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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애바다 Jan 08. 2024

경주(慶州)  구석구석 (1)

석굴암(石窟庵)- 신라 천년 고도(新羅 千年 古都)

   

경주 관광 권역별 지도
경주 관광 안내도

   한 해가 가기 전에 신라 천년의 고도(新羅 千年 古都), 경주(慶州)를 꼭 보고 싶었다. 버킷리스트였다. 마침 년 말 일주일간의 나만의 시간이 주어졌다. 유년시절 가까운 거리인 대구 근처 시골에 살았음에도 한 번도 직접 가 본 적이 없었다. 등잔 밑이 어둡다는 말이 딱 맞다. 꼭 보고 싶었던 곳은 석굴암, 불국사 그리고 첨성대였다.      

수서역 / 경주역

   마침 눈 내리는 화이트 크리스마스이브 날(2023.12.24., 일) 수서역에서 SRT로 06:30분 출발, 신경주역에 08:30 도착하였다. 역내 관광안내소를 들러 지도와 팸플릿을 받았다. 경주 지리에 어두워서 미리 정해전 코스를 답방하기로 하였다.

경주 시티 투어

   경주 시티 투어(Tel : 1666-8788)로 전화하니 사전 예약해야 한다고 했다. 아쉽게도 내가 원하는 코스의 버스는 조금 전에 출발했다고 한다. 할 수 없이 역 앞 버스정류장으로 이동했다. 버스 전광판에는 불국사 방향 700번 버스는 1시간 뒤에 온다고. 시간 단축을 위해 하는 수 없이 석굴암까지 택시 기사님 힘을 빌리기로 했다. 신경주역사는 시내에서 생각보다 멀리 떨어져 있었다.


   한참을 달려 불국사 입구에서 토함산(吐含山, 745m) 석굴암까지 약 7km 꼬불꼬불 산길을 달려 올라갔다. 속이 불편하고 계속 멀미가 났다. 기사님  설명에 의하면, 불국사-석굴암-문무대왕암은 지도상 일직선을 이룬다고 했다. 신라 천년 경주는 생각보다 넓고 크고 구경거리가 너무도 많았다. 다음 일정(대구 선대 묘소-순천 장모님 방문) 때문에 당일치기로 둘러봤다.    

  

   날이 어둑해지고 첨성대 관람 후, 마지막으로 포석정을 가려고 관광안내소에 문의하니, 이미 포석정 입장 마감시간이 지났다고 했다. 경애왕의 비극이 서려 있는 포석정 탐방을 포기해야 했다. 훗날로 미루어 아껴 둘 수밖에 없었다. 제일 아쉬운 대목이었다.      


<주요 관람 코스>

석굴암> 불국사> 분황사> 황룡사지> 월성(석빙고)>동궁과 안압지(월지)>경주 국립 박물관> 월성> 계림> 첨성대    

 

   관광지도에 따르면, 크게 경주대릉원 일원, 경주남산권, 보문관광단지등 3개 역으로 나눈다. 시간관계상, 경주남산권과 보문관광단지는 다음 기회에 탐방하기로 하였다.    

  

   동쪽 토함산에는 석굴암과 불국사가 있어 한국적 불교사상과 인공미의 극치를 보여준다. 경주대릉원 일원 구역에는 시내중심부 구황동에 분황사가 있고 바로 옆에 황룡사지가 있다. 인왕동의 반월성 일대에는 월성(석빙고) 동궁 안압지 국립 경주박물관 계림 첨성대가 있다.    

  

신라 천년 경주는

   신라 천 년의 고도로서 찬란한 신라문화의 보고인 경주는 자연박물관이자 세계적인 고적관광도시이다. 동쪽은 동해, 서쪽은 청도와 영천, 남쪽은 울산, 북쪽은 포항과 접하고 있다. 면적은 1,324.41㎢이고, 인구는 25만 9773명(2015년 현재)이다. 구릉성 산지로 둘러싸인 분지는 자연요새를 이루고 있다. 청동기시대의 고인돌 · 청동검 · 간돌칼 등이 계속 발견 출토되고 있다. 박물관을 가득 채우고 있다. 시내 곳곳에 유적유물 발굴 현장표시와 진입금지 푯말이 세워져 있다. 도시전체가 유적지고 박물관이다. 거대한 왕들의 무덤인 고분이 지천에 늘려있다.  


