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혹과 지옥의 협주곡
영화 <곡성>이 화제다. 추격자, 황해에 이은 나홍진 감독의 세 번째 작품이자, 칸의 비경쟁부문에 초정되었고, 투자 전액을 20세기폭스사에서 받은, 기대작. 실상을 까보니 확실히 대단한 영화였다. 유명한 평론가인 이동진은 별 5개 만점의 평을 내놨고, 평단에서의 평가도 굉장하다. 하지만 관객의 반응은 엇갈리고 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나도 이 영화에 별 5개 만점을 주고 싶다. 겉으로는 팽팽한 긴장감의 공포, 호러, 스릴러 영화 같지만, 사실상 속을 뜯어보면 정말 뜻하는 바가 확실한, 메시지가 있는 영화임을 알 수 있다.
주의 : 아래부터는 다수의 스포일러를 가지고 있습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영화는 "종교"나 "믿음"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 종교 중에서도 특히나 기독교를 말하고 있다. 그리고 오히려 신에 대한 존재 의미에 대해서 다시 생각하게 한다. 영화 도입부에는 직접 성경의 한 구절을 인용하면서 시작한다. 그 구절이 이 영화를 꿰뚫는 하나의 주제이다. "나를 의심하지 말라"라는 이야기로 시작한다. 하지만 마지막은 같은 말을 악마가 읊조린다. 이 말은 혹여나 예수가 악마일지도, 혹은 예수의 말을 믿으면 안 된다는 기독교를 비판하는 듯한 주제로도 발전될 수 있다. 기독교 신자인 감독이 이토록 신성모독으로 보일 수도 있는 장면을 말하는 것은, 굉장히 역설적이게 다가온다.
일단 겉으로 보이는 이야기를 풀어보자. 곡성에서 의문의 사건들이 생긴다. 사람들이 두드러기가 나서 죽거나, 혹은 서로를 죽인다. 길게 쓰자면 엄청 길지만, 가장 핵심이 되는 사건들은. 사람들이 두드러기가 나고, 그다음에 미쳐서 사람을 죽이는 것이다. 이는 영화 내내 적용된다.
하지만 이걸 조금만 더 상세하게 들여다보면, 사건의 맥락이 나온다. 외지인과 접촉하거나, 의심한 사람. 그 미끼를 물어버린 사람들은, 두드러기가 난다. 그리고 그 두드러기에 걸린 사람은 대부분 죽는다. 곽도원(이하 종구)이 병원에서 목격했던 스스로 죽는 두드러기 병자가 대표적이다. 하지만 그 두드러기를 치료하고자 굿판을 벌인 사람들은 가족 전체가 몰살당한다. 악마의 속삭임으로 약해진 사람들에게 참사를 일으키는 건, 어찌 보면 굿판이다. 아이러닉 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는 결국에 그 굿판은 치료의 굿이 아닌, 사태를 더 키우는 것이었다.
한마디로 악마의 꼬임에 넘어가면 죽는다. 하지만 미끼를 물면 더 큰 죽음을 부른다. 하지만 그 안에서 정말로 종교라는 것이나, 믿음이라는 것. 그리고 신에 대해서도 인간으로서 당연한 의문점들을 이 영화는 이야기하고 있다.
천우희(이하 무명)는 신의 대리인이다. 표현되는 형태는 지박령이거나, 토속신앙의 그것으로 보이지만, 사실 거의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그녀는 사실 약간 미친 사람처럼 묘사되는데, 그마저도 계속해서 경고를 날리는 행동(돌팔매질)을 하면서 지속적으로 종구에게 경고한다. 하지만 종구는 잘 알아듣지 못한다. 돌을 날리면서 그녀가 계속해서 가까이 다가오는 것은, 그만큼 도와주려고 하는 것을 묘사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것을 믿은 자는 현재 등장인물 사이엔 없었다. 내내 흰옷을 입은 순수한 그녀를 아무도 믿지 못하는 것은, 그만큼 인간이 올바른 믿음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일본인인 외지인은 악마다. 첫 장면에서 미끼를 낚싯대에 걸어 낚시를 하듯, 그는 순수한 악의 상징이다. 마지막에 정말로 악마가 되어서 나타난 그의 모습이 그의 본모습이다. 처음 장면에서부터 대놓고 낚시를 하고, 끊임없이 저주의 의식을 행하면서 다니는 그야말로 순수한 '악'의 모습이다. 하지만 막바지에 본모습을 보여줄 때 성흔을 보여주고, 성경구절로 신성을 모독한 것은, 그렇게 종교가 인간사회에서 어떤 한계적인 모습인지를 잘 보여준다. 악을 행하는 악마에게 유린당하는 신성함. 그럼에도 제대로 된 힘을 펼치지 못하는 신. 왜 이렇게 된 것인지 영화는 이야기하고 있으며, 그것의 물음을 던지고 있다.
