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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감자부인 Dec 12. 2023

눈물의 설거지

 직장인들은 경력이 쌓이면 이력서에 쓸 내용이 길어질 텐데, 집안일하는 주부는 어떤 내용으로 한 줄 한 줄 채워갈 수 있을까. 이전보다 잘하게 된 집안일을 떠올려본다. 간을 잘 맞추는 일? 눈에 보이는 곳 위주로 재빠르게 집안을 정리하는 일? 갑자기 내 주부 이력서를 내밀어 어느 집에서도 뽑힐 자신이 없어진다. 어쨌거나 저쨌거나 나를 써주는 우리 집이 고마워진다. 특히, 설거지는 해결하지 못한 난제다. 작은 그릇에 음식을 나누어 담는 것을 좋아한다. 주중에는 가족 모두 식사시간이 다를 때가 많다. 그래서 설거지 거리가 많이 나온다. 그리고 다른 모든 집안일보다 설거지를 나중으로 미루는 성향 때문에 종종 설거지더미가 생기고 결국 시간이 꽤 소요된다. 그래서 설거지를 하기 위한 나의 마음가짐은 남다르다. 유튜브에서 인생이야기를 골라 들으며 시작한다. 슬프고 힘들었던 일을 이겨낸 이야기를 좋아한다. 듣다 보면 눈물, 콧물 흘리며 설거지를 하게 된다. 어려서 힘든 경험을 했던 사람이 앞으로는 이보다 더 어려운 일은 없을 거야 생각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이만큼 힘든 일이 있었는데 설마 또 있을까. 그런데 설마 했던 일이 반복되어 일어나면 그제야 삶에 대한 잘못된 기대를 내려놓게 된다. 시필사모임에서 유명한 시를 필사하며 이전에 읽지 못했던 부분이 눈에 들어왔다.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알렉산드르 푸쉬킨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라거나 노여워하지 말라

  슬픔의 날 참고 견디면

  기쁨의 날이 오리니


  마음은 미래에 살고

  현재는 늘 슬픈 것

  모든 것은 순간에 지나가고

  지나간 것은 다시 그리워지나니



  현재는 늘 슬픈 것이다. 기쁨의 날은 언젠가 올 것이고 마음은 미래에 살게 해 주면 된다. 슬픈 현재도 그리운 순간이 될 것이니 미래는 정말 희망적이다. 그렇다 하면 기쁨의 미래를 기대하게 되는데 그래도 되는 걸까. 좋은 일만 있을 것이라고 삶이 나를 속인다. 그래도 슬퍼하거나 노여워하지 말아야 할 것은 현재의 슬픔을 견딜 힘이 되어주기 때문이다. 미래는 현재를 지나왔기에 또 다른 슬픔이 있지만 기쁨도 분명 있을 것이다. 한 해를 보내며 한 해 동안 있었던 사건, 사고를 뒤돌아본다. 분명 그때는 너무 힘들었는데, 지나감으로 얻는 가벼움과 기쁨이 있다. 아찔했던 순간은 한번 더 가슴을 쓸어내리게 한다. 울다 웃다 설거지를 마무리하고 깨끗해진 부엌을 바라본다. 금방 어질러지겠지만. 그럼 또다시 누군가의 이야기를 울며 웃으며 듣자. 이야기 속에 내 삶도 넣어본다.

부엌창에서 바라본 노을은 설거지하는 기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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