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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일그러진 친구

서로 다른 길

by 애바다

동쪽은 비슬산, 서쪽은 낙동강으로 호리병 형태로 둘러싸인 애바다 벌판에도 연초록 봄은 왔다. 새봄이 되자 비슬산에서 눈이 녹아내리고, 봄비와 함께 시냇물로 어우러져 내리며, 벌판을 적시고, 물안개를 만들며,마지막으로 낙동강으로 흘러들어 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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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비슬산을 큰 산이라고 불렀다. 큰 산에 큰 기둥 모양의 바위가 있었는데,바위 이름이 배바위였다. 전설에 의하면,옛날 옛적에 배의 선착장 역할을 하면서 배를 그 바위에 묶어 놓았다는 것이다. 배바위 아래, 밤에는 호롱불을 켜야 했고,좁은 신작로를 따라 어쩌다가 먼지를 폴폴 날리며 화물차라도 한 대 지나 가면,그날 저녁 밥상머리의 중요한 이야깃거리가 되는 조그마한 시골 마을이었다. 

초등학교에 입학 첫날,참새 같은 다리로 편도 10리를 걷고서는 "아부지 학교 가기 싫어예" 하면서 다음날 아침에 울고불고 난리를 했다. 그러면 마음 약한 할머니는 동네밖에 까지 업고 갔다. 어쩌다가 동급생을 만났다. 창피스러워 할머니 등에서 내려서는 호작호작 걸어서 등교를 했다.


"야! 김진규!니, 멋있다! 눈에 총 맞았나?"

"니! 대가리 또 깨졌나?"


국민학교 삼 학년 긴 겨울 방학이 끝나고 앞이마에 된장을 눌러 붙이고 헌 내의를 찢어 머리를 두르고 애꾸눈이 되어 개학 첫날 등교를 하자, 반 친구들이 저마다 나에게 한 마디씩 했다. 같은 반 동네 친구 신용섭이가 누른 코를 들어마시며 한마디 거들었다.

"김칫국이가 휘두른 달불놀이 깡통에 맞아 머리가 깨졌다 아이가"

김치국이가 듣기 싫은지 나무 의자를 뒤로 "꽝당" 넘어뜨리고는 교실문을 쾅 닫고는 나가버렸다. 김치국, 신용섭 그리고 나 김진규는 한동네 동갑내기 개구쟁이 삼총사였다.


  6.25전쟁이 끝나고 10년정도 지나자 시골에는 어린아이들이 득실거렸다. 낙동강 전투 때,청년들은 군에 징집되어 전투 중 전사하여 백골 혹은 병신이 되어 돌아오거나,동네 어른들은 인민군에 끌려가 행방불명되는 일은 다반사였다. 부녀자들과 어린아이들은 피난 중에 비행기에서 떨어진 폭탄으로 목숨을 잃거나,굶어 죽거나 어디론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종전이 되자,전쟁 학습효과로 우선 죽이 되던 밥이 되던 많이 낳고 보자는 심리가 확산되었다. 많이 낳을수록 종족보존 확률이 높다는 이유였다. 나도 그중의 하나였다. 슬픔과 상흔도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점점 아물어갔다. 사람들은 어디서 누구로부터 마음의 위로를 얻기를 원했다. 떨어진 면사무소 옆의 5일장터에서 는 임시 가설극장이 들어서서,겨울 농한기에는 밤마다 영화를 상영하였다.


그날 밤 영화 제목은 "섬마을 선생님"이었다. 여가수 이미자가 노래를 히트시키자. 바로 영화로 만들어 시골장터에서까지 상영하게 되었다. 섬처녀의 섬학교에 전근 온 선생님에 대한 애틋한 사랑을 그 린 영화였다. 일주일 정도 주로 면소재지 건달패나 한량들이 주관하여 그믐날 캄캄한 밤에 1회만 상영하는 영화라 대낮부터 선전하는 무리들이 여러 마을 들을 돌아다니며 확성기로 외치며 돌아다녔다.2인 1조가 되어 한 명은 확성기를 옆구리에 끼고 외치고, 한 명은 무거운 배터리를 어깨에 메고 낑낑 거리며 뒤따라 다녔다. "오늘 밤 영화는 섬마을! 섬마을 선생님입니다! 한번 놓치면 두 번 다시는 볼 수 없는 영화! 섬마을! 선생님! 섬마을 선생님입니다!"영화가 상영되는 며칠 동안은 그야말로 면민의 축제의 장이 되었다.

