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양성(DEI)에 눈을 뜬 계기

by 케이다 Kdiversity

HR 영역에서 평가/보상, 노무, 채용 등 소위 HRM이라고 불리는 영역들을 위주로 경력을 쌓아 왔다. 그러니까 HR 중에서도 '하드 팩터(Hard Factor)'들과 친했다. 그러다가 다양성/DEI라는 HRD 영역, '소프트 팩터(Soft Factor)'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결정적인 사건이 있었다. (물론 다양성/DEI는 HRD라고 구별짓거나 제한할 수 있는 개념은 절대 결코 아니다. 편의상 이분법적으로 설명한 점 양해를 구합니다.)


아마도 평소라면 그냥 지나쳤을 일상의 순간이었던 것 같은데, 책 『다이버시티 파워: 다양성은 어떻게 능력주의를 뛰어넘는가』를 본 직후에 이런 일을 겪게 되어 더 크게 와닿았을지도 모르겠다. '복잡한 문제에 직면할 때 다르게 생각하는 사람들과 함께 일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지'를 몸소 느낄 기회였다.




사기업에서의 과장 vs. 공직사회에서의 과장


어느 날, 나를 포함하여 새로운 프로젝트 팀이 꾸려졌다. 모두 같이 일하는 것이 처음이라 이런 저런 얘기들을 하며 유대관계를 형성하고 있었는데, 내가 OOO 과장이라고 자기소개를 하니, 팀 멤버가 깔깔대며 입사 초 본인의 에피소드를 전했다.


본인은 정부부처에서 일하다 사기업인 이 곳으로 이직했는데, 처음에 과장이 너무 많아서 깜짝 놀랐단다. 공직에서의 과장이라 함은, 진짜 '과(科)'의 '장(長)'으로서 5급 이상의 매우 높은 고위공무원이라고! 밑에 팀원들도 엄청나게 거느리는 직책자 중의 직책자라고! 대기업으로 치면 부장급에 대응하는 수준이라고 했다.


공무원(공직)에서 과장은 상당히 높은 직위에 해당한다. 공직사회에서 과장은 중앙부처나 지방자치단체에서 행정청의 보조기관 한단위(실-국-과)로서 조직직제상 매우 높은 자리이다. 통상 3~5급 공무원이 과장보직에 임용되며, 이는 5급 공채(구 행정고시) 출신도 중앙부처에서 채용 후 12~14년이 지나서야 오를 수 있는 직책이다. 중앙부처와 광역지방자치단체, 광역단위 특별지방행정기관에서는 3~4급, 기초지방자치단체나 기초단위 특별지방행정기관에서는 5급인 경우가 대다수이다. 교육부 과장이면 웬만한 교수들과, 보건복지부 과장이면 대형병원 과장과도 맞먹을 수 있다. (출처: 나무위키)


세상에. 같은 '과장'이라는 단어를 이렇게 다르게 받아들일 수 있다니. 사노비로서 사기업 밥만 10여 년 간 먹어온 내게 '과장이 하늘같이 높다'라는 발상 자체가 너무나 신선했다.


이 정도 일상의 작고 사소한 차이 정도야, 해프닝으로 재미있게 넘길 수 있었는데, 사실 이 대화를 나누면서 아찔했던 점은 따로 있었다. 바로... 우리가 지금 프로젝트 팀으로 모인 이유는 '사기업'인 고객의 발주를 받아 프로젝트를 수행하기 위함인데 이 친구를 데리고 어떻게 한담?하는 걱정이었다.


정부행정기관 근무이력이 도대체 사기업 인사(보상) 프로젝트에 무슨 도움이 될까?


고객은 재단법인을 보유하고 있었고, 국내 선도그룹 산하 재단법인 직원들의 보상 수준 벤치마킹을 의뢰했다.


보상 벤치마킹은 프로젝트 중에서도 까다롭기로 유명하다. 워낙 기밀이다 보니 기업들마다 보안을 엄격하게 유지하기 때문이다. 프로젝트를 푸는 열쇠는 대부분 1) 네트워킹 (90% 이상), 2) 언론보도 및 3) dart 공시를 통한 역산 등이다.


