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창기 천주교, 김수환 스테파노 추기경과 프란치스코 교황 선종
절두산 순교성지, 새남터 순교성지, 당고개 순교성지, 중림동 약현성당, 서소문 밖 네거리 순교 성지를 순례하였고, 이미 말씀드렸다. 명동대성당을 보고 드린다. 오늘(2025.04.26., 토 맑음) 일정은 다음과 같다.
명동 대성당은 나에게 좋은 추억들을 주었다. 수 십 년 전 이곳에서 꽃처럼 예쁘고 화사한 질녀가 결혼식을 올렸었다. 그리고, 시퍼런 군부 시절, 김수환 스테파노 추기경이 전경에 쫓겨 명동대성당에 숨어든 대학생들을 온몸으로 막아 저지해서 지켜준 일화로 더욱 애착을 갖게 하였다. 그리고 프란치스코 교황의 서거에 조문하였다.
구내 서점에서 ‘똑똑! 우리 아이 첫 성경’과 ‘만화로 보는 신약 성경’을 구입하여, 유치원 손주 녀석에게 선물로 주었다. 녀석은 만화책부터 보았다.
1987년 6월 항쟁이 떠오른다. 1987년 6월 전국적으로 전개된 일련의 민주화 운동. 박종철 열사의 고문치사사건과 4·13 호헌조치, 이한열 열사의 최루탄 피격 사건으로 인해 반독재 민주화를 열망하는 전국적인 거리 행진과 대규모 시위가 6월 한 달 동안 지속되자, 마침내 당시 민주정의당 노태우 대통령 후보는 6·29 선언을 발표하고 대통령 직선제로의 개헌을 받아들였다.
당시 전투경찰의 최루탄과 몽둥이에 밀려 학생들이 명동대성당 안으로 몸을 피했다. 경찰들이 그들을 잡으러 쫓아왔다. 그때 김수환 스테파노 추기경이 나섰다.
“경찰이 성당에 들어오면 제일 먼저 나를 만나게 될 것입니다. 그다음에는 시한부 농성 중인 신부들을 보게 될 것입니다. 또 그 신부들 뒤에는 수녀들이 있습니다. 당신들이 연행하려는 학생들은 수녀들 뒤에 있습니다. 학생들을 체포하려거든 나를 밟고, 신부와 수녀들을 밟고 지나가십시오.”
추기경의 단호한 선언은 기적을 일으켰다. 전경들이 썰물처럼 철수했고, 농성을 푼 학생들은 학교로 되돌아갔다. 그 뒤 6·29 선언이 발표됐고 직선제 개헌이 단행됐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2025년 4월 21일 선종하셨다. 명동대성당 조문의 대열에 줄을 섰다. 항상 웃는 얼굴로, 낮은 자와 함께한 분이다. "주님, 프란치스코에게 영원한 안식을 주소서." 가장 소중한 이를 보낸 허전함이 틈을 비집고 올라왔다. 나도 모르게 눈물을 손바닥으로 훔쳤다.
서울대교구의 주교좌 명동대성당은 서울 중구에 있다. 우리나라 최초의 본당이며, 한국천주교회의 상징이다. 1892년에 코스트 신부가 설계에 착수하였고 1898년에 5월에 준공했다. 성당 높이는 23m, 종탑의 높이는 46.7m이며, 벽돌조양식 구조며, 장식적 요소를 배제한 순수 고딕양식이다. 중림동 약현성당, 답동성당, 계산성당, 전동성당, 공세리성당 등과 더불어 구한말에 지어진 대표적 고딕 양식 성당이다. 사적 제258호로 지정되었으며 종현성당, 명동천주교당이라고도 부른다.
명동성당이 세워진 곳, 명례방은 원래 역관 김범우 토마스의 집이 있던 자리로 이승훈, 정약전의 3형제, 권일신 형제 등이 모여 조선 천주교회를 탄생시킨 곳이다. 대한민국에서 처음 천주교 전례가 거행된 장소다.
김범우 토마스는 자신의 집에서 이승훈 베드로, 정약전 안드레아 등과 함께 천주교 서적을 연구하고 자체적으로 공소 예식을 드렸다. 포도청 당국 이들을 적발했을 때 다른 사람들은 명문가 자제라서 적당히 훈방 조치됐지만, 김범우는 중인 계급이라 고문을 받고 귀양을 가다가 사망했다.
