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조금만 하고 드릴게요. 오늘은 중요한 이벤트가 있단 말이에요.”
“안 돼. 약속을 했으면 지켜야지. 지금 몇 분이나 지났는데.”
“조금만 하고 드릴게요, 네에?”
“안 돼. 그건 약속 위반이야. 게임 회사 사람들 아주 징한 사람들이다. 어린애들 잠도 못 자게 무슨 이벤트를 한밤중에 한다니? 폰은 안 돼. 얼른 가서 자라!”
스마트폰 반납 시간을 두고 아들과 실랑이를 벌였다. 늦은 시간까지 학원에서 공부하고 온 녀석이 스마트폰으로 게임을 잠깐 하고, 이벤트가 있어서 뭘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남편이 그만 가서 자라고 얘기해도 녀석은 가지 않고 계속 서서 자기 폰을 돌려달라고 버텼다. 녀석이 계속 보채자 남편이 잠을 자다 말고 일어나서 거실로 나가더니 망치로 휴대폰을 때려 부쉈다. 11월 3일 자정을 조금 넘긴 시간에 일어난 대참사였다. 제시간에 휴대폰을 반납한 큰아이가 깜짝 놀라서 나왔다. 약속을 어긴 것은 동생인데 왜 자기 것까지 부쉈냐면서 울음을 터뜨렸다. 소파에 유리가루가 내려앉아 반짝거렸다. 발이라도 다치는 날엔 큰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말릴 새도 없이 휴대폰은 망치 공세에 엉망이 되어 있었다.
사태를 수습한 뒤 벌렁거리는 가슴을 부여안고 잠자리에 들었다. 그러나 쉬이 잠을 잘 수가 없었다. 작은 방에서 들릴 듯 말 듯 흐느끼는 소리가 들려왔다. 둘째 녀석 방에서 나는 소리였다. 방문은 굳게 잠겨 있었다. 노크를 해도 문은 열리지 않았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둘째 녀석이 다시 나와 자기 휴대폰을 망치로 쾅쾅 내리치는 모양이었다. 그리곤 만신창이가 된 자기 휴대폰을 휴지통에 버리고 들어갔다. 다시 살아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을까. 아니면 그동안 휴대폰을 자기 분신처럼 아꼈던 자신이 싫었던 것일까. 확실히 깨부수고 영원한 결별 의식을 치르는 모양이었다.
위 아랫집 사는 사람들 볼 면목이 없었다. 밖에서 볼 때는 고상하게 보이더니 아주 막가는 집안이라고 흉볼 것만 같았다. 그렇잖아도 세대 간 층간 소음이 크게 문제가 되고 있는데 몰상식한 사람들이라고 신고나 하지 않을까 두렵기도 했다. 다음 날 쓰레기 버리고 들어오는 길에 아랫집 아저씨를 엘리베이터에서 딱 만났다. 밖에서 담배 한 대 피우고 들어오시는 모양이었다. 머릿속에 여러 가지 생각이 스치고 지나갔다. 어젯밤에 난리 피운 걸 생각하면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었다.
안 되겠다 싶어 집에 돌아와 아랫집 아줌마에게 문자를 날렸다. ‘어젯밤에 많이 시끄러우셨죠? 아이들 휴대폰을 망치로 부수는 대참사가 있었어요. 소란스럽게 해서 죄송합니다.’ 그랬더니 답장이 왔다. ‘무슨 일인지 걱정되었어요.’ 하고. 심히 부끄러웠다. 말은 걱정되었다고 하지만 ‘당신네들 정신이 있는 거요? 한밤중에 그런 짓을 하다니 참 한심한 사람들이구먼.’ 하고 조소를 날리는 것만 같았다. 그렇지만 이미 물은 엎질러진 뒤였다. 그 일이 있은 다음 날부터 나랑 동갑내기인 아랫집 사는 사람으로부터 카톡으로 성경 구절이 날아오고 있다. 내가 교회 다니는 걸 잘 알 텐데 성당 식구로 포섭할 심사인지, 아니면 또다시 그런 일이 발생할까 봐 걱정되어서 그러는 것인지 그건 잘 모르겠다. 아무튼 그날 이후로 은혜로운 성경 말씀이 날마다 내게 배달되고 있다.
