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발 응답하라 성덕선.
'응답하라'시리즈는 내가 빠지지 않고 챙겨본 드라마 시리즈물이다. 분명 그만의 매력이 있었고, 성공할만 했었던 나름의 이유들이 존재했다. 하지만 결론부터 얘기하자면, 이번 응답하라 1988(이하 응팔)은 역대 최악의 시리즈라 말하고 싶다. 다른 이견이 있을지 모르지만, 적어도 로맨스 부분에서는 말이다. 여러가지 이유가 있지만 대표적으로 세가지만 말해보고 싶다. 미리 밝혀두지만 아래의 감상평은 개인적인 견해이며, 곳곳에 오류가 숨어있을 가능성 또한 배제하지 않겠다. 가볍게 읽어주길.
1. 싱겁고 갈등 없는 삼각관계
클리셰일지도 모르지만 로맨스에서의 삼각관계는 각자의 시선에서 진행되던 사랑(혹은 짝사랑)이 결국에 선택의 기로에 서게되는 갈등에서 시청자에게 재미를 주는 경우가 많다. 지난 응답하라 시리즈는 이 공식을 꾸준하게 잘 따라왔다. 여주를 사이에둔 우정(혹은 혈연)으로도 얽힌 상대에게서 여주를 독점하고 싶다는 바램을 서로를 향해 있는 그대로 보여주며, 시청자들을 그 상황속으로 끌고 들어간다. '응사'에서의 '끝날 때까지. 끝난게 아니다' 라는 식이 바로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그러면 그 구도에 감정이입한 시청자들도 나름의 응원하는 상대를 정하게되며, 누구를 선택하는지. 혹은 누가 선택받을만 한지를 생각하며, 드리마에서의 로맨스는 절정을 이룬다. 하지만 응팔에서는 이런 절정이 쏙 빠져있다.
우정으로 얽힌 두 유력 남편후보는 급기야 극 중후반부까지 서로에게 자신의 사랑을 양보하는 말도 안되는 행동을 보이고, 설상가상으로 우정 때문에 본인의 사랑을 포기할 수도 있다는 복선을 쉼없이 내비친다. 거기에 더더욱 말도 안되는 것은 그러는 과정을 표면적으로 잘 보여주지도 않는다. (절친의 지갑에 있던 그녀의 사진 한장으로. 나참.) 그러는 사이에 여주의 마음은 갈곳을 잃었고, 나 역시 드라마를 보는 재미를 잃었다.
혹자들은 이렇게 말할지 모른다. "말하지 않아도 다 아는거 아니겠니?" 천만에. 말하지 않으면 모른다. 둘 사이의 여러 일을 세심하게 잘 들여다보고, 여러 물건들의 복선. 혹은 메타포를 분석하며, 즐겼을지 모르겠지만. 나도 드라마를 씹고 뜯고 맛보고 즐기는 사람으로, 장면 하나하나에 무슨의미일까를 생각하는 걸 즐겨하는 시청자에게 그것이 전해지지 않은 거라면, 그건 확실히 전개 자체에 문제가 있다고밖엔 보여지지 않는다.
끝나기 3화전에는 서로의 사랑과 우정을 가슴 깊이 묻어두고 94년까지 시간여행을 하고, 그제서야 자신의 사랑을 알아채고, 서로 자신의 사랑을 향하다가 좀 더 간절했던 최택이 승리하는 어처구니 없는 결말을 맞는다. 도대체 그 사이에 어떤일이 있었는지도, 그때가서 그런 결정을 할 것을 왜 5년동안 사랑의 동면기를 보냈는지 전혀 이해가 가지 않는다. 한마디로 '뭥미'스럽다.
2. 지나치게 잊혀진 정환이
극 초반부터 김주혁과 그리고 덕선이와의 여러 에피소드로 사랑을 받은 정환이. 이른바 '어남류'는 남편찾기의 결론의 추측임과 동시에 '김정환'이라는 캐릭터가 얼마나 매력도가 높았는지를 보여주는 또 하나의 지표였다.
하지만 택이에게 간절함의 타이밍에서 뒤쳐진뒤에 정환이는 철저하게 드라마에서 쩌리가 된다. 그렇게 벙어리 냉가슴으로 지켜온 사랑을 친구과의 술자리농담으로 흘려보냈고, 급기야 마지막에는 극 속에서 그 존재자체를 감춘다.
이는 택이에게 매력이 없다는 뜻도 아니고, 덕선이와 정환이가 이어지지 않아서 난 화도 아니다. 최택은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을 밚은 장점을 가지고 있고, 또한 남편이 될 수많은 증거들을 남겨놓기도 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극의 중반까지 유력한 남편후보였고, 또한 극에서의 비중이 높은 캐릭터가 순식간에 그냥 조연중의 조연으로 전락함은, 많은 이들에게 상처를 안기기에 충분했다. 사람들이 입을 모아 얘기하던 벽사이에 끼어버린 사건. 만원 버스에서의 덕선이를 보호하던 모습 등은. 이제 2016년의 덕선이에겐 '기억에도 없을지 모르는' 이야기가 되어버린다.
