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출산 그리고 육아의 시작
2025년 3월 12일
8시간 진통을 겪은 후 위급하다는 담당의의 판단하에 제왕절개 응급 수술이 진행됐다. 아프고 서럽고 무서운 시간이었다. 8시간의 진통 끝에 잔뜩 지친 채 차가운 수술대에 올라가던 순간 수많은 감정이 교차했고 온몸이 오들오들 떨렸다. 우렁찬 울음소리가 들리고 양수에 퉁퉁 불어 눈도 제대로 못 뜨던 작은 생명체가 내 앞을 잠시 스쳤다. 한 시간이 넘는 시간 동안 후처치를 마친 후 입원실로 이동됐다. 너무도 길었고 고된 하루였다. 출산 직후에는 수술 부위 통증이 극심했지만 입원실에 돌아와 남편이 찍어둔 영상 속 내 아이를 여러 번 보았다. 실감이 나지 않았다. 다 꿈같고 이상했다.
수술 다음날 온몸이 떨리고 열이 났다. 누군가 아랫배를 칼로 쿡쿡 찌르는 괴로운 통증을 참아 내 일어나 한 발자국씩 겨우 움직여 신생아실로 향했다. 내 아이를 제대로 바라본 순간이었다. 아주 작았고 말랑해 보였다. 그 와중에 신생아 답지 않은 풍성한 머리숱에 웃음이 나왔다. 유리창 속 목청껏 우는 아이가 내 자식이고 내 딸이라니. 정말 엄마가 됐구나. 어색한 단어들이 조금씩 실감되기 시작했다.
5일간의 입원. 그리고 약 2주간의 산후조리 기간은 울지 않은 날을 찾기가 더 어렵겠다. 수술 부위 통증은 꽤나 오래갔고 몸이 아프니 마음도 아팠다. 여기에 젖몸살까지 더해지고 하루하루 메말라가는 기분이었다. 미지의 세계에 만신창이가 된 채 혼자 던져진 것 같다고 해야 할까. 출산 후 겪는 산후 우울감이 이라며 스스로를 다독였지만 격한 감정의 변화에 어찌할 줄 몰랐다. 출산 전에는 간간이 듣기만 했던 각종 후유증들을 몸소 경험하며 학창 시절 성교육 시간에는 왜 출산 후 겪는 증상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려주지 않은 건지 원망스러웠다. (요즘 성교육은 어떤지 잘 모르겠다.) 튼살과 수술자국은 거울을 볼 때마다 받아들이고 싶지 않아서 그저 외면했다.
작디작은 아이를 카시트에 태워 집으로 돌아온 날. 시도 때도 없는 아이의 울음소리가 들릴 때마다 허둥지둥 젖을 물리고, 분유를 타고, 기저귀를 갈았다. 신생아 육아는 듣던 대로 보통 일이 아니었다. 2~3시간마다 아이의 식욕을 채워주기 위해서 나의 수면이라는 것은 당연하게 포기되어야 하는 것이었다. 그러다 보니 하루 한 끼 챙겨 먹을 힘도 없었다. 아이가 괴로워하며 분수토를 한 모습을 처음 볼 땐 미안해서 함께 울었다. 아이를 재우고 나면 여유롭게 책도 읽고, 작업도 할 줄 알았으나, 현실은 아기가 잠들면 쌓인 젖병을 씻고, 참았던 화장실에 가거나, 쪽잠을 겨우 청하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말랑말랑한 아이의 손과 발, 매일 차오르는 볼살. 때 묻지 않은 순진무구한 얼굴에 남아있는 배냇웃음이 참 소중하다. 힘들어도 아이 웃는 모습 보면 잊힌다는 뻔한 말에 공감하게 되는 것이었다.
더불어 나의 작디작은 딸을 안고 있는 부모님의 모습 속에서 젊디 젊었던 그들의 청춘이 스친다. 할머니, 할아버지라는 역할에 걸맞게 작은 손녀를 소중히 대하는 그들에게서 그리운 내 할머니와 할아버지의 사랑도 떠올랐다. 작디작은 생명체가 선물해 준 수많은 감정들에 어쩔 줄 몰라하다 보니 순식간에 하루하루가 지나고 있다.
임신과 출산을 경험하고 육아라는 긴 여정의 첫걸음을 시작하게 된 2025년도 봄. 수면욕이 제대로 채워지지 않아 극도로 예민해졌고, 흐드러지게 핀 꽃을 바라볼 여유란 없이 작은 아이를 먹이고 재우는 날들이 반복되는 일상이지만 어느 순간 사무치게 그리워질 것임을 안다. 그래서 꼭 쥐는 있는 작고 촉촉한 손가락을 자꾸만 만지작 거리고 쌕쌕 거리는 숨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살짝 열어 둔 창문 사이로 들어온 4월의 포근한 바람이 반갑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