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생적인 어머니 밑에서 자라 결혼 전엔 집안일이라는 것을 해본 적이 거의 없습니다.
위생적으로도 예민하지 않아 환경이 더러워도 적당히 살고, 옷이 더러워도 툭툭 털고 입습니다.
그런 제가 가장 잘 방치하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화장실입니다.
우리 집에서 화장실 청소는 제 담당인데,
제 아내는 항상 화장실이 더럽다고 합니다. 분명히 제 눈에는 더러운 것이 안 보이는데 말이죠.
어쨌든 더럽다고 하니 저는 청소하러 들어갑니다.
청소가 끝나고 나면 더럽긴 더러웠다는 사실을 깨닫고 마음이 뿌듯해집니다.
이렇듯 '방치'라는 것은 알고도 내버려두는 방치도 있지만
잘 몰라서 하는 방치가 더 많은 것 같습니다.
그럴 땐 옆에서 말해주면 됩니다. '화장실이 더러워'라고 말이죠. 그럼 청소를 할 수 있습니다.
저는 회계사로써 여러 회사를 방문할 일이 많습니다. 주로 재무제표를 보기 위해서죠.
그런데 작은 회사의 경우 재무제표가 수준 낮은 상태로 방치되어 있는 경우도 많습니다.
재무제표는 기업의 얼굴이자 핵심 정보인데, 어떻게 방치될 수 있을까요?
그건 사실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안 한 것이 아니고, 잘 몰라서 못한 경우가 더 많습니다.
관련 지식과 경험이 있는 임직원이 내부에 없는 경우 말이죠.
거기다 재무제표는 화장실 청소와 같이 간단한 일은 아니어서
오랫동안 제대로 관리되지 않으면 상당히 부정적인 결과를 초래하기도 합니다.
예를 들면 어떤 일이 있을까요?
다양한 사례가 있겠지만 저는 부실한 재무제표로 생기는 사건 중 5가지를 추려봤습니다.
최근 스타트업들은 재고자산이 전혀 없는 업종도 많지만, 아직 많은 회사들이 물건을 파는 것을 주 영업으로 하고 있습니다. 물건을 팔게 되면 품목별로 몇 개가 들어왔고, 몇 개가 나갔으며, 현재 몇 개가 남아있는지 체크하고 관리하게 되는데요. 이를 회계에서는 재고수불부 라고 합니다.
당연히 물류를 관리하고 있는 담당자에게는 품목별 수량을 관리하는 파일이 있을텐데요, 회계에서는 이를 이용하여 재고수불부라는 문서를 만들고, 각 품목별 수량에 금액을 입혀서 회계결산을 합니다. 이는 필수적인 절차인데요, 그러나 이 재고수불부라는 문서를 만들지 않는 회사가 생각보다 많습니다.
이게 없으면 일단 ① 품목별 수익성을 확인하기가 어렵습니다.
품목별로 얼마에 사고팔았는지에 대한 정보가 있어야, 경영진은 어떤 품목을 더 생산하거나 판매할 것인지 경영전략을 세울 수 있을텐데요, 이 수불부가 없으면 그저 팔리는 제품 위주로 주먹구구식 의사결정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② 안 팔리고 쌓여 오래된 품목이 존재하여 기업의 실적을 망치는 주범이 되기도 합니다. 수시로 재고현황을 모니터링하여 잘 안 팔리는 것은 세일을 하거나 처분을 해야 할 텐데 그 판단이 늦어지면, 결국 창고관리비용만 늘어나다가 나중에 한 번에 손실로써 장부에 반영되기 때문에 재무제표에 매우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칩니다.
이것도 상당히 빈번하게 발생하는 일입니다. 다수의 거래처와 거래하고 있는 회사의 경우 통장의 입출금 내역과 거래처에게 받을 돈과 줄 돈을 체크하는 작업이 매일 필요합니다. 하다 보면 입금자명이랑 거래처명이 다른 경우도 있고, 헷갈리게 써져 있는 경우도 있는데.. 이러면 일일이 전화도 해야 되고 번거로운 일이 생기게 마련입니다. 이거 귀찮다고 명확하게 정리 안 하고 쌓아두다보면 거래처별로 받을 돈이 총얼마인지 알 수 없게 됩니다.
