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성탄절이다. 모두에게 크리스마스의 축복이 깃들기를 바란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이야기에 대해 듣는 것은 보통 그리스도교라는 맥락에서 의미가 있다. 유대교에서는 소위 구약성서라고 부르는 타낙에서 제시되는 본문들이 예수와 관련되어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래서 유대인의 입장에서는 타낙의 본문이 “우리들의 것이 아니라 당신들의 것“ 이라고 생각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이러한 태도는 홀로코스트 발생에 일정한 영향을 미쳤다고 예일대 신학과 종신교수 아로슬라프 펠리칸 씨는 주장했다. 성서는 나의 것이고 독점적인 소유라고 주장하는 생각은 현재의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에서도 나타나는 문제이다. 유대교 랍비와 로마 가톨릭 신부님 그리고 개신교 목사가 서점에 들어가면 발생할 일에 대한 농담이 있다. 이들은 딸에게 성서를 사주고 싶어 한다. 도서관 사서는 이들에게 ‘서로 다른 성서들’ 을 주어야 한다. 성서 무오를 주장하는 사람들에게는 오로지 신성한 단 하나의 성서만을 구매하고 싶다. 하지만 교파에 따라 목차부터 다르며 유대교와 그리스도교,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의 차이도 성서 해석의 차이에 따른 분리이다. 성소수자와 사회적 약자를 위한 성서 해석도 이러한 성서 해석의 차이에 따른 교파의 분리로 이해하는 것이 적합하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타낙 신명기 18장 18-19절은 그리스도교의 경우 모세에게 주어진 신적인 권위가 추후 신약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출현을 예고한다고 생각한다. 혹은 마태오 복음 16장 18-19절에서 등장하는 베드로 구절은 로마 가톨릭의 입장에서는 교황권을 옹호하는 구절이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차이는 각자의 신앙 공동체를 보호하며 경전을 지켜나가고자 하는 중대한 과제를 수행한다. 새로운 시대에서 성서에 대해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에 대한 의견은 대립할 수 있고 달라질 수 있으나 서로의 종교적 전통이 반드시 대립하는 것은 아니며 호상적인 측면도 반드시 존재한다.
따라서 성서가 정말 누구의 것이냐? 라고 배타적인 논쟁을 하는 것은 의미가 없으며 오히려 세상의 여러 갈등과 분쟁을 낳았다. 타낙은 신약에 따르면 진리를 가르치고 잘못을 책망하며 올바르게 사는 훈련 (디모데2 3:16) 을 가르치고 신약은 자신을 증거하고 믿는 (요한 20:31) 것에 그 의의가 있다고 했을 때, 성서를 읽는 독자는 특정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 내지 이를 세상 신도에게 일반화되는 역사를 바라보는 객체의 입장이 된다. 따라서 인간은 성서 전통에 대해서 주인이 아니라 세입자라는 표현을 펠리칸 교수는 사용한다.
지금까지 성서 해석의 방법은 19세기 이후 킹제임스 성경이 영어로 번역되고 널리 배포되면서 신자가 아닌 사람들에게도 쉬이 읽혀지게 되었고, 이는 다양한 저자가 다양한 역사적 맥락에서 작성한 성서가 가질 수 있는 다층적인 역사적, 소설적 해석이 가능하게 되었다. 로마 가톨릭이 성서 해석을 독점하던 시절을 생각하면 비신자들 역시 성서에 접근하고 기독교 신학을 연구하기 시작하면서 성서를 더 이상 과학 교과서나 역사 교과서로 이해하지 않게 되었다. 아브라함 계열의 종교의 목적이 성서를 다민족 이방인에게 읽히고 영감을 주는 것이 일차적인 목표였다고 한다면 이는 달성 중이거나 달성한 목표라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성서의 주 독자층은 성서를 경전으로 중심에 두고 실제 생활에서의 그 무게를 가지고 위로를 받으며 세상 삶을 살아가고자 하는 종교 공동체에 있다. 이북의 독재 정치에 맞서 그리스도 공동체에서 자유와 민주의 미래를 꿈꾸는 사람들, 예수의 십자가 희생을 반추하며 소수자에 대한 혐오와 차별이 없는 세상을 만들어가고자 하는 공동체를 찾아볼 수 있다. 성서는 각자 다른 환경의 저자가 서로 다른 시대상을 바탕으로 작성한 신앙고백이니 만큼 이들은 성서의 맥락을 지금도 여전히 작성해나가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타낙과 신약성서는 성탄절 크리스마스에 다음과 같은 울림을 준다. “하느님께서 짝지어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 놓아서는 안된다 (마태오 복음 16장 9절)”
행복한 크리스마스가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