그 후 조불수호통상조약이 체결된 해인 1886년부터 조선에서 천주교 신앙의 자유가 허용되고 나서 새로 성당을 지었다. 1901년부터 기해박해, 병인박해 때 순교한 분들의 일부 유해를 모시게 되었다. 현재까지 지하성당에 모셔져 있다. 1942년 최초의 한국인 주임신부가 부임하였으며, 최초의 한국인 주교인 노기남 주교의 서품식도 거행되었다.
한일병합 직전인 1909년 12월 22일에는 이재명 의사가 가톨릭 교회가 주도한 벨기에 국왕 레오폴드 2세의 추도미사에 참석하고 빠져나오던 을사오적 중 한 명인 이완용을 성당 언덕 아래의 길가에서 습격했다. 하지만 이완용을 보호 방어하던 인력거꾼이 칼에 찔려 죽었다. 이완용도 칼에 찔렸지만, 살아났다.
명동성당
정 호 승 (프란치스코)
바보가 성자가 되는 곳
성자가 바보가 되는 곳
돌멩이도 촛불이 되는 곳
촛불이 다시 빵이 되는 곳
홀연히 떠났다가 다시 돌아올 수 있는 곳
돌아왔다가 고요히 다시 떠날 수 있는 곳
죽은 꽃의 시체가 열매 맺는 곳
죽은 꽃의 향기가 가장 멀리 향기로운 곳
서울은 휴지와 같고
이 시대에 이미 계절은 없어
나 죽기 전에 먼저 죽었으나
하얀 눈길을 낙타 타고 오는 사나이
명동성당이 된 그 사나이를 따라
나 살기 전에 먼저 살았으나
어머니를 잃은 어머니가 찾아오는 곳
아버지를 잃은 아버지가 찾아와 무릎 꿇는 곳
종을 잃은 종소리가 영원히
울려 퍼지는 곳
1970년대부터 민주화 운동의 성지 역할을 했다. 김수환 스테파노 추기경의 1971년 성탄 자정미사 강론, 1976년 3.1 민주 구국선언, 박종철 열사 고문치사 사건의 은폐·조작을 폭로했던 1987년 5.18 7주기 추모미사가 거행되었다. 6월 항쟁 당시에는 대학생 농성단의 은신처였다. 6월 항쟁 이후에는 항쟁 희생자들을 기리는 각종 미사들이 집전되었다. 1984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방문하였다. 한국 천주교 200주년 기념대회 및 103위 시성식을 주례하기 위해 한국을 찾은 교황은 행사 당일인 5월 6일 대회장에 가기에 앞서 오전 8시 방문했다.
2014년 사목방문차 한국을 찾은 프란치스코 교황이 방한 일정의 마지막으로 명동성당을 방문하였다. 교황은 명동성당 내 꼬스트홀에서 한국 종교 지도자들과 만남을 가진 후 대성전에서 「평화와 화해를 위한 미사」를 주례하면서 남북한의 용서와 화해를 촉구하고 전쟁이 아닌 평화를 기원했다.
4호선 명동역이나, 2호선 을지로입구역에서 내려오면 된다.
천주교 서울대교구 주교좌 명동대성당은 한국 천주교회의 상징이다. 한국 교회 공동체가 처음으로 탄생한 곳이자 여러 순교자의 유해가 모셔져 있다. 2천 년 교회사 안에서 유례없이 한국 천주교회는 한국인 스스로의 손으로 창립되었다.
한국 천주교회의 출발은 1780년 1월 경기도 광주의 깊은 산속에 있는 천진암에서 시작되었다. 권철신을 중심으로 강학회가 열렸고, 여기에서 당시의 저명한 학자들이 천주학을 접하게 되었다.
1784년 봄, 이승훈이 북경에서 영세한 뒤 귀국하였다. 1784년 가을, 서울 명례방에 살던 통역관 김범우는 이들의 영향을 받아 천주교에 입교하고 자신의 집에서 교회 예절 거행과 교리 강좌를 열었다.