   국가지정 문화재만도 국보 31점, 보물 73점, 사적 및 명승 77개소, 천연기념물 3종, 중요민속자료 16종, 중요무형문화재 2종이 있다. 유네스코에 의해 불국사, 석굴암(1995.12.9)과 남산, 월성, 대릉원, 황룡사, 산성 등 5개의 경주역사유적지구(2000.12.2), 양동마을(2010.7.31) 등이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신라는 원래 사로 6촌에서 비롯되었다. 사로 6촌은 기원 전후 무렵 사로국(斯盧國)으로 발전하였다. 점차 진한 12국의 맹주국(盟州國)이 되었다. 통일 이후의 전성시대에는 17만 8,936호의 인구가 거주하는 거대도시였다. 935년(고려 태조 18) 신라 경순왕이 고려에 항복하였다. 1238년에는 몽고군이 침입하여 황룡사 구층 목탑이 불타는 등 수많은 문화재의 손실을 입었다. 조선 개국 후 8도 체제가 확정되면서 이곳에 경상도의 감영이 있었다. 경상도의 이름은 경주와 상주의 첫 글자에서 유래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왜군의 진격로에 해당하는 이 지역은 치열한 격전지가 되었다. 의병과 관 연합군의 경주성전투와 그 탈환 작전은 왜란을 승리로 이끈 계기가 되었다. 또 양동의 이 씨(李氏)와 손 씨(孫氏)는 오늘날까지 그 전통을 계승하고 있다. 그리고 조선 말기에는 이곳 출신 최제우(崔濟愚)가 인내천(人乃天)의 동학사상을 창시하였다. 일제강점기에 이 지역 역시 활발한 독립운동을 전개했는데, 3 · 1 운동 당시에 3월 13일과 15일 만세시위가 일어났다. 1928년 신간회 경주지부가 결성되어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였다.(다음 사전)

석굴암 본존 (출처 : 석굴암 홈페이지)

1) 석굴암

   석굴암은 신라 경덕왕 10년(751)에 당시 상이었던 김대성이 창건을 시작하여 혜공왕 10년(774)에 완성하였으며, 건립 당시에는 석불사라고 불렀다.  

범종각

   주차장에 도착하니, 좌측에 거대한 종루가 보였다. 태풍 때 입은 수해로 불국사에서 올라오는 등산길은 폐쇄되어 있었다. 그 사실을 모르는 일부 등산객과 관리인이 높은 소리로 대화를 주고받고 있었다.      

토함산 석굴암 일주문

   토함산 석굴암 일주문을 통과하여 동쪽 산기슭으로 난 길을 15분 정도 걸어가자 마침내 토함산 정상 방향에 석굴암 건물이 나타났다. 석굴암 부처님을 볼 수 있다는 기대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석굴암 석물 (보수전 원석)

   일제 강점기 및 근세에 보수를 한 결과물인 보수하기 전 초기의 석재 원석들이 진열되어 있었다.

석굴암 가는 길
석굴암 입구

석굴암 석굴

   석굴사원은 인도에서 만들어지기 시작하여 중국을 거쳐 우리 땅에 전해졌다. 인도나 중국은 절을 짓기보다 돌을 파서 그 안에 부처를 모시는 형태였다. 그러나 우리나라 산의 돌은 화강암이라 굴을 뚫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돌을 쌓아 올려 인공적으로 석굴을 만들게 되었고, 세계적으로 유일한 인공 석굴이 탄생하게 되었다.   