황정민(이하 일광)이 악마의 편이라는 상징들은 영화 내내 곳곳에서 나타난다. 첫 등장 씬에서 일광이 처음 차를 몰고 곡성 땅으로 갈 때를 생각해보면, 좌측으로 운전하고 있다. 우리나라는 우측으로 운전하는 나라이다. 이는 일광이 일본인처럼, 곡성 땅 사람들과는 다르다는 걸 의미한다. 산 것을 먹는 빨간 눈의 귀신과 같은 일본 훈도시를 입고 있는 것도 특징. 그리고 외지인과 일광이 굿판을 벌일 때의 굿의 방법 등을 보면 놀랍도록 유사하다. 닭을 이용한다던지, 외지인은 염소의 머리를. 일광은 산 염소를 제물로 바치는, 악마의 의식과 유사 점들이 있다. 특히 결정적으로 마지막에 사진을 찍는 행위야 말로, 결정적이다. 관객들은 대부분 마지막에 가서 뒤통수를 맞은 것 같은 느낌을 받지만, 사실은 앞의 요소요소에 그가 악마의 편임을 말하고 있다. 그는 또 악마의 속삭임에 넘어간 사람들을 더 큰 악의 구렁텅이로 밀어 넣는 역할을 한다. 그 역할을 딱 한번 포기하려고 하는데, 그때 바로 나방들이 나타나 다시 한번 악의 대리인으로의 정체성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한 명 더 중요한 인물이 있다. 바로 부제를 맡고 있는 '이삼'이다. 그는 엉성한 사제이다. 사제는 원래 신과 인간의 다리 역할을 한다. 하지만 그 역할에 충실하지 못한다. 그는 이상하게도 악마와 인간의 다리 역할을 하게 된다. 그걸 상징하는 것이 바로 통역이다. 종구가 악마와 이야기할 때에는 한 번도 이삼을 거치지 않은 적이 없다. 특히 이삼은 올바른 대리인이라고 할 수 있는 무명와는 단 한 씬에서도 같이 담긴 적 조차 없다. 이는 결국 교회라는 것이 제대로 신의 대리를 수행하고 있지 못하다는 이야기일 수도 있다. 아니면 신의 대리를 하기엔 인간은 한없이 나약하며, 악마 앞에서 말하는 '주여'의 주체가 자신의 믿는 사람인지. 아님 눈 앞의 악마에 현혹당해서 하는 말인지 조차 분간할 수 없는 상황을 의미한다.
주인공인 종구는 힘없는 인간이다. 그는 기댈 곳 없는 우리 자신의 절망적인 모습을 아주 그대로 보여준다. 그는 경찰임과 동시에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하는 경찰이다. 이 영화 안에서 인간은 철저하게 무능력하다. 뉴스에서는 독버섯이라는 이야기로 전혀 사건을 파악하지 못하며, 의사는 큰 병원에 가보라고 하면서 환자가 죽어나가는 상황에 무기력하고, 신의 대리인이지만 인간인 신부와 이삼은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한다. 결국 그가 의지할 것은 혼자서 악마를 물리치는 것이나, 그를 물리쳐줄 사람을 찾는 것이었지만, 안타깝게도 악마의 대리인에게 그것은 짓밟히고 만다. 그리고 정작 본인이 믿어야 할 대상을 믿지 못하고,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한다. 엔딩 장면에서 그가 하는 마지막 말도 결국에 자기 자신이 딸을 지킨다는 이야기다. 결국 인간으로서 아무것도 믿지 못한 상태에서 죽음을 맞이하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이 영화는 종교에 관련한 이야기다. 하지만 이는 결코 종교의 긍정적인 해석을 말하려는 것이 아닌 걸로 보인다. 그것은 악마로 모습을 바꾸기 전에 성흔을 보여준 것으로 말할 수 있다. 구원을 바라는 것에 대해 신이 있다면 왜 인간의 재앙을 막아내지 못하냐고 이 영화는 오히려 신에게 묻고 있다. 인간사회의 종교에 대한 이야기는 신부와 이삼의 무능력에서, 악마의 입에서 성경의 말이 나오는 부분에서는 오히려 종교 자체에 회의를. 무명이 막아내지 못한 사건들에서는 신은 정말 우리에게 관심은 있는 것인지에 대한 물음을 말하고 있다. 하나님이 결국에 무조건적으로 인간을 위하는 것은 아니라는 걸 역설적으로 말하고 있다.