이승훈, 정약전 3형제, 권일신 형제 등이 이벽을 지도자로 삼아 종교 집회를 가짐으로써 한국 천주교회가 창립됐으나 이 신앙 공동체는 이듬해 형조 금리(刑曹禁吏)에게 발각돼 김범우가 경상도 단장으로 유배되면서 해체됐다. 그 후 1882년 명동은 한미수호 조약의 체결로 종교의 자유를 얻었고 제7대 교구장 블랑 주교에 의해 성당 터로 매입되었다. 블랑 주교는 이곳에다 우선 종현 서당을 설립, 운영하면서 예비 신학생을 양성하는 한편 성당 건립을 추진해 한불 수호 통상 조약(1886년) 체결 이듬해인 1887년 5월, 대지를 구입하였다. 그 해 겨울부터 언덕을 깎아 내는 정지 작업을 시작했다.
이때 신자들은 손수 팔을 걷어붙이고 작업에 나섰다. 블랑 주교는 파리 외방 전교회에 보낸 보고서에서 이들의 신앙적 열성을 이렇게 적었다. "남자 교우들은 사흘씩 무보수로 일하러 왔는데 그것도 12월과 1월의 큰 추위를 무릅쓰고 왔습니다. 늙은이 젊은이 할 것 없이 이 일에 놀랄 만한 열성을 쏟았고 그들은 신앙과 만족감에서 추위로 언 손을 녹일 정도로 참아 내는 것이었습니다."
코스트 신부가 1896년 선종하고 그 뒤를 이은 프와넬 신부가 건축을 마무리 지었다. 1898년 5월 29일 성신 강림 대축일에 조선 교구장 뮈텔 주교의 집전으로 축성식을 가졌다.
주교좌 명동대성당이 준공된 후 그 지하 묘역에는 기해 병인박해 순교자들의 유해를 안치했다. 파리 외방 전교회 선교사로 입국한 그 해 1839년 9월 12일 순교한 앵베르 주교와 모방 신부, 샤스탕 신부는 새남터에서 군문효수의 형을 받은 후 한강변 모래밭에 매장됐었다. 순교한 지 약 20일 후 칠팔 명의 신자들이 죽음을 무릅쓰고 세 분의 유해를 거두어 지금의 서강 대학교가 소재한 노고산에 4년간 매장했다. 그 후 유해는 1843년에 삼성산으로 이장됐다가 1901년에 이곳으로 모셔졌다.
대성당 내부 안내
대성전 건물 외관이 장식적 요소가 배제된 순수 고딕 양식인 반면, 성당 내부에는 아치형 복도, 스테인 글라스 등으로 공간의 미를 살렸다. 또한 곳곳의 제대, 성화, 성상 등 종요 예술품은 명동 성당의 종교적 미술적 가치를 더한다.
유리화(스테인드 글라스)
대성당 내 스테인드 글라스에는 성서 내용과 로사리오의 현의를 담아, 글을 모르는 신자들에게 그림으로 교리를 교육하는 데에 사용하였다고 한다. 현재의 유리화는 1982년 고 이남규 화백에 의해 복원되었다. 원래 프랑스 베네딕도회 수사들에 의해 제작된 것으로 추정한다.
지하 성당
현재 명동 지하성당에는 파리외방전교회 소속의 선교사로 기해박해(1839년) 때 새남터에서 순교하고, 1984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시성 된 성 앵베르 범 주교(제2대 조선교구장)와 성 샤스탕 정 신부, 성 모방 나 신부의 유해 일부와 역시 기해박해 때 순교하고 1984년 시성 된 성 김성우 안토니오, 성 최경환 프란치스코 등 다섯 분의 유해가 모셔져 있다. 또한 1866년 병인박해 때 새남터에서 순교한 파리외방전교회의 푸르티에 신부와 무명 순교자 한 분의 유해를 모셨다. 프란치스코 교황 조문 공간이 설치되어 있었다.
루르드의 성모(Our Lady of Lourdes)
1858년 2월 11일부터 프랑스 제국 루르드에서 일어난 성모 발현으로, 성모 마리아가 성녀 베르나데트 수비루(Marie Bernarde Soubirous, 1844년 1월 7일~1879년 4월 16일)에게 총 18번 나타난 발현을 말한다. 14살의 가난한 소녀였던 수비루의 보고에 따르면, 여동생과 친구와 땔감나무를 모으던 중 마을에서 멀리 떨어진 마사비엘 동굴까지 가게 되었는데 그곳에서 '정체불명의 부인'을 만났다고 전해진다.
