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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연솔 Sep 17. 2021

[이론] 롤랑 바르트의 '제3의 의미'

영화에서 '무딘 의미'의 특성과 대안적 사유


  가이드를 시작하며

  롤랑 바르트(Roland Barthes)는 1970년 발표한 저작에서 기존의 영화기호학이 상정한 ‘폐쇄적 의미체계’를 거부하고, 무한한 의미 영역으로 열린 새로운 의미 층위를 제시했다. 기존의 폐쇄적 체계에서 관객은 '정답의 범주'에 있는 의미를 포착하는 존재였으나, 바르트의 논의에서 관객은 의미 ‘생성’의 주체로 부상한다. 바르트는 저작 <제3의 의미>에서 ‘의미의 세 층위’, ‘자명한 의미’, ‘무딘 의미’, ‘스틸 사진’에 대한 논의를 펼친다. 이에 나는 다음과 같은 요약과 생각을 제시한다. 첫째로 바르트가 제시한 의미의 세 층위 / '자명한 의미'와 '무딘 의미'의 차이가 흥미롭다. 당신이 영화를 보며 꾸려나가는 의미는 자명한 것인지 무딘 것인지 생각해보자. 자명한 의미와 무딘 의미의 차이를 살핀 뒤에는, 무딘 의미의 카니발적 특징을 살펴볼까 한다. 이때 카니발이란 엉덩이를 마구 흔들며 춤추는 축제의 의미라기보다는, '금욕과 절제'의 일상 속에서 모든 질서와 위계의 전복을 뜻하는 '사육제'를 가리킨다. (고결하게 여겨지는 '정신', 하등하다고 여겨지는 '육체(+육체적 욕망들)'이 뒤집히는 사육제에서는, 신체적 욕망과 배설, 사회 질서를 어지럽히는 욕설 등이 허용되는 '전복의 장'이다-미하일 바흐친.) 마지막으로, 무딘 의미의 개념을 비판적으로 살피고 이를 ‘과잉’ 또는 ‘영화적 경험’이라는 개념으로 대신할 수 있지 않을지 제안해본다. 이는 오늘날의 영화 담론에 대한 성찰을 여는 것이기도 하다. 

 

  *키워드: 무딘 의미, 과잉, 영화적 경험, 영화 담론




출처: https://blog.naver.com/gmjslee/222296900439





  의미의 세 층위

  구조주의 기호학에서는 영화의 의미체계를 두 층위로 설명한 바 있다. 기존의 이원적 의미체계에 바르트는 ‘제3의 층위’를 추가한다. 외연의 층위에 해당하는 ‘정보적 층위’는 메시지의 전달과 이해 층위로, 작품의 디제시스 정보가 관객의 외연적 포착에 따라 전달되고 이해되는 층위이다. 이 층위에서 작품과 관객 간의 커뮤니케이션은 관객의 ‘지각 활동’을 기반으로 한다. 바르트는 정보적 층위에 주목하지 않고 제2의 층위와 제3의 층위를 논의의 핵심으로 삼고 있다.

 제2의 층위, ‘상징적 층위’는 의미의 다층 구조로 매우 복잡하고 풍요로운 상징을 가지며, 관객의 ‘인지 활동’을 기반으로 한다. 작가에 의하여 구성된 중층의 상징적 의미들이 관객의 비평적 사유에 의하여 포착되는 것이다. 바르트는 상징적 층위에서 포착되는 의미를 ‘자명한 의미’라고 칭하였는데, 이는 상징적 의미가 ‘자연스럽게 관객 앞에 서는, 분명한 의미’임을 함축한다. 요점은 자명한 의미가 작가가 구성한 의미체계를 벗어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즉, 자명한 의미의 명료함은 폐쇄적인 명료함이다.



출처: https://addisstory.tistory.com/111




 제3의 층위는 후기 구조주의적 흐름 속에서 제시한 바르트의 개념이다. 이는  관객의 ‘의미생성 활동’을 기반으로 한다. 바르트에 따르면, 상징적 층위에서 작품을 풍요롭게 비평한 관객은 기의로부터 자유로운 기표를 마주할 수 있으며, 표류하는 기표를 주관적으로 독해함으로써 의미를 생성한다. 이때 의미는 ‘무딘 의미’로, 정답의 범주 속에서 찾아지는 것이 아니라 무한한 영역으로 열려 있는 것이다. 정보적 층위와 상징적 층위에서 관객은 고정된 의미체계로서의 메시지·상징체계를 마주하였다면, 이 층위에서 관객은 순전한 기표들을 마주한다. 여기에서 텍스트는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관객에 의하여 만들어진다.

