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근 후 오랜만에 따듯한 밥이 먹고 싶었다. 남편은 일정이 있다며 따로 밥을 먹고 온다고 했다. 집에 들어가 대충 따듯한 계란국을 끓여 먹을까 하다가 10분 거리에 살지만 바쁘다는 핑계로 자주 얼굴을 보지 못했던 엄마 아빠에게 전화를 걸었다. 딸의 전화에 바로 의도(?)를 꿰찬 채 뭐 먹고 싶냐고 묻는 엄마의 목소리에 옭아매어있던 차갑던 마음이 따듯해진다. 분명 어릴 땐 뭐 먹고 싶냐 묻는 말이 그저 귀찮을 뿐이었는데 이제 몇 주만 듣지 않아도 그리워진다.
집 근처 내 마음속 맛집으로 저장되어 있는 한식집에서 엄마와 아빠를 만났다. 메뉴는 매콤 달콤 가자미찜과 달달하니 쫄깃한 LA갈비 그리고 맑은 국물에 속이 탁 풀리는 수제비. 셋의 취향을 고루 반영해 골랐다. 따듯한 쌀밥에 부드러운 가자미 살과 양념이 폭닥 베인 부드러운 무까지 올려 한입 앙 물어 오물거리니 잡생각들이 사라진다. 임플란트 치료를 받고 온 아빠는 평소와 달리 씁쓸해 보인다. 예전 보다 밥도 덜 드신다. 커다랗고 든든하던 존재인 아빠가 어느 순간 종종 귀여워 보인다. 또래들보다 흰머리가 덜 난다고 자랑하셨는데 못 보던 새 옆머리에 흰머리가 조금 더 송송 올라와있다. 엄마는 고기며 야채며 자꾸 내게 계속 덜어주며 더 먹으라 한다. 그런 엄마의 옆모습에서도 흰머리가 더 보인다. 아직도 내가 어릴 때의 젊은 부모님으로만 착각하게 되는데 문득 내 나이가 벌써 서른 중반이니 아빠는 예순 중반, 엄마는 곧 환갑이구나 라는 생각이 스치며 화들짝 놀란곤 한다. 세월이 흐르며 자연스럽게 얹어진 나이라는 숫자는 내 마음속 그들에게 적용되지가 않는다. 돈 아끼라며 밥값은 엄마 아빠가 내신다. 아직도 애 같은 딸인 나는 밥 얻어먹어서 그저 좋단다.
엄마는 저녁 요가 수업을 받으러 향하고 아빠는 저녁 산책을 하고 나는 도서관에 잠시 들려 책을 대여하기로 한다. 마침 같은 방향이라 10분 정도 저녁이 되어 어두워진 동네를 함께 걷는다. 목에 두른 울 머플러가 살짝 답답해질 만큼 추위가 가셨다. 주말에 시간 나면 집에 잠시 들르겠다는 퉁명스러운 인사말과 함께 엄마 아빠와의 짧은 산책을 마무리한 채 도서관으로 향한다.
평일부터 주말까지 꽉 찬 일정들로 제대로 내 마음을 들여다본 적이 없다 보니 한껏 예민해졌다. 잠시 내게 심적 여유를 줄 것 같은 제목의 책 두 권을 집어 들고 집으로 향한다. 몇 주 뒤면 곧 찬기가 한껏 누그러진 채 푸근한 바람이 볼을 감쌀 것 같다.
봄이 되면 삼십여 년의 모든 봄의 감정이 복합적으로 스친다. 초등학교를 첫 입학하던 순간의 어색함과 설렘. 그런 내 모습을 사진으로 열심히 담아내던 젊은 부모님과 또 기억 속 마지막 모습보다 훨씬 더 생기 있던 나의 할머니. 교실창가 자리에서 꾸벅꾸벅 졸 때 귓가를 스치던 운동장에서 뛰어노는 애들의 소리. 잘 마시지도 못하는 술을 들이켠 채 취해 봄바람에 실려 오 듯 몽롱한 걸음으로 걷던 길. 회색빛 사무실 속에서 타자기소리와 화난 사람들의 육성만 듣다가 짧은 점심시간 마주친 분홍, 노랑, 초록의 생물들로 인해 남은 하루가 행복해졌던 기억. 하지만 나의 설레는, 봄 같은 첫 시작을 항상 응원해 주던 나의 할머니가 떠난 날도 따듯한 봄이었다. 까만 재킷을 입은 나는 두 눈에서 연거푸 뜨겁고 짠 것을 또르르 흘렸다. 또 봄을 함께 즐기던 지인들 중 일부는 더 이상 나와 가깝지도, 소식조차 모른다.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순리로 인한 경험을 바탕으로 매해 봄이면 이렇게 생성의 설렘과 소멸의 아픔과 두려움의 감정들을 동시에 느낀다. 양극의 감정이 동시에 들 때 느껴지는 울렁임은 싫다가도 좋다. 아직 다양한 색감을 담은 생물들을 만나기 전이지만 갑작스러운 이른 봄 감정에 취해본, 3월 중순의 어느 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