특히 젊은 아가씨들은 밭일이나 부업으로 "홀치기" "빼치기"라는 부업일에서 잠시 벗어났다. 일본 기모노 옷감의 물방울무늬를 한 땀 한 땀 눈높이의 나무틀 끝 부분의 낚시 바늘 같은 데를 이용하여 손이 안 보일 정도로 나무 실패를 잽싸게 실로 돌려 묶어 나갔다. 


영화가 상영되는 밤이면 먼 길을 마다하고 손에 손잡고 무리를 지어 보러 갔다. 슬픈 영화는 눈물 콧물을 짜며, 바람에 펄럭이는 광목천에 비친 주인공의 아픔을 공감하고 있었다. 어린 녀석들은 누나들 호위한다고 농가의 벼 짚단에서 짚을 빼서는 횃불을 만들어 불을 밝혀 호위무사처럼 귀가했다. 밤하늘의 무수한 별들만으로도 그 빛이 뭉치면 길을 밝히는데 문제가 없었다. 구름이라도 끼는 날 영화가 끝나고 돌아올 때 구멍을 송송 뚫은 깡통에다가 소나무 관솔을 넣고,불을 붙여 휘두르면 밝기도 하거니와 재미도 있었다. 

그런데,김치국이 휘두른 깡통이 나의 앞이마를 정통으로 강타하였다. 동네형이 속내의를 찢어 머리를 감 싸준 덕분에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런 꼴로 집에 도착하니 부모님,할머니 모두 놀라서 된장을 처바르고,헝겊으로 다시 한번 싸 동여맸다.

어느 정도 나의 이마 상처 부위에 딱정이 앉아 가려워 긁으면 흉터 생긴다고 할머니는 난리였다. 비 오는 날 하굣길에 김치국,신용섭 그리고 나 셋이서 책보자기를 허리에 두르고 뜀박질해 오다가 권 씨 문중의 효자각 옆에서 잠시 쉬고 있었다. 김치국이는 항상 학급의 맨 뒷줄에 앉을 정도로 덩치가 컸고, 주먹이 큼직하여 두 학년 위의 아이들과 싸움해도 이기는 한 등치 값하는 아이였고,신용섭이는 학급의 맨 앞줄에 앉았다. 내가 중간 줄 즈음에 앉았다. 김치국의 키는 신용섭보다 머리 하나는 더 컸다. 화가 나면 거품을 입에 물고 김치 냄새가 입에서 나오는 워낙 다혈질이라 얼굴이 붉어지면서 씩씩거리는 소리가 옆에서 다 들렸다. 

  

치국이가 심심한지 자꾸 용섭이를 발로 전강 이를 톡톡 차자,용섭이가"차지마라!"한마디에 치국이가 조그마한 것이 달려든다고 눈알을 부라리며 주먹으로 머리를 한 대 때렸다. 내가 더 이상 참을 수 없어"그만 하라"고하자"네가 먼데 그래!" 하면서 주먹을 휘둘렀다. 나도 질 수가 없어서 몇 번주 먹을 휘둘러 보았지만 녀석이 나의 취약 부분인 앞이마의 겨우 아물기 시작한 부위를 집중적으로 공략했다. 그 이후의 이야기는 성장한 이후까지의 나의 트라우마이기에 여기에 차마 적을 수 없음을 이해 바란다.


