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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준영 Jul 23. 2020

그해 여름의 상처

-80년 해직기자의 가족 이야기


부산 남포동 부영극장



처음 그녀를 만난 건 그가 고등학생 때였다.


부산의 한 글쓰기 모임에서 만난 두 사람은 동네에서 알고 지내는 오빠, 동생 사이였다. 글 쓰는 재능이 남달랐던 그는 전국 백일장 대회에서 여러 차례 상을 받았다. 그녀가 사회를 보는 모임에서 그는 자신이 수상한 작품을 발표하기도 했다. 그들은 서로에게 이끌렸지만 수줍은 마음을 감추고 학생의 삶에 충실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두 사람은 각각 대학에 진학했다. 그는 신문방송학을 공부했고 그녀는 국문학도가 됐다. 그는 군에 입대해 베트남으로 파병을 떠났다. 그곳에서 전쟁의 참혹한 실상과 죽어가는 희생자의 고통을 목격했다.  대학을 졸업한 그는 부산의 한 방송사 기자가 됐고 그녀는 초등학교 국어교사로 일했다. 어느 날 라디오에서 고속도로 교통 상황을 중계하던 그의 목소리를 우연히 그녀가 들었다. 10년 전 그녀 앞에서 시를 낭송하던 까까머리 남학생의 목소리를 그녀는 여전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것을 계기로 두 사람은 10년 만에 재회했다. 성인이 된 두 남녀는 더 이상 서로에 대한 호감을 숨기지 않았다. 해운대 바닷가를 거닐며 처음 손잡았고 남포동 부영극장에서 영화를 보며 처음 입 맞췄다. 가진 것 하나 없었지만 서로에게 부족한 것 하나 없었다. 두 사람은 가족과 친구들의 축복 속에 부부의 연을 맺었다. 머지않아 그를 닮은 예쁜 딸도 낳았다. 그는 하루하루가 행복했다. 사랑하는 그녀와 세상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딸이 있기에 더 바랄 것이 없었다.



부산상고 재학시절 그(가운데 사진 기준 왼쪽 두번째)와 친구들



부산에서는 대학생들이 캠퍼스 밖 거리로 나와 정치 탄압 중단을 외쳤다.


그는 학생들의 말에 귀 기울였고 그가 보고 들은 사실을 라디오를 통해 세상에 알렸다. 군인들은 학생들을 잡아가기 시작했다. 며칠 뒤 대통령 서거 소식이 온 나라를 어지럽게 흔들었다. 급기야 군인들은 거리를 점령했다. 전국 곳곳에서 군인들의 정치에 항거하는 시민들의 외침이 터져 나왔다. 그는 그들의 순수한 메아리를 자신의 글과 말을 빌려 대신 전했다. 군인들은 그가 일하는 곳에도 들이닥쳤다. 그와 그의 동료들은 그들의 따가운 감시를 받아야 했다. 언론사는 하나, 둘씩 줄어들었다. 그는 물러서지 않았다. 날씨를 제외한 기사 원고가 모두 빨간 줄로 난도질당한 것을 본 그는 참을 수 없었다. 영남 지역 라디오 뉴스 생방송에서 검열되지 않은 내용을 보도하며 고의로 방송 사고를 저질렀다. 그가 뉴스를 마치고 부스에서 나왔을 땐 검은 정장을 입은 사내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그들에게 이끌려 어디인지 모를 산속 깊은 곳으로 향했다. 차갑고 어두운 그곳에서 그들은 그에게 권력의 하수인 노릇을 요구했지만 그는 당당히 거부했다. 그는 멈추지 않았다. 1980년 5월 2일, 부산진 경찰서를 출입하던 예닐곱 명의 전국 언론사 기자들과 함께 언론 자유를 위한 결의문을 발표했다. 권력에 굴복했던 과거를 참회하며 더 이상 무릎 꿇지 않겠다는 양심선언이었다. 그는 차갑고 어두운 그곳으로 또다시 끌려갔다. 억압하면 할수록 그는 더더욱 목소리를 높였다. 그해 8월, 그는 결국 기자 신분증을 빼앗겼다. 석 달 전, 그와 함께 결의문을 발표했던 동료들도 같은 신세였다. 그는 상실감과 좌괴감에 끝이 보이지 않는 나락으로 추락했다. 실의에 빠진 그를 그녀가 위로했다. 그는 정신 차렸다. 아내와 두 살배기 어린 딸을 위해 고개 숙여 비관하던 자신을 일으켜 세웠다. 그는 한 건설회사에 취업했다. 하지만 일을 시작한 지 한 달도 채 되지 않아 쫓겨났다. 다음에 들어간 회사도 마찬가지였다. 해고 사유조차 들을 수 없었다. 그는 또다시 좌절했다. 그 사이 그의 아버지가 병환으로 세상을 떠났다. 장남이었던 그는 슬퍼하고 괴로워했다. 이듬해 그의 아들이 태어났다. 아이는 절망에 빠진 그와 그녀에게 축복 같은 존재였다. 생활고에 빚은 점점 늘어났고 급기야 빚쟁이에게 시달리는 상황까지 몰렸다. 그와 그녀는 집에 있는 물건들을 하나씩 내다 팔아 당장의 생계를 꾸려나갔다. 5년 동안 여섯 번이나 집을 옮겨 다녀야 했다. 일곱 번째 집으로 이사하던 날, 부부가 끝까지 지키고자 했던 어린 딸의 피아노마저 끝내 처분해야 했다. 낯선 남자들이 신발도 벗지 않고 집 안으로 들어왔다. 그들이 피아노를 들고 밖으로 나가려고 하자 어린 딸은 그들의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울먹였다. 그녀는 딸을 달래기 위해 거짓말했다. 피아노가 고장 나서 고치러 가는 거라고. 다 고치고 나면 아저씨들이 피아노를 다시 가져올 거라며 딸을 위로했다.      



