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 거 주문했다고 생설탕을 주시면 어떡합니까?
저는 상업영화와 예술영화의 기준을 거시와 미시로 봅니다. 도식화를 싫어하지만, 설명을 위해 굳이 예를 만들어 비교해 말하자면, 상업영화가 ‘보편적 권선징악’을 주제로 삼는다면, 예술영화는 ‘보편적 윤리의 모순’을 주제로 삼습니다. 거시적인 관점을 보여주는 상업영화는 직접적이고 일반적이지만, 미시적인 관점을 보여주는 예술영화는 간접적이고 개인적입니다. 바나나 한 송이를 보여주면 바나나라고 인식하지만(거시), 껍질을 제거한 바나나의 단면을 확대해서 보여준다면, 그것이 바나나인지 쉽게 유추할 수 없는 것처럼요(미시). 어떤 시각이 더 우월하다고 말하려는 게 아닙니다. 다만 용도가 다른 것뿐이죠.
범죄도시 4는 상업영화입니다. 그 누구도 범죄도시에게 철학적 물음이나 사회적 메시지, 인간의 모순에 대해 말하길 바라지 않습니다. 그저 호탕한 웃음과 통쾌한 액션을 원하죠. 하지만 그 호탕한 웃음과 통쾌한 액션마저 조악하다면 어떨까요?
마석도는 빌런을 잡으러 갑니다. 이번 빌런은 필리핀의 사설 도박 사이트를 관리하는 백창기와 운영하는 장동철, 이 둘입니다. 작업비로 10억을 요구했던 장첸, 몸값으로 5억을 요구했던 강해상, 하루에 몇 억을 벌어들이는 장동철. 너무 큰 규모를 감당할 수 없었기 때문일까요, 이야기는 이상하게 흘러갑니다.
일단, 빌런들이 너무 빌런 같지 않습니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의 안톤 쉬거처럼, 거대한 재앙 같이 느껴졌던 장첸과 강해상. 이 둘은 관계되지 않은 시민들까지 무참하게 살해하는 잔혹함을 보여줍니다. 하지만 백창기는 거대한 악이라는 인상을 주지 않습니다.
오히려, 다른 사설 사이트를 강제합병하기 위해 영업장을 부수는 걸 보고는, '어? 저 사람 착한 사람인가?'라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악을 처단하는 악, 이이제이, 다크나이트. 물론 첫 장면에서 사람을 죽이고, 후반부엔 근로자분에게 중상을 입히긴 했지만, 그 두 장면만은 그저 필요에 의해 넣었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습니다(이유는 뒤에서 밝히겠습니다). 장동철 역시 빌런이라는 인상을 받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인간의 욕심을 역이용해 돈을 버는 사람 정도로 보였을 뿐입니다. 게다가 그의 최후 역시 의문을 감출 수 없었습니다. 저렇게 허무하게 죽을 거였으면, 백창기는 지금까지 왜 참아온 걸까? 장동철이 권 사장에게 사주했기 때문에? 그로 인해 배신감을 느껴서? 아니면 이젠 더 이상 참을 수 없어서? 그렇다기엔 백창기와 장동철의 감정선이 영화에 제대로 나와있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장동철이 죽을 때, 통쾌함보다는 당황스러움이 먼저 느껴진 것 같습니다. 장동철 역시 단순하게 소비되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습니다.
마석도의 감정선도 1과는 다릅니다. 1에서 '장첸을 잡아야 한다'는 감정이 막내 형사(강홍석)의 부상으로 인해 '장첸을 잡고 싶다'로 격양됩니다.
그 뒤, 대림동에서 식당을 운영하는 왕오의 할아버지와 왕오가 다친 것을 보고 '내가 죽더라도 장첸은 꼭 잡는다'로 감정선이 바뀌죠.
그 때문에 화장실에서 장첸을 상대할 때, 카타르시스가 엄청 크게 느껴졌습니다. 이제야 잡았구나. 묵사발을 만들어줬으면 좋겠다. 게다가 조선족을 모두 악으로 치부하는 것이 아닌, '나쁜 조선족'을 잡는 한국 경찰의 구도로 이끌어나간 것도 좋았습니다. 대림동에서 식당을 운영하는 조선족 역시 마석도가 지켜야 할 시민 중 한 명이니까요. 적어도 선과 악을 구분할 때, 거시적인 시각으로 보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하지만 이번 범죄도시 4는, 감정선이 흐릿합니다. 너무 거시적으로만 표현한다고 할까요. 피해자 어머니의 자살, 동료의 부상, 근로자분의 부상, 이 모든 게 '필요에 의한 재료'로 쓰인 느낌이었습니다. 마석도의 분노를 이끌어내기 위한(동시에 관객들의 분노를 이끌어내기 위한) 용도로 '사용'된 느낌이랄까요. 범인을 잡고 뒤늦게 찾아간 묘원 역시 아주 짧게 보여줍니다. 감정이 채 해소되기 전에 컷이 변하죠. 그 컷은 바로 '장이수'. 마석도에게 분통을 터트리는 장면으로 컷이 바뀝니다. 이 짧은 장면 변화를 보고 알아차렸습니다.
