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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용팔 Nov 11. 2022

서울, 1985년 겨울

미대사관저 오물투척 사건의 전말

요즘처럼 따스한 햇살이 천연스레 거리를 헤집고 반기면 마음도 대책 없이 흔들린다. 주말이라면 한가롭게 즐기겠지만, 평일에는 여유가 없다 보니 점심을 먹은 후 회사 주변을 산책하며 기분을 누그러뜨린다. 서울 한복판이라 먼지나 매연을 후식으로 먹거나 온몸에 묻히고 다닌다해도,  덧댄 가을빛 덕분인지 불쾌하지만은 않다. 가붓한 마음이 앞서다 보면 따라가려는 바쁜 걸음이 방정맞게 보일 듯싶기도 하다. 점심시간 짬을 내서 다니느라 주변 경치에 눈 맞추기보다 늦지 않을까 하는 조바심으로 시계를 보는 일이 잦아진다. 고민하다 생각해 낸 아이디어가 코스를 정하는 것이었다. TV에서도 올레길이니 둘레길이니 하는 길 여행이 유행인지라 나도 아예 내 코스를 만들어 놓고 다니면 편할 것 같았다. 광화문 코스, 종로 코스, 명동 코스, 경복궁 코스 등등. 코스별로 소요 시간과 볼거리를 정해 나름 실크로드를 만들었다. 안내 가이드도, 관람객도 오직 나 한사람이다. 나도 모르게 흥얼거리는 노래로 이 짧은 나들이의 분위기를 북돋곤 하다.


덕수궁 코스는 사색의 공간이면서 역사의 현장이라는 상징성이 사람들을 불러 모은다. 평일 낮에도 인근 회사원들로 붐비는 이른바 노른자 코스다. 외국대사관에 묶인 땅이 풀리면서 끊겼던 길(60년간 영국대사관에 막혀있던 덕수궁 안길)이 이어지다 보니 볼거리가 쏠쏠한 게 식후 나들이로는 제격이다. 꽉 찬 햇볕이지만 나무들의 광합성은 힘을 잃어가는 듯했다. 도심에 걸쳐 앉아있어서 그런지 단풍의 기운도 힘차지 못하다. 겨우 붉은 흉내를 내는가 싶더니 맥없이 떨어져 버렸다. 노래 「광화문연가」에 나오는 가사처럼 덕수궁 돌담길이라는 시대적 정서와 낭만을 안고 살았던 세대라면, 은행잎을 밟으며 만든 추억 하나쯤은 누구나 간직하고 있지 않을까 싶다. 나도 이곳을 지날 때면 으레 37년 전의 노란 억을 밟게 된다. 그렇다고 남들처럼 사랑이 불시착하거나, ‘사랑이 어떻게 변하니?’읊조리며, 잃어버린 사랑을 찾아 방황했던 서정적 장소는 아니다. 하늘이 노랗게 보일 만큼 잊을 수 없는 병영 일기가 남겨진 고난의 시절이었기 때문에.


군대에서 느끼는 겨울 추위는 매한가지다. 전방이라 더 춥고, 후방이이서 덜 추운 게 아니라 군인이기 때문에 추운 것이다. 그해 겨울도 다르지 않았다. 덕수궁 돌담길을 타고 휘감은 고추바람의 날카로움은 군복 속을 파고들며 꽂히는 바늘 같았다. 경비대 소속으로 서울 도심 주요 외국공관에서 보초를 서고 있었던 졸병 때였으니 그 서러움이 물린 추위가 오죽했겠는가. 몇 시간씩 버티고 서 있다 보면 머리부터 발 끝까지 냉동고가 된다. 근무 보고를 하는 입이 서걱서걱 얼어붙어 제대로 말이 나올 리 없다. 어김없이 날아오는 고참의 군화와 이어지는 얼차려. 힘든 군 생활의 연속이었다. 고단한 하루는 구세군교회의 붉은 벽돌 십자가 앞에서 드리는 기도로 마감하곤 했다. 무사히 간 하루와 무사하지 않을 내일을 잘 넘기기 위한.

야간 근무를 서던 날이었다.