영화에서 가장 강조한 한마디는 "절대 현혹되지 마라"이다. 이 말은 이 영화의 가장 큰 키워드이며, 장르적으로도 계속해서 맥거핀을 만들어, 사람들을 현혹시킨다. 사실 영화는 매우 간단한 사실을 그대로 계속 말해줬지만 관객=종구=인간은 그것을 믿지 않는다. 가장 대표적인 것은 일광이 벌였던, 살을 날리는 굿판에서 종구가 그 굿판을 멈췄을 때에 들었을 관객들의 마음이다. 감독은 이 장면에서 눈에 보이는 함정을 만들었는데, 이는 바로 일광이 바로 외지인을 죽이는 듯한 편집을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동시에 일어난 것일 뿐 그것 둘은 연관관계가 없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그 굿은 딸인 효진이를 결국에 악마에 홀리게 만들려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일광과 외지인의 의식이 놀랍도록 비슷하며, 특히 대장군을 정으로 내리칠 때에 효진의 반응을 보면 극명하게 알 수 있다.
하지만 관객들은 그 굿이 효진을 낫게 해주리라 믿었으며, 그리고 그 행위가 외지인을 거의 죽음에 몰아갔다고 현혹되기에 이른다. 하지만 그것은 사실이 아니었다. 무명이 마지막까지 가지 말라며 손길을 내미는 것에 대해 관객들은 그것을 정말 믿을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해 끊임없이 의심했을 것이다. 이처럼 영화는 "믿어야 할 것"과 "믿지 말아야 할 것"을 계속해서 교묘하게 섞는다. 누가 누구의 편인지 사실은 대놓고 알려주고 있지만, 그것을 곧장 까발리지는 않는다.
이 말을 워딩 그대로 하는 등장인물은 아이러닉 하게도 일광이다. 나약한 인간은 그 말에 넘어갔다. 인간은 그만한 판단능력을 가지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인간 중에 바르게 말하는 사람 또한 한 사람도 없다. 의사, 경찰, 신부, 가족. 모두가 말이다. 한마디로 인간은 현혹당하기 매우 쉬운 나약한 존재라는 것을 영화는 내내 이야기한다.
여태까지의 이야기로는 자세히 설명되지 않는 장면이 있다. 바로 박춘배의 좀비 화이다. 영화를 처음 봤을 때에는 이 장면은 참 쓸데없는 장면으로 보였다. 하지만 다시 보면 다르다. 일단 일본인의 굿이 박춘배를 향했다는 것에 주목하자. 그리고 무명은 바로 그것을 방해하였고, 그것을 감시하는 장면도 나오게 된다. 박춘배는 일광처럼 자신의 대리인으로 악을 행할 사람으로 점찍은 사람일 것이다. 두드러기로 죽은 사람을 다시 살려내는 것. 다시 태어나는 것. 아마 그 의식이 성공적으로 마무리되었다면, 박춘배는 일광처럼 악의 종복이 되어서 활동할 그의 대리인이었을 것이다. 아니면 늙은 인간의 육체를 버리고 다른 몸으로 갈아탈만한 또 다른 악마의 육체였을지도 모른다. 그도 그럴 것이 무명이 입고 있던 박춘배의 옷이 이미 그때 박춘배는 죽었다고 가정했을 때, 그 안에서 낯과 밤이 뒤바뀐지 3일 뒤에 그 의식은 치러진다. 여러 가지로 종교적인 의미를 지닌다. 부활에도 적절하다.
