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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eon Sep 17. 2024

제가 보호자입니다

죽어도 여자친구의 보호자가 될 수 없는

정말 오랜만에 브런치에 들어와 글을 쓰는 것 같다

부당해고 구제신청을 끝내자마자 이사를 했고,

직후에 여자친구는 대학병원에서 수술을 했다.


2년 계약직이었던 내 뚠빵이(애칭입니다)는 

퇴사를 하자마자 정밀 검사가 필요하다는 결과를 듣게 되었고

동네 산부인과에 가서 33년 인생 처음으로 대학병원으로 가야한다는 소식을 접했다.

나는 동네 산부인과에서는 대기실 의자에 앉아 결과가 나올 때까지 기다렸고

대학병원에서는 간호사와 의사분이 '보호자'라는 명칭으로 날 불러주어 옆에 앉아

추후 진행될 수술과 입원에 대해 설명을 들을 수 있었다.


물론, 중간 중간 어떤 관계인지 물으면 나는 친구라고 답하려고 했고

뚠빵이는 동거인이라는 말이 있는데 왜 자꾸 친구라고 하냐고 타박을 줬지만.


무튼 그게 6월 쯤이었고, 수술은 8월 말이었는데

간호통합병동 혹은 보호자 1인 상주 입원을 선택할 수 있었다.

뚠빵이는 내가 힘든 게 싫다며 통합병동을 선택하려고 했지만

복강경 수술 선배이자 여자친구였던 나는 

복강경 수술 후 얼마나 보호자의 도움이 많이 필요한지 알기에 

내가 들어가겠다고 했다.


입원 날이 되었고 준비물을 챙겨 입원 수속 창구로 갔다.

다시 한번 간호통합병동으로가 아닌 보호자 상주 입원이 맞는지 확인했고

나의 이름과 휴대폰번호 그리고 관계를 물었다.

동거하는 친구라고 답변하니 직원이 대답했다.


상주하시는 건 문제가 되지 않지만 긴급 상황이 생기면
법적보호자에게 연락해야 하니 정보를 알려주세요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내가 직접적인 보호자가 될 수 없다는 게 와닿았던 순간.

그 후로 입원 안내를 들을 때도, 간호사에게도 

나는 여자친구의 '보호자'지만 '보호자'가 아니었다.


사실 그 뒤로는 문제가 없었다. 내가 상주 보호자기에 수술 관련 안내 문자가 나에게 왔고

법적 보호자가 호출될만한 긴급한 상황도 발생하지 않았기에.


하지만 묘하게 신경 쓰였던 건,

우리가 들어간 병동은 산부인과 병동이었다.(뚠빵이는 기형종과 근종 수술을 했다)

4인실이었는데, 우리를 제외한 3명 

그리고 어르신들이 계시는 병실 외에는 대부분 출산을 하기 위해 입원하셨던 것 같다.


보호자로 들어온 분들은 거의 1분을 제외하고는 남성분들이셨는데

예상할 수 있듯 남편이었다.

같은 층에는 신생아실, 분만실, 신생아 응급실이 있었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 곳을 왔다갔다하거나 그 곳에서 병실로 옮겨왔다.


그들은 진짜 보호자 일 수 있었다.

남자와 여자가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아 가족을 이룰 수 있는 병동.


물론 병실에서는 커튼을 치고 있어 모든 분들을 한번에 볼 수는 없었지만

대부분 남편(보호자)이 왔다갔다 하거나 걷기 위해 복도에서 마주쳤을 때는

의아한 눈빛들이 오고갔다.

내 기분 탓이고 혼자 괜히 찔려 그런 걸 수도 있겠으나.. 

아직 사회적으로 눈치를 안보기엔 어려운 것 같다.


뚠빵이는 아직 집에 커밍아웃을 하지 않았고,

집에는 면회를 오지 않게 하기 위해 간호통합병동으로 들어간다고 했다.

(나의 존재를 알고 있는 동생은 내가 들어간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나는 수술을 마치고 뚠빵이가 올라오기 전에 뚠빵이의 휴대폰 충전을 하려다가

어머니의 카톡글을 미리보기로 보게 되었는데


00아, 이 카톡 보면... 이라는 서두로 메시지가 와있었다.

내 이름은 남자들은 쓰지 않는 이름이기에 뚠빵이의 가족들은 동생을 제외하고

중성적인 내 동생의 이름으로 알고 있었고, 00에는 그 이름이 적혀있었다.

서운했다.

내 여자친구와 3년 반을 만났고, 동거를 하고 있지만

우리 가족과 주변 지인들을 제외하고 나는 내가 아니었다.


항상 동생의 이름으로 불리던 나였지만 병원에서 '진짜' 보호자로 인정받지 못한 것에 대해

조금은 서글펐던 감정 때문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서운했다.

인생의 절반을 경험해왔었던 일이었지만 말이다.

사실 뚠빵이의 집 커밍아웃 때문에 계속 둘이 다퉈오던 일들도 있어서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뚠빵이가 병실에 올라오고,

카톡에 대해 말해주었고 어머니께 수술이 잘 끝났다고 카톡을 보냈다.

뚠빵이가 보낸 것처럼 내가 타자를쳐서 보냈고 조금 나아진 후에는 전화를 드렸다.

그 때도 나는 아무 말도, 아무 소리도 낼 수 없었다.

간호병동에 있었기에 내 소리가 들리면 안되니까.


3년이 넘게 수없이 많은 동일한 상황들이 있었다.

나는 항상 숨죽였고, 모르고 소리를 내면 뚠빵이는 인상을 찌푸리며 입모양으로 엄마라고 말했다.

나는 없었다. 아니, 있었지만 없는 척을 해야했다.

남자친구로 알고 있기에, 내가 여자라는 사실을 알아서는 안됐다.

병원이라는, 순전히 가족들만을 보호자로 인정해주는 그 공간에서

나는 내 존재를 철저히 지워야 했다.


차별 금지법 혹은 성소수자들의 이야기가 나오는 뉴스에는 참 댓글이 많다.

니들 맘대로 해라, 대신 내 앞에 그리고 세상앞에는 나오지 마라.

저게 뭐가 자랑이라고 저렇게 드러내려고 하냐

니들 부모가 아냐, 가족들에게는 말할 수 있냐

어디 섬 하나에 가둬놓고 격리시키고 지들끼리 살라고 해라


나는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이해받고 싶은 게 아니다.

우릴 이해해주는 사람들과만 살고 싶다 나도.

그냥,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지킬 수 있는 권리를 보장받고 싶을 뿐이다.

하지만 사회가 바뀌고 법이 바뀌어야 우리의 권리가 보장될 수있고

하다 못해 보호자가 되어 지키고 책임질 수 있는거다.

만약 내 애인이 세상을 떠났다고 한대도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우린 남이니까.


얼마전에 뚠빵이가 그랬다. 피가 섞인 가족은 다르다고.

어떤 맥락이었는지는 기억이 안나지만 그 말이 아팠다.

우리는 그럼 평생 가족이 될 수 없는거냐고, 우리 엄마 아빠도 피 한방울 안섞였지만

가족이지 않냐고 우리는 그렇게 될 수 없는거냐고 했다.

뚠빵이는 그건 모르지 시간이 지나봐야 알지, 라고 하길래 더 대화를 이어가지 않았다.


우리보다 짧게 만난 남녀커플은 결혼하여 벌써 출산을 하기도 하고

가족이 된다.


가족이 뭘까? 피가 섞였다는 게 뭘까?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말을 부정하진 않지만, 피만이 가족을 이룰 수 있는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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