 의미의 세 층위를 고려할 때 주의할 점이 있다. 지질학적 다층 구조가 먼저 퇴적된 지층 위에 새로운 지층이 쌓여 형성되는 것처럼, 의미들의 층위에서 ‘앞선 층위’의 선행하는 의미는 항상 존속된다. 즉, 제(n+1) 층위의 의미는 제 n 층위의 의미를 지우지 않은 채 포착된다.    

 




  자명한 의미와 무딘 의미

  바르트는 에이젠슈테인의 영화 이미지를 예로 들며 자명한 의미와 무딘 의미를 설명한다. 자명한 의미는 <전함 포템킨>(1925)에서 등장한 ‘주먹 이미지’의 의미로 대표된다. 에이젠슈테인의 예술에서 의미는 다의적이지 않고 감독의 의도로 선택되고 강요되기에, 주먹 이미지는 싸움꾼이나 파시스트의 주먹으로 읽힐 수 없다는 것이다. 그 주먹은 촘촘히 짜인 의미체계에 따라 자명하게 ‘프롤레타리아’의 주먹으로 읽힌다. 그리고 이러한 이미지들은 명백히 ‘혁명’의 의미로 향한다.

 한편, 바르트는 무딘 의미를 설명하기 위하여 <전함 포템킨>(1925) 속 노파 이미지에 대한 주관적 감상을 논의로 끌어들인다. 그에 따르면 노파의 이미지는 고전적 재현에 추가된 잉여의 무언가를 갖는다. 잉여의 무언가는 노파의 눈썹까지 내려 쓰인 두건, 감긴 눈, 볼록한 입이 미묘한 관계(대화체)를 형성한 정신작용의 산물이다. 앞서 언급하였듯 선행되는 의미 층위는 사라지지 않고 여전히 존재하기에, 그 잉여의 무언가는 노파 이미지의 상징적 층위가 갖는 ‘고뇌’라는 명백한 의미를 지우지 않는다. 다만 기존의 의미체계에 공헌하지 않는 그 잉여는, 의미체계가 지지하는 서사 조직을 혼란스럽게 할 수 있다. 잉여적 무언가가 선명한 의미를 둔화시킨다는 점에서 바르트는 이를 ‘무딘 의미’라 칭한 것이다. 요컨대, 풍요로운 비평의 경지에 다다르면 기표들은 작품과 작가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고, 의미의 무게를 완전히 덜어낸 기표들이 자유롭게 어울리며 무딘 의미를 낳으며, 이들의 자유로운 유희가 기존에 퇴적된 의미를 혼란스럽게 한다.

  바르트는 무딘 의미와의 관련 속에서 ‘영화적인 것’을 스틸 이미지’라는 인공물 속에서 찾으며, 미장센에 주목한다. 그에 따르면 관객에게 시공간의 단편적 내부를 제공하는 스틸 이미지는 영화의 ‘견본’이 아니라 ‘인용’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무딘 의미는 상호 텍스트성과 밀접한 관련을 맺는다. 제3의 층위에서 관객에 의해 만들어지는 텍스트는 여러 씨줄과 날줄의 교차 (독자들과 텍스트들의 상호적 관계) 속에서 나온다. 이는 곧 스틸 이미지를 작품 일부로 귀속시키는 통념을 거부하는 것이다.

 무딘 의미의 상호텍스트적 논의와 함께, 바르트는 상당한 지면을 무딘 의미의 특성을 기술하는 데 할애한다. 쪽찐 머리 이미지를 사례로 들며 무딘 의미가 어떠한 정서(emotion)를 촉발한다고 보면서, 정서를 촉발하는 무딘 의미가 기존의 기호학적 의미체계에서 주목받지 못했던 ‘하찮고 사소한 것’들, 서사에 공헌하지 않거나 미적이지 않은 것들, 역겹고 페티쉬적인 것들을 받아들인다고 기술한다. 바르트는 다음의 술회를 통하여 무딘 의미의 반(反)미학적 특성을 포용하였다. “나는 무딘 의미를 위하여 경멸적인 내포까지도 이해한다.” 