5학년이 되자 맨날 앞줄에만 앉던 용섭이도 덩치가 커져 나와 중간줄 정도에 앉게 되었다. 어느 날 치국이가 내게 용섭이가 나의 욕을 하고 다닌다고 일러 주었다. 그기에다가 나하고 싸움 붙으면 이길 수 있다고 하면서 떠들고 다닌다고 하였다. 나는 설마 하면서 믿지를 않았다. 생각해보라. 3학년 때 용섭이 저를 위해 피까지 흘려준 혈맹 같은 나를 그렇게 생각할 수 있을까 하는 믿음도 있었다. 한데,그것도 한두 번이지 치국이가 자꾸만 나에게 전해오는 것은 용섭이로부터의 불길한 소식과 징조뿐이었다. 이제 용섭이가 나를 슬슬 피하기까지 하였다. 이제는 다른 친구들로부터도 용섭이가 나를 만만하게 본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분위기가 무르익자,마침내 치국이가 우리 둘을 불러놓고 진정한 승자를 2위 자리를 가리자는 제안을 했다.  토요일 방과 후 야산에서 둘의 싸움이 있다는 것을 광고하고 다닌 것은 치국이었다. 동네 일 학년부터 육한년까지 아이들 거의 다 모였다. 그야말로 치국이의 공작과 노력으로 돈 안 내고 즐기는 격투기 대회,빅매치가 성사되었다. 학교와 집의 중간쯤에 있는 야산 솔밭 약간 경사진 밀밭 위에서 대회전에 펼쳐졌다. 몇 번의 발길질과 위치 선점을 위하여 몇 회 회전하다가 마침내 내가 선공을 했다. 학급 씨름 선수였던 나의 장기를 무기로 바닥에 넘어뜨린 다음 코에 주먹을 꽂자 용섭이의 코에서 코피가 났다. 그것으로 싱겁게 승부는 끝났다. 나는 이기고서도 조금도 기쁘지 않았다.  


가을 운동회에 학년별 청군 백군 씨름 종목에 6학년 청군 대표로 내가 출전했다. 불운하게도 백군 대표가 김치국이었다. 김치국이가 전교생 회장이었으므로, 그로서는 져서는 안 되는 게임이었다. 둘이 모래 바닥에 쭈그리고 앉아서 샅바싸움 후 선생님의 호각소리와 양 팀의 응원소리와 함께 일어섰다. 김치국이가 소란한 틈을 타 나의 귀에다가 나직이 협박을 했다.

"니 내 이기면, 쥑이뿐다!' 그 소리에 나는 이를 악물고 그놈의 뒷다리를 걸어 넘어뜨렸다. 둘째판은 그놈이 얼마나 힘을 썼는지 녀석의 전강이 가 모래바닥에 닿는 것을 심판 선생님이 보고 나의 승리를 선언했다.


어느 날 하굣길에 용섭이 나는 힘센 고구려에 대항하여 신라와 백제가 나제 동맹을 맺은 것처럼,신사협정을 맺었다. 둘 중에 하나라도 치국이에게 당하면 동시에 달라붙어 버릇을 고쳐놓자고 약조를 했다. 비 오는 여름 방학하기 며칠 전 하굣길에 놈의 행패가 용섭이에게 시작되었다. 우리는 책보따리를 허리에서 풀어 길 위에 던져 놓고는 치국이를,왜장 허리를 껴안고 진주 강에 떨어져 목숨을 바친 논개처럼,허리를 안고서는 벼가 자라고 있는 무논으로 그를 쑤셔 밀어 넣었다. 놈의 발길질이 주특기라 발부터 묶어 놓고서는 무논에서 엉겨 붙었다. 아무리 큰 덩치지만 둘한테는 당하지 못했다. 둘은 아주 작심을 하고서는 치국이가 코피를 쏟을 때까지,머리를 짓눌러 논바닥 물을 먹이면서까지 시원한 대가를 치르게 해 주었다. 그 뒤 며칠간은 독재자다운 치국이의 모습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초등학교 옆의 중학교를 졸업하고,고등학교는 다들 대구에서 다녔다. 간간이 치국이의 이상한 소문은 계속 들렸다. 중학교 동창 여자애가 치국이를 입이 큰 하마 같다 고 놀리고 다니다가,어느 비 오는 날밤에 치국이가 그 여자애의 얼굴을 면도날로 그었다는 둥,큰 호숫가에 텐트 야영을 하던 남녀 한쌍을 어떻게 하였다는 둥,나쁜 소식만 들렸다.