하지만 그것은 무명에 의해 중간에 좌절된다. 그래서 죽었던 박춘배를 다시 살리는 데에 성공했지만, 완전히 살리는 데에는 실패한다. 그래서 흡사 보기엔 좀비처럼 아무런 생각 없이 맹목적으로 보이지만, 결국에 원래 두드러기 증상자처럼 최후를 맞이한다. 그래서 악마는 슬퍼한다. 그만큼 공을 들였던 것에 실패하기도 했고, 또한 그것이 자신의 분신, 혹은 갈아탈 무엇이었다면, 마치 자기 자신이 죽은 것처럼 슬프다는 것은 그만큼 자연스러운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그 대화도 역시나 종교적인 색채가 엄청나게 강하게 나온다. 막바지 무명의 말투에서 "니딸의애비가" 라는 말투에서 성경의 구절처럼 읽힌다. 그리고 세 번의 닭의 울음소리는 배드로의 닭이 울기전에 예수를 세 번 부정한 것과 비슷하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종구의 손을 잡은 것은, 처음 누가복음에서 처럼 뼈와 살이 있음을 보여주는 매우 중요한 장면이다. 하지만 종구는 그것을 뿌리친다.
그리고 왜 문제가 이렇게 된 것에 대한 책임을 종구에게 있다고 말한다. "남을 의심하고, 사람을 죽이고"라는 말. 그리고 종구의 대답은 "딸이 아프니 그렇지" 이것은 신에 대한 믿음을 시련으로 시험할 때에 그것을 제대로 넘기지 못한 다는 것을 의미한다. 결국 경찰인 종구는 악마이긴 하지만 누군가를 의심 혹은 살해함으로 그것을 풀려했던 것이고, 다른 악마의 대리인에게 딸을 맡기기도 했다. 이는 잘못된 것이라는 것을 무명을 통해서 말하고 있다.
그리고 금어초는 결국에 한 인간의 올바른 신앙, 혹은 믿음. 아니면 순수하게 의심이 없는 악마가 깃들지 않은 상태를 의미하지만, 그 상황에 결국 금어초는 말라 비틀어지고, 무명은 절규한다. 이는 결국에 서로의 믿음이 없음을 의미하기도 하며, 또한 악마를 막아내지 못하였음을 말한다.
하지만 만약에 종구가 말을 듣고 가지 않았더라도, 아마 가족의 참사는 대부분 그대로 벌어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는 영화 전반에 깔려있는, 이미 종구는 죄를 지었고, 신은 생각보다는 우리를 보호하려는 의지가 없는 신을 그대로 보여주기 때문이다.
처음 영화를 보면 일광이 외지인에게 살을 날린다고 하지만, 결국에는 그것이 아니라, 효진을 더욱 악의 구렁텅이로 밀어넣는다는 점을 여러곳에서 나타내고 있다. 악마의 의식과 비슷한 굿의 방법. 특히나 대장군을 정으로 내려칠 때에는 그 저주는 명백하게 효진을 향하고 있다. 위에 언급한 것처럼 외지인의 굿은 박춘배를 향한 일종의 의식처럼 행해지는 것이다.
하지만 감독은 이 두개의 영상을 서로를 향한 대결처럼 보이도록 관객들을 낚는데 성공한다. 특히 의도적으로 무명의 장면을 많은 부분 덜어냄으로써, 다자구도가 아닌 양자간의 대결구도처럼 보이게 한 것이다. 모르긴 몰라도 그 굿이 종구의 방해없이 치뤄졌다면, 영화의 결말은 그 굿의 다음날 바로 참사라는 결론으로 이뤄졌을 것이다.
이 영화는 기본적으로 기독교를 기반으로 한 종교적인 영화라는 게 나의 생각이다. 하지만 그로 설명할 수 없는 수많은 사건들이 나오는데, 그런 민속, 토속적인 색채는 감독이 조금 더 다른 무엇을 섞었다고 밖엔 생각할 수 없다. 토속신앙의 대표 격인 굿판에서 염소의 사용이라던가. 그것의 정수라 할 수 있는 무명도 결국에 하는 말과 행동은 전부 성경과 유사한 형태를 띤다.