원래 받아야 할 금액이 1천만원인데, 입금이 5백만원밖에 안되었더라도 거래처에게 따지고 달라고 할 수 있는 증거가 없어지는 것이니.. 결론적으로 아까운 현금이 나가는 것과 동일한 결과가 나타납니다.
이건 사고라기보단 안타까운 일입니다. 기업의 경영자는 상당히 많은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됩니다. 특히 중요한 것은 제품과 서비스의 개발일 텐데요, 일단 먼저 테스트를 해보고 되겠다 싶은 품목에 집중적으로 자원을 투자하게 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게 제품/서비스별 매출에 대응되는 원가를 정확하게 구분하는 것입니다. 정말 단일 상품을 취급하는 것이 아니라면 ① 각 품목에 어떤 원가가 발생하는지, ② 어떤 항목이 변동비이며 고정비인지, ③ 언제 어떤 방식으로 발생하는 비용인지 명확하게 구분하여 내부적으로 관리하고 있어야, 의사결정의 실패 가능성을 줄일 수 있습니다. 경영자의 의사결정 실패는 어떤 사고보다도 큰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중요합니다.
초기기업의 경우 자금관리 및 회계결산 업무를 한두 명의 직원을 통해 관리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렇게 될 경우 회사의 자금을 직원이 마음대로 사용할 가능성이 있어 위험한데요, 사람이 부족하니 어쩔 수 없죠. 초기에는 그래도 유출입되는 자금의 규모나 횟수가 많지 않아 크게 위험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기업이 성장하고 수십억원대의 매출이 발생하게 되면, 경영진이 자금의 흐름을 세세하게 알기 어려워집니다. 자금이 나갈 때마다 대표가 승인한다고 하더라도 일일이 모든 내용을 감독하기는 쉽지 않죠.
그렇게 되면 직원이 허위로 매출채권을 쌓거나, 임의로 법인카드를 지출하는 방식 등으로 횡령이 가능해집니다. 그게 가능한가? 싶은 의문이 드는 분도 계시겠지만 실제로 직원에 의한 자금 횡령은 생각보다 자주 발생하는 사고입니다. 견물생심이기 때문에, 그 돈에 접근할 수 없도록 내부절차를 잘 갖추어야 합니다.
재무제표가 정말 관리되지 않은 채, 외부 회계법인에 의한 회계감사를 받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 정도가 심하면 감사의견으로 적정의견이 아닌 한정의견이나 의견거절 등의 의견을 받는 경우가 생깁니다.
기업의 창업자 외 이해관계자가 없는 경우 감사의견이 비적정이어도 크게 지장이 없을 수도 있는데요, 만일 금융기관으로부터 투자를 받거나 차입을 한 경우 비적정의견의 감사보고서는 치명적으로 작용할 수도 있습니다. 보통 대출계약서에 적정의견이 아닌 감사의견을 받는 경우 기한이익을 상실한다(즉시 회수하겠다)라고 써져 있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될 경우 문제를 수습하기 위해 제대로 회계결산을 다시 해야하고, 감사인에게 재감사를 받는 과정을 거치게 되며 이 과정에서 수억원의 비용이 추가로 발생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사업가가 개발도 잘하고, 영업도 잘하고, 조직관리도 잘하고, 회계까지 잘하면 완벽하겠지만 우리는 그런 사람을 비인간적이라고 합니다. 쉽지 않은 일이죠.
그중에서도 특히 회계에 대한 관심은 가장 뒤로 미루고 계신 경영자가 많습니다. 평소에 시급한일이 워낙 많기 때문이죠. 하지만 미루고 미루다 문제가 쌓이면 위와 같이 여러가지 사고가 발생하거나 사업의 실패로 다가오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회계를 위해서도 유능한 인재를 내부에 두거나 외부에서 전문가의 도움을 받아야 합니다.
그것은 단순히 사고가 안 나게끔 장부를 정리해야 하기 때문이 아니라,
중요한 의사결정에 꼭 필요한 정보를 제공하는 사업의 핵심영역 때문이라고 이해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