급수가 있고, 그에 따라 선택받는 상대방의 수준도 달라진다는 얘기다. 학력, 경제력, 직업, 연봉이 등급 기준을 정하는 마블링이 된다. 그렇게 시장에서 유통되는 값어치로 그들의 정체성이 거래된다. 암묵적으로 버젓이 자행되고 있는 차별과 계급 폭력의 현실이다. ”학교에서 직업에 귀천이 없다고 가르치는 것은 직업에 귀천이 있기 때문에 없다고 하는 것이다“라고 한 모 드라마 대사가 생각난다. 자본주의에서의 평등이란 인간이라는 태생적 평등만을 의미하는 것뿐, 지위나 권력은 그것을 허용하지 않는다. 의식 수준이 달라졌다고는 하지만 특정 직업에 대한 인식과 편견은 여전히 노동의 가치관에 앞선다. 어떤 부당한 일을 두고 평등의 원칙에 어긋난다고 하면서도 실제 지배하고 있는 환경이나 인식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 생산직이라는 노동의 방식이 불행한 게 아니라 넘사벽처럼 버티고 있는 사회적 이념이 불행하다는 것, 직업의 가치를 불평등과 차별로 잃고 있는 건 아닌지 곱씹어보게 된다.
배우자감을 등급으로 줄 세워 고르게 하는 장사치들의 잔인한 행태는 현대판 인간 시장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그 시장에 내던져진 채 묵묵히 고치고 때우는 작업이 일상인 우리 기사들이 선택될 확률은 또 얼마나 될지 불 보듯 뻔한 일 아닌가. 꿈꿀 권리조차 꿈꿀 수 없게 만드는 불편한 세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