앞서 싱거운 로맨스라고 표현한 것처럼. 후회없는 갈등이나 속마음을 제대로 나타내지도 못하고, 그냥 갑자기 찾아온 기회를 잡지 못하고, 상대방이 박력있게 키스하면 모든 상황에서 패배자가 되어버린 듯한 모습은, 흡사 '힝 속았지?' 한마디를 위해서 두 달간 파놓은 깊은 구덩이에 빠져서, 재밌지도 않고. 흡사 감동도 전해지지 않은 단순히 '기분나쁜 끝맺음'일 뿐이다.
3. 끝까지 너무나 수동적이기만한 덕선이
이 기나긴 드라마속에서 여주인공이자 실제 갈등의 당사자였던 덕선이는 사실 너무나 수동적인 캐릭터이다. 기존 응답하라 주인공들은 자신이 어떤 선택을 해야할지 갈등하기는 했어도, 적어도 본연의 의지나 진지하고 확실한 이끌림으로 상대를 골랐다면, 덕선이는 그런것이 전혀 없다.
처음 선우를 짝사랑한 것부터, 정환이까지. 보통 친구들의 이야기인 '걔가 너 좋아한데' 를 듣고나서 샘솟는 마음으로 좋아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덕선이는 극의 후반까지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도, 또 꿈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원하는 것 없는 갈곳 잃은 캐릭터로 묘사된다. 물론 작가나 감독이 어떤 숨겨진 의미를 가지고 그런 캐릭터를 구축했을 수도 있다. 아무것도 모르는 소녀를 말하고 싶었을지도, 현시대의 방황하는 청춘들을 거울삼아 그런 수동적인 히로인을 만들어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극중의 덕선이는 한번도 자기자신이 간절하게 원하는 바를 위해 무엇인가를 거절하거나, 또는 무리해서 추진력있게 추진하지도 않는다. 물에 물탄듯, 술에 술탄듯. 기존 응답하라 시리즈의 여주인공들과는 너무나도 다른 양상에 끓어오르는 갈등양상을 그냥 그대로 유지만 시켜주는 여주인공. 이건 무슨 수동태도 아니고, 거의 '나는 사랑을 당했다' 급이다.
그런 수동적인 여주인공 때문에, 시청자들은 때아닌 복선찾기에 어느때보다 혈안이 되어 있었다. 응답하라시리즈 동안 관통했던 '우유 궁예'(남편과는 항상 우유와 관련한 에피소드가 있다.) 라던가, 19화에 되서야 언급된 남편과는 항상 '가장 어렸을 때에 에피'가 소개될 것이다 등등. 결국엔 극중에서 덕선이가 원하는 방향으로 방향이 맞춰진건 거의 제로에 수렴한다. 그냥 남들의 의지와 남들의 실수나 타이밍으로 거기에 맞춰진 삶을 살아간다. 심지어 자신의 사랑까지도.
물론 극중에서 택이를 챙기는 중국에피소드. 정환이에게 분홍셔츠를 준 것들을 언급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건 본인의 '사랑의 표현'이라기 보다는 극중의 너무나 자그마한 부분일 뿐이다. 결정적인 선택을 그녀는 한적이 없었다.
결론적으로,
나는 택이와 덕선이의 사랑의 절정인 키스신을 보면서, "쟤네 갑자기 왜저래" 라는 마음이 들었으며, 응사의 명장면인 쓰레기와 나정이의 팔벌려 포옹에 근접할 택이와의 코트포옹은 "사랑이 어떻게 그렇게 쉽게 깊어지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건 사실 반대로 정환이와 이뤄졌어도 마찬가지다. 아무리 서로의 사랑을 확인했지만, 그 어떤 깊어짐과 고민없이. 그동안의 짝사랑과 엇갈림이 백설공주에 키스한 왕자와 사랑에 빠지듯 넘어가는 걸 보면서. 이건 길고 긴글로 꼭 "지적하고 싶은 로맨스"가 되어버렸다.
내가 혹평했지만, 응팔은 전례에 없는 시청률을 경신하며 역대 최고의 케이블 드라마에 이름을 올렸고, 나도 욕하면서 끝까지 챙겨본 재밌는 드라마였다. 전작에서 보여주지 못한 '가족'에 대한 진한 감동을 주는 부분이라던가. 응답하라 시리즈의 특기인 그 때 그 시절의 향수를 재해석해낸 능력은 그래도 이 드라마를 성공으로 이끈 큰 장치들이다.
하지만 위에서 언급했던 설득력 없었던 로맨스 덕택에. 좋은 기억보단 결국 나쁜 기억으로 내 기억에 남게될것 같다. 아, 치인트나 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