추위가 생리작용을 활발히 자극하는 바람에 방광이 복부를 압박해왔다. 어떻게든 버텨보려 애써보지만 거의 터지지 직전이라 더는 무리였다. 근무 교대 시간은 한참 뒤어서 현장에서 처리해야만 할 비상 상황이었다. 군인정신으로 은폐할 수 있는 주변의 지형지물을 살펴본다. 작업(?)하기에는 최적의 시간이었지만, 공간이 최악이었다. 서울 한가운데 아닌가. 그렇다고 근무지를 이탈한다는 건 자살행위였다. 난감했다. 단순한 1차원적 고통이 아니라 100억 년 전의 빅뱅을 재현이라도 하는듯한 신호에 몸을 뒤틀렸다. 앞이 하얘지는 순간, 뭔가 하얀 지물이 눈 안에 들어왔다. 눈(雪)이었다. 몇 칠 전 치운 눈이 다 녹지 않은 채 남아있었다. 생각할 겨를도 없이 혁대를 풀었다. 추위를 막고자 겹겹이 입은 옷이 한시가 급한 진도를 더디게 했다. 경험해봤다면 알겠지만, 너무 마려운 오줌은 제대로 나오지 않는다. 게다가 순찰 중인 소대장이나 고참에게 걸리기라도 할까 봐 마음만 조급해진다. 초조함에 몸을 떨었다. 복부에 있는 힘을 주고 몇 번의 시도 끝에 결과물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다. 고개를 들고 안도의 숨을 내쉬려는 그때, 벽에 붙어있는 독수리 휘장이 선명하게 눈에 박혔다. 아뿔싸! 여기는... 머리에 빛이 튀었다. 잠시 잊고 있던 내 위치가 생각났다. 미합중국 대사관저라는 사실을 새삼 깨달음과 동시에 막혔던 오줌은 폭포수 같은 물줄기를 뿜어냈다. 이젠 끊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지금 무슨 상황인가. 이건... 외국공관에 자행되는 테러다. 그것도 버젓하게 정문 앞에다 대고. 데모대의 기습시위에서나 볼 수 있는 오물투척을 나는 직접 내 몸에서 제조해 뿜어내고 있다. 더구나 내 신분은 그런 유사시를 대비해 근무를 서고 있는 보초병이었다. 민간인이 술김에 저지른 노상 방뇨일지라도 즉시 구속감인데, 나는 국방의 의무를 하는 군인 아닌가. 웃지도, 울지도 못할 상황이었다. 다시 한번 휘장을 힐끗 올려다봤다. 독수리의 매서운 눈매가 내 아랫도리에 꽂힌 것 같았다. 마치 소변 금지구역에 붙어있는 가위 포스터처럼 섬뜩했다. 한꺼번에 몰려오는 당황스러움에 일단 빨리 끝내는 게 상책이다 싶어 온 힘을 다해 나머지를 털어냈다. 서둘러 바지를 추스르고 아무 일 없는 듯 재위치에 섰다. 소대장의 순찰을 무사히 넘기자 완전범죄를 확신하듯 갑자기 맥이 확 풀려버렸다. 근무 교대를 하면서 방금 내질러 논, 인공색소에 녹는 팥빙수의 얼음처럼 노랗게 오그라든 눈을 곁눈질하며 나는 내무반을 향해 힘차게 걸어갔다. 1985년 서울의 겨울, 내가 일으키고 수습한 역사(자칭, 미대사관저 오물투척 사건)의 아이러니는 그렇게 눈과 함께 묻혔다.      


“근까... 짭새들 때문에 우리가 얼마나 개고생했냐?”

“야, 말마. 나는 그 닭장차에 끌려가서 졸라 터지고 나왔다구.”

술자리에서 친구 녀석들은 데모했던 시절을 안주 삼으며 침을 튀겼다.   

“인마, 이게 다 니들 덕분이야. 알아?”

내가 의경 출신이라는 걸 아는 녀석들은 골려 먹을 요량으로 화살을 내게로 돌렸다.

“데모를 막을게 아니라, 데모 했어야지. 안 그러냐?”  

데모한 걸 무슨 훈장 단 것처럼 떠들어대는 녀석들 얘기를 한참 듣던 나는 단 한마디로 순간 술판을 얼어붙게 했다.  

“야! 니들 중, 미국 대사관저 정문에 대고 오줌 갈겨 본 놈 있으면 나와 봐!”

그 이후 모임에서 불리하거나 말문이 막히면 나는 이 말을 단골 안주처럼 내뱉었다.      


오늘처럼 그 역사의 현장을 찾는 날이면 선죽교의 혈흔처럼 그때의 내 흔적도 남아있지 않은지 터무니없는 상상 속에 웃고 지나간다. 이렇게 군 생활의 기묘한 에피소드들이 뿌려져 있는 곳이 덕수궁 길이다. 회사와 지척에 묻혀 있는 과거 기록들로 시간여행을 할 수 있다는 것이 산책의 또 다른 묘미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론 그 힘들었던 겨울 잔상들이 불쑥 튀어나올 때면 애써 외면하기도 한다.

개인의 짧은 기록들도 후드득 떨어져 있는데 더 길고 아득한 역사는 얼마나 많은 기록이  더께로 길 위에 쌓여 있을까. 이곳을 지나면서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역사의 조각, 풍경들을 내 과거처럼 되돌아보게 된다. 다만 개별성뿐 아니라 전체성라는 거대한 자취도 같이 묻혀있는 공간이기에 그 기록을 짧은 시간에 반추해 본다는 것은 버거운 일이라 오래 붙들고 있지 못한다.

 낙엽처럼 툭 떨어진 내 추억 하나를 잠시 돌아보는 길에서 시대의 역사도 맞닥뜨리게 되니, 1km 남짓한 짧은 거리에 더해진 사색의 산책길은 그보다 길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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