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부인 자유남편

가정 내 평화 유지를 위한 소소한 프로젝트

by 안나

검정 앵클부츠를 신는다. 이 부츠를 신으려면 외출 전 잠시 신발장에 쭈그려 앉아 바짓단을 정리한다던가, 지퍼를 올리는 등의 소소한 단계가 추가된다. 아직 돌이 되지 않은 아기와 외출할 땐 감히 엄두도 낼 수 없던 부츠이기에 오랜만에 신고 나니 괜스레 설렌다. 가방은 최대한 지갑 정도만 들어갈 정도의, 팔과 어깨에 조금이라도 무리를 줄 수 없는 아주 작은 것으로 챙긴다. 곧 먼지가 쌓일 것 같은 향수병 들어본다. 팔목에 소심하게 한 방울 정도 뿌려본다. 현관문을 열고 밖으로 향한다. 겨울 끝물이라지만 아직 차가운 바람에 양볼이 얼얼하다.


어딜 갈까 잠시 고민하다가 예전에 종종 방문하던 북카페에 가기로 했다. 직장인 시절 복잡한 평일 일과에 지치면 주말에 늦잠을 잔 뒤 이곳에 와 가볍게 읽기 좋은 에세이집을 사서 읽고 커피나 따듯한 차 한잔을 마시고 나면 무겁던 머리가 가뿐해졌던 기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임신, 출산 그리고 아기가 태어나고 몇 개월 동안은 방문한 적이 없었으니까 약 2년 만에 방문한 북카페는 그대로인 듯 달랐다. SNS 등을 통해 입소문을 타서였을까. 실제로 촬영 같은 걸 하는 듯 다소 부산스러웠다. 고요한 책장들 사이에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의 흥미로움이 더해졌다. 고요함 속의 얕은 소란이 어쩐지 싫지는 않았다. 몇 분 간 고민한 끝에 고른 책을 한 권 들고 결제를 한 뒤 따듯한 캐모마일 티를 주문했다. 햇볕이 잘 드는 소파 자리에 앉아 책을 읽었다. 빳빳한 새 종이에 새겨진 정갈한 검은 활자들이 사방팔방 요동치던 내 마음을 정돈해 준다. 따듯한 차를 홀짝홀짝 마시다 보니 눈꺼풀이 무거워진다. 두 눈을 잠시 감고 피로로 인해 시큰 거리는 안구에 어둠을 잠시 선물해 준다.


북카페에서 약 1시간의 시간을 보낸 뒤 다시 밖으로 나왔다. 북카페와 집은 지하철로 두 정거장 정도 걸리는 거리다. 도보로는 약 30분 정도 소요된다. 오랜만에 양손이 자유로운 상태로 산책하고 싶어 이 추위에 집까지 걸어가기로 한다. 예전에는 걷는 걸 참 좋아해서 한 시간 거리도 운동 삼아 걷곤 했는데 아기와 정신없는 하루하루를 보내다 보니 이렇게 여유롭게 산책하는 것조차 쉽지 않아 더없이 소중한 순간으로 다가온다. 집에 가는 길에 디저트 가게에 들러 달달한 것들을 좀 사고, 과일가게에 들러 컵과일 조금과 수제 요구르트도 포장했다.


약 2시간 동안 자유부인을 즐기고 집에 돌아오니 이유식을 먹고 있던 아기가 통통한 양볼과 손에 하얀 밥풀이 잔뜩 묻는 채로 나를 응시하며 배시시 웃다가, 사라졌던 엄마가 야속했는지 금세 서럽게 운다. 옷과 머리카락에 밥풀이 묻을 게 뻔하지만 아기를 꽉 껴안아준다. 말랑한 아기를 안으면 마음도 말랑해진다.


다크서클이 드리워진 남편의 두 눈가가 서서히 반짝반짝 빛나기 시작한다. 곧 자유남편의 시간이 시작될 신호랄까. (보통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사서 헬스장에 가거나 드라이브를 한다고)



부모가 되기 전에는 평일엔 출근해 일을 하고 퇴근 후에도 짧은 취미를 즐겼다. 주말이면 감성 카페들을 찾아다니거나 여유롭게 헬스장에서 운동도 하고 드라이브도하던 우리였다.


처음 부모가 되고 신생아 육아를 정신적, 체력적으로 극한에 다다르다 보니 신혼 초처럼 자주 싸우곤 했다. 각자의 힘듦을 끊임없이 토로했다. 논리는 없고 어두운 감정만 남는 싸움들이었다.


그 다툼들을 조금이라도 줄여보고자 실행 중인 것이 바로 자유부인, 자유남편 시간이다. 효율성을 따지기 어려운 게 육아라지만 약간의 개인 시간을 서로에게 규칙적으로 주기 시작했다. 상황에 따라 달라지지만 보통 주말 하루를 정해 2~3시간 정도씩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고 오는 거다.


기존의 역할에 한 아이의 엄마, 아빠라는 커다란 책임이 더해져 무거워진, 어깨에 쌓인 돌덩이를 잠시 내려놓을 수 있는 순간. 본연의 나를 돌아보는 짧은 시간을 보내고 배우자의 시간도 지지해 주고 존중해 주는 것. 자유부인, 자유남편 시간들이 쌓여가다 보니 조금씩 더 따듯하고 현명한 육아를 위한 방향성이 잡혀갔고(여전히 부딪힐 때가 많지만) 육아 협력자를 향한 애틋함도 늘어갔다. 가정의 잔잔한 따듯함을 오래 유지하기 위해서 앞으로도 자유부인 자유남편 프로젝트는 소소하게나마 계속 진행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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