  무딘 의미의 카니발적 특성

  바르트가 말한 ‘경멸적인 내포’란 사회 구성원들이 공유하는 ‘보통의 규범’에서 벗어난 의미들이다. 바르트에 의하여 ‘보통의 아름다움’과 ‘보통의 도덕’, ‘보통의 중요성’에서 벗어난 의미들이 부상하였다고 볼 수 있다. 서사 조직에의 기여도에 따라 결정되어온 이미지의 위계는 무딘 의미의 등장으로 흔들린다. 이는 카니발의 세계를 상기시키며, 저자는 직접 카니발과의 관련성을 언급하기도 하였다.

  미하일 바흐친에 따르면, 일상적인 공식 세계에서 괄시받는 ‘육체’가 카니발에서는 세계의 근본이자 중심으로 부상한다. 공식 문화를 육체의 층위로 끌어내림으로써, 체계적으로 분리되었던 것들이 연결되고 세계를 물질화하는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다. 그로테스크 육체, 즉 물질 그 자체로서의 육체는 폐쇄되지 않고 영원한 실험이 펼쳐지는 장이다. 카니발의 이러한 특성은 제3의 층위와 닮은 면이 있다. 기의 없는 ‘물질 그 자체로서의 기표’가 무딘 의미의 층위를 무한히 열면서, 독자의 다양한 실천의 장이 되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생성하는 무딘 의미는 여분에서 오는 것으로, 관객의 독해를 비껴가게 한다. 앞서 언급한 무딘 의미의 무한한 포용성 (역겨움까지도 포용하는 무한함)은 기존의 서사 중심적 독해 외의 것이며, 육체성과도 닿아있다. 무딘 의미는 이성적 활동을 통해 포착하는 것이 아니라 우연히 포착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즉, 제3의 층위는 ‘독해’의 차원에서도 카니발 쪽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 기존의 이분법적 기호학적 접근은 규범과 체계를 기반으로 영화를 쪼개고 분석하고 통합하는 이성적인 접근이라는 점에서 사순절에 가까이 있다. 상징적 층위에서 중요한 것은 관객의 인지적 작용이다. 인지적 작용을 통해 자명한 의미가 완전히 그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며, 문화, 지식, 정보들이 동원된다. 그러나 제3의 층위는 아무리 포착하려고 애써도 포착할 수 없는 층위이다. 정답의 범주가 부재한 채 관객의 상상적, 우연적, 순간적인 독해로 포착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상징적 층위가 폐쇄적인 명백함을 갖는다면, 제3의 층위는 무한하고 우연적인 명백함을 갖는다. 우연히 다가온 그 무딘 의미는 내 앞에 자명하게 존재한다. 무딘 의미는 언어화할 수 없을 뿐이지, 분명 존재하는 것이다.     




 무딘 의미에 대한 의문

  앞서 살펴보았듯 무딘 의미는 정확하게 묘사될 수 없다. 바르트는 <제3의 의미>에서 특정 이미지의 무딘 의미를 열심히 설명하면서도, 무딘 의미가 온전히 묘사할 수 없는 층위임을 시인하고 있다. 그는 단지 어떤 기표를 ‘가리키면서’ 무딘 의미의 가능성을 확인할 뿐이다. 무딘 의미가 촉발되는 기표는 정해져 있지 않다. <이반 대제>의 노파 이미지에 대한 바르트의 해설은 그럴듯하지만, 정답은 아니다. 제3의 층위는 무한히 열려 있기 때문이다. 생성되는 의미들은 ‘어떤 체계에 입각한 위계’를 갖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단지 지각자들 간의 상호텍스트적 관계 속에서 획득하는 설득력의 위계를 가질 수 있을 뿐이며, 설득력의 위계는 유동적인 상호 텍스트성에 따라 근본적으로 일시적이다. 이러한 무딘 의미의 특성을 성찰하는 과정에서 그 개념적 한계를 묻고 싶다.