'아, 그냥 소비했네.'
근데 사실, 상업영화에 이런 게 뭐가 중요하겠습니까. 감독과 작가가 '얘 나쁜 놈이야.'라고 지정해 놓으면 군말 없이 따라야 하고, '이거 슬픈 장면이야.'라고 지정해 놓으면 슬퍼하는 게 관객의 역할 아니겠습니까? 게다가 이미 관객 1,000만을 넘겼습니다. 개연성과 핍진성의 부재, 스토리의 조악함 같은 건 오락영화에서는 그다지 중요한 요소가 아니라는 걸 방증하는 것이겠죠. 설령 그것이 실제 사건을 다뤘다고 해도 말입니다.
또 다른 문제점은 '웃음'입니다. 마석도는 경찰입니다. 경찰이 되려면 시험을 봐야 합니다. 그리고, 그 시험은 난도가 높죠. 하지만 중간중간 나오는 개그는 마석도를 바보처럼 보이게 만듭니다. 그리고 그 웃음마저 너무 조악하죠. 영화에서 나온 개그를 소개팅에서 써먹는다면, 그 소개팅은 백방 실패할 겁니다.
"동기화가 뭔지 아세요? 제가 핸드폰 바꾸면 동기들이 달려와서 전화번호 막 입력해 주는 거예요."
뺨이나 안 맞으면 다행이죠.
'그냥 마석도의 캐릭터가 웃겨서 그런 거잖아.'
맞습니다. 마석도의 캐릭터가 웃기니까 통하는 겁니다. 마석도라는 캐릭터가 아니었으면 이 영화는 스토리, 개연성, 유머 모두 낮은 평가를 받았을 거란 말이 되겠죠. 그 때문에 영화를 보는 내내 범죄도시 4가 아니라, 마석도의 브이로그를 보는 기분이었습니다. 그렇기에 필연적으로 마석도가 나오지 않는 장면은 자극적이거나, 지루할 수밖에 없죠.
마석도가 짊어진 짐을 덜어주는 게 바로 장이수입니다. 장이수가 없었다면 이 영화는 정말 마석도의 브이로그가 될 뻔했습니다. 다시 말해, 이 영화는 '캐릭터' 빼면 내용이 없다는 겁니다. 영화의 전체적인 내용보다는, 장이수가 웃겼던 장면, 마석도가 싸운 장면이 '마치' 숏츠처럼 단편적으로만 기억에 남습니다. 그 좋은 캐릭터인 장이수 역시 바보가 됩니다. FDA 배지를 들고 자랑스러워하는, 나중엔 경찰 사칭죄로 잡혀가는 결말을 맞이하죠.
영화에 나오는 캐릭터들은 바보입니다. 분배를 제대로 해주지 않아서 죽어버린 바보(장동철), 바보한테 설설 기다가 백창기한테 뚜드려 맞는 바보(권 사장), 이용만 당했던 게 억울해서 한마디하려고 한국에 들어왔다가 잡힌 바보(백창기), 바보 따라가다가 같이 잡힌 바보(조 부장), 장이수 못살게 구는 바보(마석도), 바보한테 속은 바보(장이수). 달달한 게 먹고 싶어서 들어갔더니 접시에 설탕과 수저만 달랑 있는 느낌이었습니다. 수저와 접시는 고급이지만, 내용물은 그냥 백설탕이 전부인 것 같은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습니다. 배우와 액션은 훌륭했지만, 결국 그건 가게의 수저와 그릇 같아서 제가 가지고 나올 수는 없습니다. 남는 건 제가 먹은 백설탕 뿐.
'너 왜 웃자고 만든 영화에 죽자고 달려들어.'
맞습니다. 웃자고 만든 코믹영화에 너무 죽자고 달려들었습니다. 저는 그저 1,000만 관객 중 한 명으로서 제 감상평을 말한 것뿐입니다. 저 역시 영화가 재미없진 않았습니다. 다만, 설탕을 퍼먹는 기분을 지울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마동석은 실제로 한 인터뷰에서 "범죄도시 1~4편은 1부, 5~8편은 2부가 될 예정이다."라고 밝혔습니다.
그리고 마석도가 범죄자들을 때리는 이유도 5편에 나온다고 하죠.
새로워질 범죄도시 5는 어떨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