베르나데트 수비루는 사후 54년이 지난 1933년 교황 비오 11세에 의해 시성 되었으며, 사후 오래도록 전혀 시신이 부패하지 않았다고 한다. 축일은 4월 16일, 한국 가톨릭에서 과거 표기인 '벨라뎃다(베르나데트)'를 세례명으로 쓴다. 많은 가톨릭 신자들은 당시 베르나데트가 성모 마리아를 본 것이라고 믿고 있다. 1862년 교황 비오 9세는 그 지역 주교에게 권한을 부여하여 루르드의 성 마리아를 공경해도 좋다는 허락을 했다.(위치 : 성당 들머리 중간단 좌측)
원죄 없이 잉태되신 성모상
원죄 없이 잉태되신 성모님은 명동성당의 주보성인이다. 1948년 명동대성당 축성 50주년 기념으로 프랑스에서 제작하여 봉헌하였고, 성모상의 하단에는 ‘성모무염시태'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다. (위치 : 명동 성당 대성전 뒷동산)
(조선의 초창기 천주교 뿌리가 몹시 궁금하였습니다. 아래 내용은 명동대성당 홈페이지에서 옮겨 왔습니다. 그 이후 시대의 천주교 상황은 홈페이지를 참조하십시오.)
01. 서울의 신앙공동체와 주교좌 명동본당
17세기 초엽부터 중국으로부터 도입된 한문서학서에 대한 연구는 남인 학자들을 중심으로 영조 말엽까지 150여 년 동안 진행되었다. 그들 중 권철신(權哲身), 정약전(丁若銓), 이벽(李檗) 등 기호(畿湖) 남인학자들에 의해 천주교가 수용되기에 이르렀다.
1777년(정조 元年) 겨울, 천주교 교리에 관한 강학회(講學會)가 열렸다. 그들은 마침내 천주교 서적에서 참된 진리를 깨닫게 되었고, 조석(朝夕)의 기구(祈求), 주일(主日)과 파공(罷工), 금육재(禁肉齋) 등 그들이 천주교에 관하여 알 수 있었던 것을 비밀리에 실천하였다.
1783년 이벽의 친구 이승훈(李承薰)이 동지사행(冬至使行)의 서장관(書狀官)으로 임명된 그의 부친을 따라 북경에 가게 되었다. 그는 북경(北京)에 있는 천주당(天主堂)을 직접 찾아가 서양인 학자들과 상의하며 물어보고, 그들과 교리를 깊이 파고들어 그 종교의 모든 예배 행위를 알아보았다.
1784년 1월 북경 선교사들로부터 교리를 배운 이승훈은 귀국을 앞두고 베드로란 세례명으로 영세를 받았다. 귀국할 때 많은 천주교 서적과 십자가, 상본과 성화 등을 가지고 돌아왔다. 이벽은 이승훈과 함께 이 책들을 통해 교리를 연구 통달하였다.
1784년 9월 이벽은 세례자 요한이란 본명으로 이승훈에게 세례를 받았다. 역관(譯官) 김범우의 집 명례방에서 신앙 집회를 가졌다. 그러나 이 체계적인 절차와 교육 없이 주고받았던 세례를 포함한 성사, 즉 ‘가성직제도(假聖職制度)’는 신자들의 무지로 인한 잘못으로 밝혀져 중단되었다. 그러나 비정상적이었지만 성사가 집전됨으로써 적어도 10 지역에 신자들의 공동체가 형성 유지되었다. 덕분에 훗날 주문모(周文謨, 야고보) 신부가 조선에 입국했을 때, 빠른 시간 내에 교회 조직을 확립했다.
한편 가성직제도가 중지된 이후 조선 천주교회 신도들은 성직자 영입을 추진하게 되었고, 북경교구에서 중국인 주문모 신부를 조선 최초의 선교사로 파견하였다. 그리하여 조선교회는 북경교구 소속의 한 사목구(司牧區)로 관리되었다. 주문모 신부는 박해의 위험을 피해 소수의 공동체(가정 단위)를 전전하면서 성사 집전과 전교 활동을 계속했다. 본당의 조직과 공소와 유사한 형태의 조직이 발전되어 주문모 신부가 입국할 무렵 약 4천 명이던 신자가 몇 해 후에는 1만 명에 이르게 되었다.