휴대폰을 깨뜨리자 아이들에게 변화가 생겼다. 집에 와서 시간만 나면 폰으로 게임하고, 음악 듣고, 웹툰을 들여다보며 낄낄거리던 녀석들이 할 일이 없어지자 책을 읽기 시작했다. 학교 다녀와 잠깐 쉬는 동안엔 신문을 봤다. 기사를 보고 ‘IS 때문에 난리가 아니구먼.’ 하고 혼잣말을 했다. 세상 돌아가는 일에 관심을 가지고 걱정하는 눈치였다. 밥을 먹기가 무섭게 자리를 떠났던 녀석들과 식탁에 앉아 여유 있게 대화할 시간도 생겼다. 밤에 잠을 푹 자게 되니 아침에 일어나기가 한결 수월해졌다. 애써 깨우지 않아도 스스로 알아서 일어났다. 어느 날은 둘째 녀석이, “공부 잘하는 애들 보니까 다들 폰이 없더라고요.”라는 말을 하기도 했다. 아직도 가끔 엄마, 아빠 폰을 만지기도 한다. 그 모습을 보면 옛날을 그리워하는 거 아닌가 하는 마음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잠깐 동안의 금단현상일 거라 믿는다.
그 일이 있은 후 남편과 나는 눈치가 보였다. 그래서 아이들이 보는 앞에선 폰을 들여다보지 말자고 결의했다. 그 대신 책을 읽자고 했다. 남편도 흔쾌히 동의했다. 스마트폰이 뺏어간 시간을 찾아오니 우리는 유익한 것들을 할 수 있게 되었다. 눈부신 기술의 발달로 우리는 정말 편리한 사회에서 살고 있다. 손 안에서 돌아가는 작은 컴퓨터를 통해 세계 곳곳에서 올라오는 정보들을 접하고, 전 세계 사람들이 마치 바로 옆에서 대화하는 것처럼 얘기한다. 스마트폰 하나면 정말 스마트하게 많은 일들을 손쉽게 해낼 수가 있게 되었다. 그러나 그것에 빠져 소중한 시간들을 무의미하게 보낼 때가 많음을 인정한다. 이제는 분별할 때가 되었다. 아이들이 원한다고 아이들에게 무작정 스마트폰을 쥐어줄 일이 아니다. 우리가 어렸을 때는 밖에 나가서 신나게 친구들과 노는 일이 가장 재미있었다. 추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썰매를 타고, 눈싸움을 하고, 눈사람도 만들었다. 그렇지만 지금의 우리 아이들은 그런 추억이 없이 지낸다. 어쩌다가 시간이 나서 놀고 싶어도 함께 놀 친구들이 없다. 다들 집에 콕 박혀서 컴퓨터 게임을 즐기는 것을 더 좋아한다. 아니면 학교생활에 치어 부족한 잠을 자느라 친구와 놀 시간이 없다. 우리 어린 시절과 비교하면 지금의 아이들이 훨씬 더 불쌍한 것 같다. 그렇지만 아이들은 그 사실을 모를 것이다. 안타까운 현실이다.
달랑 한 장 남은 달력을 보니 속절없이 빨리만 가는 시간이 원망스럽다. 20대는 시속 20km로, 30대는 시속 30km로, 40대는 시속 40km로 나이에 비례해서 시간이 간다고 하던데 나의 시간은 번개같이 흘러간다. 여전히 지지고 볶으며 살고 있는 내 모습에 한숨이 섞여 나오기도 하지만 그 속에서 행복을 본다. 사람들은 네 잎 클로버를 찾기 위해 수많은 세 잎 클로버들을 무심결에 발로 밟는다. 네 잎 클로버의 꽃말은 ‘행운’, 세 잎 클로버의 꽃말은 ‘행복’이라고 한다. 세모의 길목에서 세 잎 클로버의 소중함을 되새겨 본다. 거창한 계획을 세우고 행운을 기다리는 것도 좋지만 반복되는 일상의 삶 속에서 행복을 가꾸고 누리는 일이 더 소중하다는 것을 알기에 거기에 더 가치를 두려고 한다. 그래서 나의 새해 목표는 ‘행복 찾기’이다. 남편과 아이들, 그리고 나를 통해 일어날 소소한 행복을 그려보는 것만으로도 새해는 희망 그 자체이다. 우리 집처럼 스마트폰을 깨뜨려서 소소한 행복을 찾아올 수만 있다면 그렇게 하라고 권하고 싶다. 그러면 스마트한 세상 너머엔 더 따뜻하고 행복한 세상이 기다리고 있다고 말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