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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재연 Aug 09. 2023

균형이 필요해



어떤 물성을, 즉각적인 결과값을 가진 것을 좋아한다. 최근 며칠 간 받았던 스트레스의 원인이 무엇일까, 파해쳐보니 그렇다. 어떤 일은 내가 공들여 만든 완성본을 바로 볼 수 있다. 셔터를 누르는 동시에 어떻게 찍혔는지 볼 수 있는 디지털 카메라가 그렇다. 쓰면 쓰는대로, 좋은 글이든 그저 낙서같은 글이든 어쨌거나 한 편의 글로 남는 글쓰기가 그렇다. 

반면 내가 심혈을 기울인 결과가 아주 장기적으로 가야 나올까 말까 하거나, 또는 나온다한들 그게 과연 내 노력과 1:1의 대응이 되는 지도 모호한 일들도 있다. 대부분의 회사 일이 그렇다. 내가 한 것과 옆사람이 한 것들이 차곡차곡 쌓여 빠르면 분기에, 느리면 몇년의 시간이 걸려 성과 지표가 나온다. 물론 후자의 경우도 겪어본지라 그 희열도 충분히 알지만 내가 하고 있는 것들이 차곡차곡 쌓여가는 모래성이면 어떡하나, 라는 근심을 떨칠 수 없을 때가 많다. 몇개월 간의 내 노력이 심술맞은 파도가 한번 휩쓸고 가면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모래성이면 어쩌나, 하고 말이다. 조직이 달성하고자 하는 목표나 방법론에 깊이 공감하지 못할 땐 근심과 더불어 무기력함이 밀려오기도 했다. 그럴수록 내 노력이 자취를 남기듯이 흘린 부스러기들이 잘 보이는 것들에 더 마음을 쏟게 되고 생활에 더 직결되는 것들을 사랑하게 됐다. 




주말 아침에 샌드위치를 만드는데 그렇게 행복할 수가 없었다. 묵직한 호밀빵을 적당한 두께로 썰어 크기가 맞는 두쪽을 구웠다. 손에 남은 빵효모의 쿰쿰하고 신 향을 맡으면서 기다렸다. 따뜻하게 구워지는 빵의 한쪽 면에 과카몰리를 적당히 펴바르고 햄, 계란후라이, 어린잎채소 등을 탑쌓기 하듯이 조심히 하나씩 올렸다. 재료를 알차게 넣고 싶을수록 한 입 베어물 때 모든게 빵 밖으로 튀어나오려 하기 때문에, 랩을 크게 찢어 샌드위치를 김밥싸듯이 꾹꾹 눌러내며 감싸준 후 반으로 잘라준다. 샌드위치는 넣는 재료마다 반으로 갈랐을 때 보이는 단면이 달라져서 이걸 보는 재미가 있다. 모양이 어떻게 나올까 기대하면서 자를 때가 샌드위치 만드는 모든 과정 중 가장 백미다. 주말 아침부터 야채를 씻고, 재료를 굽고, 어울리는 그릇을 깊숙한 서랍장에서 꺼내는 등 주방에서 부산스럽게 움직이다보면 한끼 식사가 뿅하고 탄생한다. 그런 물성이 있는 작업을 내가 좋아하는구나. 쉽게 말하자면 손으로 만지고 귀로 듣고 눈으로 그 형태를 볼 수 있는 것들을 좋아하는구나, 나를 한번 더 알게 됐다. 가끔은 데이터와 숫자로 말해주는 결과보다 내 눈 앞에 완성된 샌드위치가 더 큰 기쁨을 가져다준다. '나 샌드위치 가게할까?' 잠시 웃긴 상상도 해봤다.




요즘 나는 나와 싸우고 있다. 자꾸 나를 단정하고 규정 짓지 말자고. 이런 사람일 거야, 이런 걸 좋아하고 싫어할 거야, 라고 정의해버리는 건 다른 사람에게도 지양해야하는 습관이지만, 본인에게도 위험한 버릇이다. 세상은 넓고 나는 계속 변하는데 무의식적으로 규정한 울타리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성장은 멀어진다. 난 이런 거 원래 안좋아해, 하면서 피했던 것이 어쩌면 새로운 영역의 세계로 나아갈 수 있었던 나를 가로막은 것일 수도 있다. 취향이 확고하고 개성이 강한 사람을 동경하지만 분명 어떤 부분에선 포용하는 마음을 더 넓게 쓰는 것이 중요하다고 느낀다. 나의 생각과 취향이 편협과 오만이 아닌, 그 모든 것을 해봤지만 역시나 이유가 있는 주관이 되기 위해서. 




다시 돌아와 '균형'. 나에게 지금 필요한 것은 균형이다. 좋아했던 것들은 더 열렬히 좋아하면서 동시에 새로운 것들을 거부감 없이 받아들여보는 것. 들어오는 인풋들을 자꾸 나와 맞지 않다고 끊어내지 말되, 그 삐꺽거리는 과정에서 받는 스트레스를 해소하기 위해서 더 나의 오감과 생활에 집중하는 것. 밥알은 씹을 수록 고소한 맛이 올라온다. 나도 이게 맞는 지 모르겠는 모호한 일들을 '해야만 하니까' 하고 퇴근한 뒤에 먹는 저녁만큼은 그 맛과 향을 천천히 느끼고 싶다. 천천히 씹으면서 이 재료는 볶으면 식감이 재밌어지네, 첫 입이랑 마지막에 목으로 넘기기 전에 나는 맛이 살짝 다르네, 따위의 생각에 집중하고 싶다. 산책을 할 땐 지나가는 사람들의 대화에 잠시 귀를 기울여도보고, 좋은 공간에 갔을 땐 그 안을 채운 것들에 하나씩 눈길을 주고 싶다. 매몰이 아닌 몰입이 필요하다. 확실한 물성을 가진 것들을 대충 흘려보내지 말아야 모호하고 불명확한 것들에 힘을 써야 할 때마다 자꾸 공허해지는 마음을 조금이나마 매꿀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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