신유박해(1801년) 무렵의 서울지역 신앙공동체 구성원은 양인(29.34%)과 중인(21.37%)등의 신분층이 전체 신도의 반 이상을 이루고 있었다. 아전, 의원, 소상인, 수공업자 신도들이 많았다. 가정 중심의 소공동체였기 때문에 가정을 통해 전파된 신앙이 2세대에 전파되면서 교세가 회복되어 나갔다.
1831년 9월 9일, 조선대목구(朝鮮代牧區)가 설정됨으로써 세계 교회의 일원이 되었다. 이는 한 명의 성직자도 없는 상태에서 출발하여 이룩된 기적이었다. 중국의 변방 속국처럼 여겨지고 있던 조선의 존재를 중국으로부터 완전히 분리하여 독립된 국가로 인정받았다. 조선교회를 책임진 파리외방선교회의 협조 아래 조선 교계는 체계적인 발전을 이룰 수 있었다. 1886년 한불조약이 체결될 때까지 여전히 초기 교회 상황과 같이 신자 가정을 이용하여 소규모로 신앙 집회를 하는 형태가 유지되었다.
1838년 말에는, 모방 신부가 조선에 입국하였을 당시 6천여 명이었던 조선의 교우 수는 세 선교사가 입국한 이후 급격히 늘어 9천 명이 되었다. 이 가운데 서울의 교우 수는 1천여 명이었다.
대부분 몇몇 교우 가정에서 모이는 신앙 집회였다. 대표적인 곳은 주교댁으로 이용되었던 정하상의 집과 남명혁․이광렬 등 회장들의 집이었다. 또 프랑스 선교사들이 들어오면서 조선인 사제 양성에도 관심을 기울이게 되어 마카오에 3명의 신학생들이 파견되었다. 김대건 신부와 최양업 신부 등 조선인 사제가 귀국한 후, 한글로 완전하게 번역된 기도문들이 사용될 수 있었다.
서울 지역에서의 천주교신자들의 활동은 대원군(大院君)이 집정하자 조정의 정치적인 상황까지 잘 파악하여 방아책(防俄策)을 대원군에게 직접 적극적으로 건의하기에까지 이르렀다. 서울 지역의 신자들의 의식은 매우 대외적이고 국제적인 활동으로 서양 선박을 통한 성교회의 자유 획득과 통상과 외교적인 문호 개방에 대하여 적극적인 정치의식을 가졌다. 그러나 오히려 서울 신자들의 정치적인 접근 때문에 결국 병인박해(丙寅迫害)를 초래하게 된 일면이 있었다. 결국 조선이 외국에 대해 문호를 개방하게 되면서 신앙의 자유를 얻게 되었다. 그런 의미에서 명례방 공동체는 한국 천주교회의 바탕이 되었고, ‘명동본당’은 한국 천주교회의 바티칸과 같은 의미를 가지게 되었다.
02. 개항기 주교좌 명동본당과 신자들의 역할
1880년대 조선대목구 제7대 교구장 블랑 주교의 계획은 명동(종현) 지역이 주교좌성당과 주교관, 신학교, 일반학교, 고아원, 인쇄소 등을 갖춘 한국 천주교회의 중심지가 되는 것이었다. 특히 조불조약(朝佛條約) 체결 이후 프랑스 선교사들의 국내 거주와 선교활동이 허용되었다. 종현 언덕을 한국 천주교회의 중심지로 만들었다. 지방에서는 박해를 피해 살고 있었던 신자들의 주거지를 중심으로 교우촌을 만들었다.
1866년 시작되어 대원군의 실각이 있었던 1873년까지 계속된 병인박해로 조선에 있던 선교사들은 순교하거나 중국으로 피신하였다. 신자들은 순교하거나 산간벽지로 뿔뿔이 흩어져 간신히 생명을 부지하는 생활을 했다. 중국으로 피신하였던 리델 주교와 동료 선교사들은 재입국을 시도하였고, 마침내 1876년 5월 10일 블랑(Blanc) 신부는 드게뜨(Deguette) 신부와 함께 입국에 성공하여 서울에 도착하였다.