부마항쟁 당시 부산 시내 도로를 점령한 탱크와 장갑차



취업이 가로막힌 그를 대신해 그녀가 나섰다.


피아노 교습학원을 운영하며 모은 돈으로 조그마한 크리스털 제품 가게를 꾸렸다. 장사가 제법 잘됐다. 빚도 조금씩 갚아나갔다. 그런데 어느 날 회사가 부도나면서 그녀는 부도어음을 고스란히 떠안게 됐다. 절망적인 순간이었다. 경제적으로 극한의 상황까지 몰리자 그와 그녀는 극단적인 선택까지 생각했다. 그해 12월 성탄절을 하루 앞두고 부부는 삶의 마지막 순간을 떠올리며 어린 딸과 갓난아기인 아들을 안고 부산의 한 교회를 찾았다. 그곳에서 우연히 한 목사의 설교를 들었다. 어떤 어려움과 시련이 찾아오더라도 가족의 힘으로 모든 걸 극복할 수 있다는 희망의 메시지였다. 그는 그녀와 두 아이를 부둥켜안고 눈물을 토해냈다. 가슴이 찢어지는 고통 속에 생각조차 하기 싫은 마음을 품었던 자신을 반성했다. 그는 가족을 위해 어떻게든 살아야겠다는 그날의 각오를 뜨거운 눈물로 다졌다.     



성탄절 설교를 들었던 부산 수영로교회



이듬해 딸이 다니던 유치원에서 알게 된 한 학부형의 소개로 그는 고등검찰청 소속의 한 검사를 만났다.


그는 검사로부터 보안사가 작성한 80년 해직기자 취업제한 명단에 자신의 이름이 올라가 있다는 얘기를 듣게 됐다. 해직 이후 입사했던 모든 회사에서 해고당해야 했던 이유를 그제야 알게 됐다. 그는 검사의 도움으로 5년 만에 그가 일했던 곳으로 돌아왔다. 기자였던 그가 복직하며 발령받은 부서는 보도국이 아닌 출판국이었다. 매일 아침마다 무거운 어린이 잡지책 수십 권을 양손에 들고 전국 곳곳을 돌아다니며 소개하고 팔아야 했다. 두 아이의 사랑스러운 얼굴을 떠올리며 그는 사람들의 괄시와 멸시를 이겨냈다. 그는 회사 노보에 <그해 여름의 상처>란 제목으로 1980년 기자들이 겪은 해직 사태의 아픔을 그의 솔직한 언어로 밝혔다. 그 후 2년 뒤, 그는 다시 마이크를 잡고 카메라 앞에 섰다. 그의 어린 아들은 TV 속 아빠의 얼굴을 보며 화면에 입을 맞췄다.



복직한 뒤 뉴스를 진행하는 TV 속 그의 모습



어린 아들은 자라서 그와 같은 방송 기자가 됐다.


2013년 여름, 촬영기자와 단둘이 미국으로 건너가 전직 대통령의 해외 은닉 자산을 추적했다. 전직 대통령의 아들과 그의 사돈이 운영하는 와인 양조장을 현장 취재했다. 또 그들이 매물로 내놓은 저택에 들러 부동산 구매 내역과 관련한 비리 의혹을 파헤쳤다. 그로부터 한 달 뒤, 검찰청에 출석한 전직 대통령의 장남은 고개 숙여 국민들에게 사과했다. 아들은 그 모습을 동료 기자들과 텔레비전 화면으로 지켜봤다. 그날 저녁, 아들은 한통의 메시지를 받았다.  

고마워. 우리 아들.



전 전 대통령의 삼남과 그의 장인이 소유한 나파밸리 포도밭과 고급 저택 취재 장면



그는 59세의 나이로 은퇴했다. 회사를 떠나면서 동료들에게 마지막 클로징 멘트를 남겼다.


“저는 참 행복한 사람입니다. 한 번 들어왔다 나가기도 힘든 이 회사에 세 번 입사했고 두 번 퇴사했습니다. 74년에 처음 들어와 80년에 해직됐습니다. 그리고 5년 뒤 85년에 다시 입사했습니다. 99년에 간부로 퇴직하고 그 해 임원으로 입사했습니다. 그리고 오늘 세 번째 퇴사하는 날입니다. 한 회사에 세 번씩이나 들어오고 나간 사람은 흔치 않을 겁니다. 저는 이 회사를 사랑했습니다. 기자가 되겠다는 제 청춘의 꿈을 이룬 곳이며 저와 제 가족이 행복한 가정을 이룰 수 있도록 해 준 곳입니다. 먼저 회사를 떠나신 여러 선배들, 또 이 자리에 계신 여러분들과 30년의 세월을 함께 할 수 있어서 즐거웠습니다. 그 시간과 추억 잊지 않고 가슴속에 간직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어머니와 아버지


나는 그녀와 그의 삶으로부터 내가 가야 할 길을 발견했다. 그것은 운명과도 같았다. 언젠가 세상에 그들의 이야기를 전하는 것을 내게 주어진 미션이라 생각했다. 두 사람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감동적인 스토리를 내게 선물했다. 이 이야기는 내 존재의 이유이자 삶의 뿌리다. 아무리 지치고 힘들어도 결코 품위를 잃지 않고 이 세상을 살아갈 수 있는 나의 힘이자 가족을 지키기 위해 걸어온, 아버지와 어머니의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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