  

   사각형의 앞방을 지나면 원형의 뒷방이 이어진다. 통로에는 동서남북을 지키는 사천왕이 자리 잡고 있다. 원형의 뒷방으로 들어가면 방 벽면에는 여러 불상들이 좌우 대칭으로 새겨져 있다. 둥근 천장은 360여 개의 넓적한 돌로 교묘하게 축조한 것이다. 이러한 기법은 유래가 없는 기술이며, 1995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목록에 등재되었다.      


   현재 석굴암은 내부 전면 공개 관람 시 항온항습 등의 문제가 우려되어 1976년부터 유리벽을 통한 외부관람을 실시하고 있다. 일부 불교신자는 벽안에서 예불을 드리고 있었다.  실내 사진 촬영을 금지하고 있다.  

석굴암 본존불 (출처 : 석굴암 홈페이지)

석굴암 본존불

   떨리는 마음으로 두 손으로 합장하고, 예를 올렸다. 고요하고 자비로운 인자한 모습이다.


    석굴암 본존불상은 전 세계 종교예술 중에서도 뛰어난 명작이다. 1.58m의 좌대 위에 3.26m의 거대한 규모이다. 단단한 화강암으로 조각하였지만 모난 곳 없이 부드럽게 빗어 내었다. 가늘게 뜬 눈, 온화한 눈썹, 길게 늘어진 귀 등 인자한 얼굴을 보고 있으면 숭고하고 자비로운 마음이 전해진다. (팸플릿)   

석굴암 삼층석탑 (출처 : 석굴암)

석굴암 삼층석탑

    석굴암에서 동북쪽으로 약 150m 떨어진 언덕에 있다. 화강석으로 만들었으며, 탑의 지대석과 상하 갑석이 일반 탑에서는 볼 수 없는 원형이다. 높이 3m이며 통일신라시대 만들어졌다.     

사천왕상(출처 : 석굴암)

사천왕상

   동서남북 사방을 관장하는 신상으로 문턱 좌우에 각각 2체씩 조각되어 있다. 두 발로 악귀를 밟고 서 있는 표정과 자태가 각양각색이다.     

팔부신중( 출처 : 석굴암)

팔부신중

   불법을 수호하는 여덟 무사며 전실 맨 앞쪽 좌우에 조각되어 있다. 여러 얼굴과 팔을 지닌 아수라를 비롯하여 천, 용, 야차, 건달바 등의 가상동물로 고대 인도의 신이었으나 석가모니의 교화를 받아 불교의 수호신이 되었다.  

석굴암 (전면)과 석등 연화대

김대성 이야기

   김대성은 신라중대의 재상으로 석굴암과 불국사를 만들었다. 삼국유사에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김대성은 가난한 집안의 아들이었다. 매일 끼니를 걱정할 정도로 가난하였지만, 전재산이었던 작은 밭을 시주하자고 어머니를 설득하였다. 몇 달 후 김대성은 세상을 떠났다. 그 후 김문량의 집에서 아들이 태어났고, 아이의 손에는 대성이란 두 글자가 새겨진 금간자가 쥐어져 있었다. 다시 태어난 김대성은 전생의 어머니를 모셔와 함께 살았다. 그리고 이생의 부모를 위해 불국사를, 전생의 부모를 위해 석굴암을 짓기 시작했다고 한다.     

석굴암

석굴암의 보존

   석굴사원은 751년 세워진 이래 1,200여 년이 넘도록 보존되고 있다. 그 답은 석굴사원을 평지가 아닌 샘이 흐르는 터에 건축하였기 때문이라고 한다. 샘물이 내부의 습기를 아래로 모이게 하고, 통풍이 잘 되도록 열린 구조로 설계하여 자체적으로 습도와 환기를 조절하도록 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일제 강점기의 보수공사 과정에 사원은 점차 파손되었다. 현재 석굴사원 앞에 목조 전실과 유리벽을 설치하여 보호하고 있다.     

석굴암 팸플릿

<참고 자료>

-. 석굴암 홈페이지

-. 경주 관광 홈페이지

-. 석굴암 (경주시 팸플릿)

-. 대한민국 구석구석 사전     


글이 길어져 불국사 편은 다음 회에 올려 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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