그래서 블랑 신부는 성 안(명동대성당)과 성 밖(중림동 약현성당)에 하나씩의 공소를 일으킬 수 있었다. 신자들은 대략 300명가량 되었으며, 남자들보다는 여성들이 주를 이루었다. 남자 신자들의 경우 대부분이 지게꾼으로 생활하고 있었다. 오랜 박해로 신자들의 처지는 물질적ㆍ영성적인 면에서 모든 것을 잃고 비참한 상태에서 살고 있었다. 이들을 이끌고 교육을 시킬 수 있는 영향력을 지닌 지도자급 신자를 더 이상 찾아볼 수 없었다.
만주에 있는 선교사들에게 소식을 전하려던 신자 파발꾼이 잡히고, 편지가 발각되었다. 리델 주교는 1878년 1월 28일 체포되었다. 6월 5일 감옥에서 풀려나 7월 12일 중국으로 추방되었다. 그동안 가꾸어 왔던 조선대목구의 공동체들이 완전히 파괴되었다.
03. 명동 주교좌본당
리델 주교는 서신을 통하여 1878년 9월경 블랑 신부를 부주교로 임명하였다. 따라서 이제 블랑 부주교는 교구장 리델 주교의 공석으로 조선대목구에서 실질적으로 선교정책을 세우고 동료 선교사들을 이끌어 나가야 하는 책임을 졌다. 그의 선교정책은 서울보다는 지방의 주요한 공동체들을 먼저 성장시킨다는 방법을 취했다.
서울의 주요 신자들의 활동은 멈추지 않았다. 언제라도 성직자들이 입국하면 재건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나름대로의 조직을 갖추고 유지했다. 교회 재건의 방법은 서울의 두 공소를 일으켜 세우고, 교회의 창립지(創立地) 명례방 주변을 떠나지 않는 것이었다. 1881년 황해지역에서 올라온 뮈텔 신부가 1882년 4월 블랑 주교를 위해 마련하였던 필동의 주교관과 더불어 학교 개설을 위해 구입한 큰 가옥이 있었는데 이 학교를 위해 매입한 집이 명례방 근처에 있었고, 이 학교가 기초가 되어 오늘날의 명동 주교좌본당 구역을 이루게 되었다. 1884년 9월 한한학교(漢韓學校)라는 이름과 함께 3개 학급으로 교육을 시작하였고, 학교 개원을 하자마자 블랑 주교는 점차 학교 주변의 대지와 가옥들을 구입하여 확장시켰다.
오늘날의 명동 주교좌성당 건립을 목표로 먼저 학교를 세울 집을 매입하고, 이 학교 인근 지역의 가옥과 대지를 구입하면서 기반을 잡아 나갔다. 이 학교를 중심으로 인근의 토지와 가옥들을 매입한 후 인쇄소와 주교관을 세우고, 1885년 3월 15일 곤당골에 설립하였던 고아원을 이곳으로 모아 오늘날의 명동 주교좌성당 구역을 형성하게 되었다. 프랑스 선교사들도 이 지역을 교회의 중심으로 간주하고 있었다.
블랑 주교가 작성한 1882년부터 1883년까지의 교세통계표에 나오는 성모무염시태(성모의 원죄 없으신 잉태) 지역이 바로 그 지역이다. 따라서 블랑 주교는 이미 명동본당 창설을 염두에 두고 뮈텔 신부를 파견하여 주교좌본당을 창설하기에 앞서 필요한 제반 준비를 갖추도록 하였다. 명동 주교좌본당의 신자들은 병인박해 이후에 국내에서 성직자 영입에 깊이 관여하고, 성직자들이 입국하였을 때에는 교회 재건에 중심적 인물로서 지방 공소와 신자들을 찾아내는데 주요한 역할을 수행하였다. 그리고 1878년 리델 주교의 체포ㆍ추방 이후 블랑 주교가 선택하였던 지방 공소 부흥 정책이 실행될 때 선교사와 선교사들 사이의 연락과 중국과의 연락 그리고 공소와 공소를 연결하는 고리 역할을 충실히 이행하였다. 따라서 개항기 명동 주교좌본당은 조선대목구 교회의 중심이 되었다. 전국의 교회 조직을 잇는 동맥과 같은 역할을 수행하였다.
<참고 자료>
-. 명동대성당( http://www.mdsd.or.kr/ ) 홈페이지
-. 명동대성당 팸플릿
-. 다음 백과사전
글이 길어져 '수유리 4.19 민주성지'는 다음 편에 보고 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