 첫 번째 의문은 다음과 같다. ‘서술(묘사)할 수 없는 것을 고려해야 하는가?’ 예술의 감상에 있어 ‘서술’은 중요한 과정이다. 서술은 작품의 담론을 형성하는 과정이며, 담론 그 자체이다. ‘제대로 묘사할 수 없는 것’을 공유하기는 어렵다. 바르트는 제3의 의미가 그 이전 층위의 의미들을 둔화시킨다고 하였으나, 그 둔화의 방식과 결과는 무딘 의미의 실재를 어느 정도로 설명하는지 알 수 없다. 무한한 영역으로 열린 무딘 의미가 기존의 닫힌 담론을 확장하는 힘을 갖는 것처럼 보이지도 않는다. 물론, 언어화할 수 없다는 이유로 존재를 부정할 수는 없지만, 존재한다는 이유만으로 사유의 대상이 되지는 않는다. ‘영화를 마주할 때 제3의 층위를 고려해야 하는가?’ 이는 무딘 의미가 고려되어야 할 ‘필요성’으로부터 출발한 의문이다. 예술 담론의 형성에서 무딘 의미는 비평을 혼란스럽게 하는 지점으로서 주목할만하지만, 묘사 불가능하고 무한한 이 의미 영역을 어떻게 다룰 것인지의 문제가 떠오르는 것이다.

 바르트에 따르면 기표만을 취한 유희는 작품의 풍요로운 분석 이후, 의미체계에서 떨어져나온 기표들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는 무딘 의미와 관련해 두 번째 의문을 낳는다. ‘풍요로운 분석이 어느 정도의 경지인가?’ 바르트는 무딘 의미를 제외한 모든 상징적 의미 층들을 읽을 수 있다고 자신하였으나, 과연 그것이 가능한지에 대한 의문이기도 하다. 상징적 의미는 닫힌 의미체계 내로 한정되어 있지만, 그 또한 온전히 깨닫기 어렵기 때문이다. 메츠가 영화를 ‘유예된 커뮤니케이션’이라고 칭한 바 있듯, 시간이 작품과 관객 사이를 채우고 있는 경우에 감독이 의도한 상징적 층위는 더욱 멀게 느껴지며, 시간뿐만 아니라 관객의 인지에 영향을 주는 다양한 사회문화적 축이 존재한다. 관객은 관객의 세계를 망각할 수 없고 감독의 세계에 도달할 수 없기에, 다양한 환경적 요소들이 상징적 층위를 파악하는 비평 과정에 영향을 미치기도 한다. 따라서 풍요롭고 복잡한 상징적 층위는 한 명의 관객으로서 무한하다고 느낄 만큼 방대할 수 있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제3의 층위 자체에 대한 세 번째 의문은 ‘순수 기표들의 유희를 제1, 2의 층위 위에 쌓이는 제3의 층위로 보는 시각이 타당한가?’이다. 풍요로운 비평을 거치지 않더라도 이미지의 형상들로부터 얻는 유희가 있을 수 있지 않은가? 가령, 우리는 누군가 완벽에 가까운 원을 그릴 때 쾌감을 느끼기도 한다. 원은 그 어떤 이야기도 담고 있지 않다. 기표만이 가져다주는 순수하게 형식적인 쾌감은, 무딘 의미가 정서(emotion)를 촉발한다는 바르트의 논의를 상기시키기도 한다. 의미 층위가 아닌 경험의 차원에서도 작가와 작품으로부터 자유로운 기표들의 대화가 이루어질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생각해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무딘 의미에 대한 대안적 접근

 무딘 의미의 개념적 한계는 1) 묘사 불가능한 의미가 해결할 수 없는 ‘닫힌 담론’ 2) ‘풍요로운 비평’의 어려움 2) 경험적 차원에서의 ‘기의 없는 기표들의 유희’의 가능성으로 요약될 수 있다. 본고는 두 가지 대안적 접근을 제안한다.

 첫째, 스티븐 히스가 <제3의 의미>를 번역할 때 ‘과잉’이라는 단어를 선택한 것처럼, 바르트가 포착한 초과의 무언가를 ‘필요 이상의 것’으로 간주할 수 있다. 이는 첫 번째, 두 번째 의문에 대한 방안이 된다. 작품의 예술성의 근원은 관객이 아니라 작가에 있다. 관객은 작가가 구성한 영화형식을 따라가면서, 또한 자발적인 관심을 가지면서 예술성을 감각한다. 예술의 핵심적 영역인 ‘작가의 의도’는 자연스레 닫힌 담론의 필요성을 제기한다. 이는 서술 가능함의 필요성이기도 하며, 바르트가 제3의 층위로 언급한 것은 ‘영화적인 것’이 아니라 부차적인 것, ‘과잉’이 된다.