결국 영화를 두 번 보게 되었는데, 흥미로운 점은 영화를 처음 볼 때와 두 번째 볼 때의 느낌이 굉장히 판이하게 다르다는 것이다. 첫 번째로 영화를 볼 때에는 사실 누구를 믿어야 할지. 과연 종구네 가족은 어떻게 될지에 대해서 집중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결국 굿판에 대한 감독의 의도적인 편집에 당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리고 극의 후반부에서 여태까지의 기대와 전망을 뒤엎어버리면서, 앞의 내용에 대한 재정립을 요구한다.
나홍진 감독은 곡성을 보고 '코미디'영화라고 평했다고 한다. 영화를 보다 보면 생각보다 영화 전체적으로 웃음이 많이 나는 장면들이 있다. 물론 그런 웃음을 주는 의미의 코미디만 있는 것은 아니다. 애초에 코미디는 풍자에 가까운데, 인간 사회 하나하나를 풍자하고 있기도 하기 때문이다.
처음 동네에서 사람이 죽었다는데도, 밥을 먹고 가라는 장모님, 현장에서도 연출되는 경찰의 무능력. 귀신의 홀린 아이를 그대로 두고 나오는 아내와 장모. 악마의 속삭임에 그대로 넘어가 온 집안을 참극으로 이끈 수많은 가족들. 원인은 모른 체 독버섯 이야기만 쓰고 방송하는 신문과 방송. 악마를 퇴치하는 길에 농기구와 족발을 챙기는 순수할 정도로 무능력한 인간의 친구들.
의지하려는 곳인 병원과 교회는 그들에게 도움을 전혀 주지 못한다. 결국에 이 영화는 인간들의 현모습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전작 추격자에서 보여준, '슈퍼집 아줌마'처럼 행동하는 모든 등장인물들은, 어찌 보면 스토리의 엉성함 보다는. 인간의 이런 바보스러움을 풍자한 감독의 의도라 볼 수 있다.
그중 가장 바보스러운 것은, 신을 대리해야 할 사제가 악마와 인간을 이어주는 다리가 되며, 특히나 마지막에 악마의 모습에 두려움을 느끼는 사제를 통해서 극대화된다.
두 번째 볼 때에는 영화가 말하는 스릴러적 성격, 공포, 오컬트 같은 것보다 그런 코미디 적인 부분과 종교적인 색체가 눈에 들어온다. 처음 볼 때와 달리 보는 내내 생각보다 무섭지 않은데, 공포영화로의 지점들을 의도적으로 제거한 느낌이 든다. 사람을 놀라게 하는 것에 집중하기 보다는. 본연의 주제를 곳곳에 배치함이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영화의 내용적인 측면만을 봐도 이렇게 쓸 이야기가 많다. 그만큼 배우들의 연기력. 특히 글 중에 언급되지는 않았지만, 악마에 씌인 효진역 김환희의 연기력은 여러 가지 생각을 잊게 만들 만큼 충격적이고 압도적이었다. 굿판을 벌이는 황정민의 연기도 참으로 볼만했다. 쿠니무라 준의 악마 연기야 말로, 이 영화에서 그려내는 지옥에 대한 상상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했다. 곽도원은 원래 대부분 힘 있는 역할을 많이 해왔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는 시종일관 무기력하게 그려지는데, 그 부분에 대해서는 영화 괴물에서의 송강호가 떠올랐다.
영화 <곡성>의 장르는 내 마음대로 정의하자면 "현혹물"이다. 무엇에 현혹당하는지 모르는 상태로 관객을 지속적으로 현혹시키고 있고, 극의 내용도 현혹이 주된 내용이다. 이렇게 현혹과 지옥도를 협주하고, 많은 장르적 결합을 팽팽하게 풀어낸 것은, 감독의 역량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이 영화를 볼 수 있어 참 좋았다.
영화내에 삽입 된 영화의 스틸컷은 출처는 모두 '다음 영화'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