보상 업무를 오랫동안 했기에 여러 네트워크를 통해 대기업 및 빅테크 연봉 수준을 잘 알고 있었는데 (기본급, 성과급, 연간 인상률 등) 당최 '재단법인'의 보상 수준은 어떻게 구해야 할 지 막막했다. 아무리 인맥을 파고들고 구걸한다 한들, 그 소수집단의 인사담당자를 제가 어떻게 컨택을 할 수 있겠으며 정보를 어찌 구하오리까. 몇 백명 규모의 인사담당자 카톡방에 속해 있지만, 거기서 몇 다리를 건너도 도무지 닿을래야 닿을 수가 없었다.


이렇게 답답한 상황에 심지어 사기업의 '사'자도 모르는 공직(정부부처) 출신 팀 멤버라니. 이 프로젝트는 정말 '숫자'를 가져다 주지 않으면 안 되는 프로젝트인데 어떻게 하지 막막하기 그지없었다.



그런데 그 '공직' 출신 멤버의 기지가 정말 대단했다.

본인의 경험을 바탕으로 '사회복지법인 = 공공기관'이라는 점을 이용해서, 재단법인이 속한 구청에 "정보공개청구"를 했다. 즉, 공공기관에 대한 "행정력"을 활용한 것이다. 그리고 그 강제적인 구속력의 힘이란 정말이지 어마무시했다.


내가 백날 머리를 쥐어 싸매도 생각지도 못할 방법으로 문제를 풀어낸 거다. 방에 1주일 동안 가둬놓고 생각해 내라고 해도 나는 아마 이 방법을 절대 떠올리지 못했을 거다.


결국 우리는 직원 개개인의 보수까지는 알 수 없었지만, 합법적인 테두리 안에서 나름 유용한 '숫자'들을 알아낼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숫자가 큰 힌트와 실마리가 되어 차근차근 다음 단계를 밟아나갈 수 있었고, 프로젝트는 고객에게 박수 받으며 아주 성공적으로 끝났다.



그 때 깨달았다.

"아, 모두의 백그라운드는 각각 나름나름으로 귀하고 소중하구나. 모두가 각자의 강점과 역량을 지니고 있구나. 그걸 무시하지 않고 발견하고 꺼내주고 활용하고, 또 잘 써먹을 수 있도록 믿어주고 판을 깔아주는게 리더구나."


만약 누군가 우리 프로젝트 내에서 그 멤버를 '너 보상 프로젝트 안 해 봤잖아', '너가 사기업에 대해 뭘 아는데?' 라는 태도로 대했다면, 결코 그의 경험은 빛을 발할 수 없었을 것이다. 나는 (그 때까지만 해도) 책 『다양성은 어떻게 능력주의를 뛰어넘는가』의 CIA처럼 너무나 전통적인 방식으로만 성공을 판단했던 거다. '일을 잘하는 것/프로젝트가 잘 끝나는 것이 중요해, 다양성은 탁월함을 약화시킬거야, 우리의 예리함을 손상시키면 안 돼'라고 생각했다. 어리석게도.


내일의 나는 덜 오만하길 바라며, 덜 교만하길 바라며, 책에서 나온 문구를 되새긴다.


소수자의 관점은 압도적인 효과가 있어서가 아니라 서로 다른 관심과 생각을 자극하기 때문에 중요하다. 그 결과 소수자의 관점은 비록 잘못됐다 하더라도 모든 상황을 감안할 때 질적으로 더 나은 참신한 해결 방안을 찾는 데 도움을 준다.
(심리학자 샬런 네메스)




이 일이 있고나서 돌아보니, 지금까지 모든 회사/일상에서의 장면 장면에 다양성이 숨어있었다. 흠칫 흠칫 놀라고 신기해하고 재미있어했던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였다.


그 얘기들을 조금씩 떠올려 볼까 한다. 순수 토종 한국 기업에서만 일해온 내가 마주해 온 일상의 DEI들. 단순히 성별뿐만 아니라 나이/세대, 고향, 장애 여부, 업계 특성, 조합 존재 여부, MBTI 등등... 많은 분들께서 흥미로워 해 주시고 또 공감해 주시리라 믿는다. 혹은 지금 당장은 공감하지 못하시더라도, 천천히 스며드시지 않을까 혹은 서로 다양한(!) 의견을 주고 받는 좋은 경험이 되지 않을까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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