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심란한 흙탕물을 벗어나 내 살길, 숨구멍을 찾아야 했다. 훨훨 가벼운 새처럼, 둥둥 물 위를 부유하는 잎새처럼 내맡기듯 표류하고 싶었다. 그래서 떠났다.우즈베키스탄으로.
낯선 미지의 땅으로 떠나고 싶었다. 게다가 외고재학시절 나름대로 러시아어를 전공했기 때문에 읽고 쓸 줄은 알았다. 가서 국제미아가 되는 비천한 신세는 면할 터였다.
떠난다고 해서 현저하게 바뀌는 것도, 해결되는 것도 없다는 건 알고 있었다. 다 내가 내손으로 콱 붙들고 풀어가야 할 나의 삶과 나의 과제다. 그것들은 여기에 그대로 있을 것이었다. 그러나 이 여정이 어찌하든 내 기저로 들어오리라고, 내 속에 어떤 횃불이나 작은 손짓은 되어 주리라는 한 톨의 담담한 믿음은 있었다. 그렇게 떠났다. 몸의 진동과 울림을 따라서.
신비롭고 아득한 도시들을, 나는 유유히 표류하듯 떠다녔다. 세계와 나 사이에 투명막이 쳐진 듯 나는 세계와 자주 분리되었다. 내 눈 앞의 세계는 매우 관조적이었다.
침묵에 휩싸인 장엄한 모스크 앞에서는 나 자신이 누군지도 모를 지경으로 텅 비워졌다. 건조한 사막바람이 온몸에 쏟아지던 아득한 흙성 앞에서는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가 사라졌다. 시공간이 없어지는 무아지경의 순간이었다. 거대한 위용의 첨탑 앞에서는 압도적인 경이로움에 무릎을 꿇고 주저앉고도 싶었다. 그런 무한한 순간들에는 이 세상의 어떤 것도 관계될 것이 없었다. 오히려 내 무거움이 사사롭게 여겨지기도 했다.
‘결국엔 길을 찾게 될 거야.’
믿음은 곧게 세워졌다. 그러다가도 언제 그랬냐는 듯 힘없이 허물어지길 반복했다.
‘무엇을 원하는가, 어떻게 살고 싶은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나는 자주 내 가장 깊숙한 곳으로 침잠했다. 강렬한 고독이 온 뼈에 사무치던 날들이 많았다. 나는 마치 깊은 물속에 푹 잠겨있는 것 같았다. 잠잠하고 고요했다. 동시에 무겁고 고독했다. 두텁고 짙은 시간들이 흘러갔다. 그 시간을 보내고 나는 돌아왔다. 그리고 그 시간 끝에서 춤추려고 다시 일어서는 나를 마주하게 되었다.
“겨울의 한 가운데에서, 나는 마침내 내 안에 꺾이지 않는 여름이 깃들어 있음을 알게 되었다.”
(알베르 카뮈의 『여름』)
여행 후 1년이 지난 지금, 나는 춤을 추고 있다. 사당동에 [움직이기] 라는 작은 무용공간도 열어서 이제 사람들과 함께 하고 있다. 어떻게 살고 싶은가, 무엇을 원하는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오늘도 삶의 질문들 앞에 선다.
나 자신이고 싶다. 자유롭게 살고 싶다. 나 자신이 될 수 있도록 나를 붙들고 세워주는 것. 그게 무엇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