 둘째, 제3의 층위를 기존의 의미체계(외연과 내포의 이분법적 체계) 위에 쌓이는 층위가 아닌, 영화적 경험’으로 사유할 것을 제안한다. 관객이 포착한 무딘 무언가는 형용할 수 없지만 존재하며, 닫힌 담론을 무한히 확장할 힘을 가지진 못하지만, 영화적 경험을 무한히 확장할 수는 있다. 무딘 의미로 감각된 어떤 것들은 영화적 경험의 다양한 ‘개인성’ 중 하나로 포섭될 수 있다. 작품은 메시지로, 상징적 의미체계로 만들어졌으며 관객은 만들어진 작품을 향유하는 것이다. 작품 자체가 무한한 복수태로 확장된다기보다는, 작품에 대한 영화적 경험이 무한한 것이다. ‘텍스트’가 이러한 독자들의 개별적 경험을 배제하지 않는 개념이라는 점에서, 영화적 경험으로의 사유는 텍스트 개념과도 연관된다. 

 두 접근을 종합하면, 제1, 2의 층위 위에 쌓이든 그렇지 않든 서사 조직을 탈피한 ‘과잉’이 존재하며, 이는 개별 관객들의 ‘배경’, ‘관심’, ‘작품에 대한 인지적 작용’의 차이에서 비롯된다. 즉, ‘영화적 경험의 개인성’으로서 ‘과잉’은 영화적 경험을 무한히 확장하는 요소이다. 




 가이드를 마치며; 영화 담론의 현주소

 지금까지 바르트의 <제3의 의미>를 요약해 제시하는 한편, 무딘 의미에 대하여 세 가지 이의를 제기하고 대안적 사유로 ‘무딘 의미를 과잉으로 간주하기’, ‘무딘 의미의 무한한 확장성을 영화 작품이 아닌 영화적 경험으로 포섭하기’를 제시하였다. 이는 조금 더 면밀한 검토가 필요한 다소 과감한 논의이며, <제3의 의미>의 의의를 홀대하는 작업이 아님을 밝힌다. 바르트의 논의는 이전의 영화미학에서 부족하게 다뤄진 관객의 경험적 측면을 새로운 의미의 층위로 확립했다는 점에서 여전히 유의미하다.

 ‘무딘 의미에 대한 대안적 접근’은 영화 담론에 대한 성찰을 촉구한다. 인터넷 시대의 영화 담론은 어떻게 형성되는가. 이에 대하여 나는 ‘열린 담론에의 반대, 열린 담론으로의 귀환’을 내어놓는다. 어떤 것을 예술이게 하는 예술성은 작가의 가치관이든 형식이든 근본적으로 작가와 닿아있기에, 의미체계 바깥으로 열린 담론을 반대한다. 무딘 의미를 ‘과잉’으로 봄으로써 작가가 구성한 의미체계를 존중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입장이다. 그러나 담론은 참여의 차원에서 열린 담론이다. 영화적 경험의 차원에서 열린 담론은 가능하다. 작품에 대한 관객의 경험(관람+의미작용+실천적 행위)에 수많은 개인성이 개입하면서, 영화적 경험은 무한히 확장되며, 이를 공공연히 공유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인터넷 기반의 OTT는 극장에 종속되었던 관람의 시공간을 자유롭게 열어주었고, 의미를 공유하고 평가하는 영화적 실천은 인터넷을 통해 그 물리적 도달 범위가 전 세계로 확장되었다. 인터넷이 뿌리내린 오늘날 영화 담론은 의미체계에 대한 사유와 영화적 경험의 개인성이 맞물려 터져 나오는 ‘열리지 않은, 열린 담론’이 아닐까.                                                                                     



논평 대상: 롤랑 바르트, <제3의 의미>, ≪이미지와 글쓰기≫, 김인식 역, 세계문화사, 1993).     



-정연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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