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 끼니가 소중한 우리의 일상
이 세상 또 어딘가에 있을 딸들을 위한 작은 시작...
아주 오랜만에 주방 한켠의 책장을 열어보니 요리책이 빼곡히 줄 서있다.
신혼 요리에서부터 이유식을 거쳐 도시락, 그리고 다이어트 식단에 디톡스까지... 결혼생활의 지나간 흐름이 한눈에 들어오면서 한편으로는 참 손길 안 가는 책들을 열심히도 모았구나 싶다. 그래도 뜬금 책장을 넘기다 보면 잊고 있던 음식들을 발견하게 되고 그날의 새로운 메뉴가 탄생하기도 한다.
막내딸이자 외할머니 껌딱지였던 나는 할머니가 시장을 나설 때면 항상 따라다녔다. 계단을 오를 때면 뒤에서 밀어드리고 물건을 사면 들어드리고... 성격이 밝으셔서 시장에 들어서면 온통 할머니 당골 가게였다. 여기저기 인사 소리에 민밍하게 졸졸 따라다니며 구경하는 게 어린날 나의 재미이자 일상이었다. 일본에서 오신 할머니가 해주시는 요리에는 국경이 없었다. 정통 일본요리에 퓨전 한국요리에 서양 메뉴까지 다양했다. 젊은 시절 타셨던 스쿠터를 다시 타고 싶어 하셨지만 엄마의 만류로 접으시고 막내 손녀랑 범퍼카 타시다가 갈비뼈 금이 가시고 개를 너무 좋아하셔서 잘 때 안고 주무시다가 엄마한테 잔소리 들으시고 영화 보며 홍차에 위스키 한 방울 타서 드시던 멋과 맛을 아시는 유쾌한 우리 외할머니 손에 세 명의 손녀가 컸다.
그렇게 할머니 음식을 먹고 자랐는데... 그래서 곁에 계신 할머니가 너무 당연하다고 생각했는데 어느 날 뇌병변으로 갑자기 쓰러지시고 오른쪽 몸을 못 가누시더니 말을 못 하게 되셨다. 그렇게 5년을 누워만 계시다가 하늘로 가셨다... 아프신 동안 막내 손녀의 단 한 소원은 멀쩡한 정신의 할머니와 유쾌하게 단 한 번이라도 대화하고 싶다는 거... 당뇨에 투석 중이셔서 죽밖에 못 드셨지만 가끔 좋아하시는 초밥이나 주먹밥 갖다 드리면 아이처럼 신나 하셨다. 할머니의 손맛이 그리운데... 미처 여쭤볼 겨를도 기회도 없었다. 할머니의 고구마순 조림도, 나가사키 짬뽕도 레시피가 너무 궁금한데 알 수가 없다. 그런데 더 슬픈 건... 할머니가 만들어준 음식들이 뭐가 있었는지 기억이 안 난다는 거다... 태어난 순간부터 20년이 넘게 먹고 자랐는데... 맛있고 그립다는 기억 외에 더 구체적인 게 점점 사라지고 있어서... 할머니와의 추억이 사라지는 것 같아서...
그래서 딸들을 위한 레시피북을 만들자고 결심했었다.
할머니에 대한 저만큼의 기억 한 자락과 많은 책들을 보며 연구했던 저염, 저당, 오가닉에 내 성격을 고스란히 담은 초스피드 레시피로 365일 집밥을 먹은 딸들이 훗날 갑자기 엄마 밥이 그리울 때 꺼내볼 수 있고 그 빈자리가 조금이라도 따스하게 채워질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포토북을 만들고 있었다. 창피하고 소심한 마음에 이 세상 딱 두 권의 책으로...
그런데 어쩜... 나처럼 할머니 밥이 그리운 누군가가 있지 않을까... 훗날 엄마 밥이 그리운 젊은 청춘이 있지 않을까... 싶은 마음에 조심스레 별거 아닌 걸로 별거스럽게 용기를 내었다.
거창한 메뉴도, 근사한 그릇도 없지만 소소한 일상과 흐르는 사랑을 꾹꾹 눌러 담는 게 엄마 밥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