어느 날 중학교 동창이 치국이와 용섭이의 소식을 전해왔다. 치국이와 용섭이가 면사무소에 방위로 같이 근무하고 있다는 것이다. 치국이가 몇 달 선임으로서 군기를 잡는다고 용섭이를 포함하여 학교 선배,후배 가릴 것 없이 방위선임으로써 매일 기합과 얼차려를 주는데 점령군처럼 가관이라는 것이다. 심지어는 일반인들이 보는 가운데,하수구 구멍 통과 선착순을 시키는가 하면,얼차려 후 상의를 탈의시키고 장날 시장 좁은 거리를 뛰게 한다는 것이다. 


몇 년 후 치국이가 건설회사를 하나 차렸는데,얼마나 수완이 좋은지 승승장구한다는 것이었다. 최근에 그의 사무실에 검은 정장을 입고,등치가 떡 벌어진 험악하게 생긴 젊은 사람들이 들락거린다는 이야기가 들렸다. 그리고 용섭이가 경찰시험에 합격하여 근무 중이다는 반가운 소식이 들렸다.


마침내 대구 내일신문에 조폭 일 제 소탕이란 제목이 대문짝만 하게 떴다. 더욱 놀라운 것은"오성파 두목 김치국 잠적"이었다. 오성파라니! 최근에 룸살롱에서 조폭계 주도권 다툼으로 야구방망이와 회칼로 난자해서 조폭계를 평정하여 명실상부한 조직의 두목이 되었다는 것이다.3겹의 경찰 포위망을 뚫고 신출귀몰하게 도주하였다는 것이다. 회칼을 소지하였으며 위장의 달인이라는 것이다. 신고자에게는 현상금 천만 원이라는 거액의 포상금을 준다는 설명과 사진이 큼직하게 붙었다.


고향을 가자면 반드시 거쳐야 하는 삼거리에 근무 중인 용섭이가 상부로부터 경계 강화 지시를 받았다는 것은 당연하였다. 공문 내용 중에 검거 시 1계급 특진이라는 문구가 첨가되어 있었다. 대구에서 내려오다가 갈래길을 만나게 되는데,한 곳이 합천 해인사,다른 한 곳은 마산, 창녕 방면이었다. 검문 파출소에서는 설마 고향을 향해서 숨어드는 바보가 있겠느냐와 허허실실이라고 일부러 선택하여 장기적으로 은둔을 계획할 수도 있다는 의견이 반반이었다고 한다.


저녁 무렵,방금 조금 전에 막 교대근무에 투입된 용섭이가 "마산. 창녕"이란 안내간판을 달고 내려오는 버스를 발견하고는 손전등으로 정지신호를 보냈다. 버스가 "끼익"하고 멈췄다. 버스 문이 열리자 용섭이가 버스에 올랐다."잠시 검문이 있겠습니다" 깎듯이 거수경례를 하고 찬찬히 승객 하나하나 매의 눈으로 둘러보았다. 특별한 이상을 발견할 수는 없었다. 

그런데,웬 노인 하나가 모자를 눌러쓰고 옆으로 약간 비스듬하게 잠자고 있었다. 용섭이가 돌아서서 출입구로 걸어가서"불편을 기쳐드려 죄송합니다"하고 거수경례를 하고 돌아서는 찰나,노인과 눈이 마주쳤다. 아무리 변장을 해도 눈매가 바로 "그놈"이었다. 용섭이가 "김치국! 꼼짝 마!"하고 권총을 빼들자,치국이가 핏줄 터진 눈길을 용섭이에게 주며, 옆자리의 아가씨 목에 회칼을 들어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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