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사랑 맞죠?

by 송재영


“다혜가 민우를 처음 만난 것은 봄날의 오후였다.” 최인호 작가가 쓴 소설 <겨울나그네>의 첫 문장이다. 새 학기를 맞는 캠퍼스는 아직 쌀쌀한 겨울의 흔적이 남아 있지만 곳곳에는 봄꽃들이 다투어 피어나고 있었다. 다혜가 제법 가파른 오솔길을 뛰어내려 큰길로 접어드는 순간, 어디선가 나타난 자전거가 빠르게 그녀의 곁을 스쳐 지나간다. 다혜는 이를 피하려다 균형을 잃고 비명을 지르며 볼썽사납게 길가에 넘어졌다. “미안합니다.” 그녀의 머리 위에서 웬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렇게 다혜와 민우의 운명 같은 첫사랑이 시작되었다.


우리는 첫사랑을 말할 때 소설처럼 멋진 우연 같은 아름다운 만남이기를 기대하고 꿈꾼다. 나도 대학에 입학하면서 누구나 부러워하는 운명 같은 첫사랑이 찾아오리라는 환상 같은 꿈을 꾸었었다.

국민학교 4학년부터는 남녀 분반으로, 중·고등학교는 남자고등학교를 다니다 보니 여학생을 만날 기회가 한 번도 없었던 나에게 대학 캠퍼스는 그야말로 신세계에 있는 것 같았다. 신입생을 맞이한 캠퍼스는 삼삼오오 몰려다니는 여학생들의 왁자지껄한 웃음소리와 경쾌한 발놀림으로 만물이 소생하는 봄의 향연을 펼쳐 보이는 듯했다.


나의 첫사랑도 봄과 함께 찾아왔다. 같은 과에 다니던 아직 시골티가 빠지지 않은 앳된 모습의 여학생이 나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적당한 키에 미인형의 얼굴은 아니나 갸름하고 수수한 얼굴에 유난히 잘 웃던 그녀 주위엔 항상 친구들이 많고 인기도 많았다. 천생 숙맥이던 나로서는 마음만 있을 뿐 그녀 앞에 서면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말조차 붙일 수 없었으니 그 답답함은 나뿐만 아니라 나의 마음을 어렴풋하게나마 알고 있었을 그녀도 적지 않았을 것이다.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좋았고, 같은 캠퍼스에 있는 것만으로도 감사했던 시간들이 층층이 쌓여 가면서 사랑은 아픔으로 변해 가기 시작했다.

생명이 움트던 새싹이 낙엽으로 변해하고 생기발랄하던 신입생들도 먹고 대학생으로 변해 갈 때까지 나의 그녀 바라기는 말 한마디 건네지 못하고 그렇게 흘러가고 있었다.


그 무렵 새로운 도전을 시작하면서 그녀에 대한 나의 마음도 정리해야 하는 것이 아닌지 고민을 하면서 친구에게 상담을 청했다. 그는 나의 사랑을 처음부터 들어주고 같이 고민해주고 이해해주며 조언해 주었던 유일한 친구였다. 그 친구도 나와 비슷한 시기에 같은 과에 있는 여학생과 첫사랑을 시작했으나, 불행인지 다행인지 그 여학생과의 만남이 순조롭지 못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본인 연애도 못하는 친구로부터 조언을 들었으니 나의 사랑이 이루어지기 어려웠음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 아니었나 싶다.


우리 둘은 서로의 아픔을 나누며 날이 새는 줄도 모르고 막걸리를 마시며 우리들의 진정한 사랑을 몰라주는 그녀들과 세상을 원망하였다. 그땐 세상 연인들의 사랑 고민이 우리들의 고민이었고, 드라마나 영화 속 주인공의 사랑이 우리들의 이야기였으며, 모든 사랑의 아픔과 실연에 대해서는 우리들이 대신 아파하고 슬퍼해야 할 것처럼 느껴지곤 했다.


친구의 조언은 끝낼 때 끝내더라도 말이라도 한번 해보라는 것이었다. 대학 앞 지하 음악다방에서 우리 둘은 커피를 가운데 두고 마주 앉아 어색하지만 처음이자 마지막인 만남을 가졌다. 그녀와의 인연은 그게 전부였다.

그녀가 생각나고 보고 싶을 때면 그녀가 자주 걷던 중앙도서관 계단에도 앉아 보고, 마당에 수국이 가득 피어 있던 그녀의 시골집에도 가고, 그녀와 만났던 음악다방에 앉아 커피를 마시기도 하면서 그녀를 향한 그리움의 공간을 채우곤 했다. 물론 이 모든 순간은 조언자 친구와 함께했다. 그 친구도 나처럼 처음 만난 사랑에 굴곡이 많아 나만큼이나 힘들어했으니 우리 둘은 천생연분이 따로 없었다.


사람의 마음은 끝낸다고 잊어지는 것이 아니었다. 새로운 도전이 혼자서 이겨내야 하는 일이다 보니 그녀에 대한 마음은 지워지기보다 나를 지탱해주는 버팀목으로 남게 되었다. 아직도 그녀의 마음이 어떠하였는지는 모르나 나의 그녀에 대한 마음은 진심이었다.


내가 <겨울나그네>를 만나게 된 것은 그 무렵이었다. 중앙도서관 신문대에서 우연히 만난 동아일보 연재소설 <겨울나그네>는 못 이룬 사랑의 미련과 혼자라는 외로움으로 위로가 필요했던 나에게 매일 편지로 전해졌다.

다혜와 민우의 사랑도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사실 말고는 나의 사랑과 전혀 같은 모습이 없음에도 가판까지 찾아다니며 나의 이야기처럼 아파하고 슬퍼하며 못 이룬 사랑에 대한 미련을 조금씩 씻어 냈던 것 같다.

그녀에 대한 마음은 졸업을 하고 군 생활을 하는 동안 사랑 조언자인 친구로부터 그녀의 결혼 소식을 듣고서야 길고도 힘들었던 여정을 마칠 수 있었다.


고백건대, 시작도 하지 못한 사랑을 마친다는 것이 혼자 북 치고 장구 치는 형상이다 보니 억울한 마음이 있기는 하지만 다른 사람에게는 사랑이 아니었다고 보여도 어쩔 수 없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을지도 모르겠다.

생각이 여기에 이르니 나와 그녀와의 사랑은 무엇이었는지 궁금해진다. 나는 그녀와 이루어지지 않은 첫사랑을 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지금도 그녀와의 만남이 첫사랑이었다고 강변하고 있다. 곁에서 이런 강변을 듣고 있는 나의 아내는 알지 못할 미소를 지으며 재미있다고 한다. 당연히 화를 내야 하는 아내가 왜 재미있다고 하는지 나는 아직도 이해하지 못한다. 아니 이해하고 싶지 않다.


재밌어하는 아내를 약 올릴 요량으로 대학 앨범을 끄집어내서 나의 졸업 사진을 펼쳐본다. 아내의 얼굴이 조금씩 경직되며 웃음기도 사라지는 걸 느낄 수 있다. 나의 첫사랑이 맞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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