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평범한 인문계 대학원생의 이야기
첫글은 역시 자기소개
나는 n년차 인문계 일반대학원 대학원생이다. 학부와 같은 대학원에서 박사과정까지 수료했다.
'박사 수료'라니... 누군가에겐 거창해 보일 수 있지만, 사실 전혀 그렇지 않다.
'박사 수료'란 거창한 단어에 비해, 내 주위에 있는 사람들은 20대 후반에서 30대 초중반에 불과하다.
나도 29살까지 박사과정을 마치고, 30살이 되어 드디어 '박사 수료'의 타이틀을 갖게 되었다.
남들이 취업 준비하고 사회 초년생을 지낼 때, 나는 대학을 몇 년 더 다닌 것뿐이다.
사실 대학을 몇 년 더 다녔다고 하면, 대학생의 삶과 대학원생의 삶이 비슷할 거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아니, 대학원생의 삶이 더 '꿀'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학부생은 한 학기에 18학점을 듣는데, 대학원생은 주로 한 학기에 9학점을 듣기 때문이다.
하지만 학부생이 한 학기 내내 보는 책 따위는 대학원생의 첫 주 수업 분량에 불과하다.
일주일에 한 번 경기가 있다고 해서, 축구 선수가 일주일에 하루만 축구를 하는 게 아닌 것처럼,
일주일에 세 번 수업이 있다고 해서, 우리가 일주일에 세 번 공부하는 건 아니다.
사실 공부량보다 더 큰 차이는, 대학생은 '학생'으로서 공부를 하지만, 대학원생은 아니라는 점에 있다.
학교에서 공부를 하니 학생처럼 보일 수 있겠지만,
'학생'으로서의 공부와 '업'으로서의 공부는 굉장히 다르다.
'가수'가 '노래하는 사람'인 것처럼, 우리는 '공부하는 사람'이라고 해야 할지 모른다.
가장 큰 문제는 그 '공부'가 밥을 먹여주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대학원생은 필연적인 N잡러이다.
물론, 금수저는 아닐지 모른다. 하지만 아무리 금수저여도 이 나이 먹고 부모님께 손을 벌리는 건 부끄러운 일 아닌가?
우리는 '공부하는 사람'이므로, 밥 먹여주는 일을 따로 하지 않을 수 없다.
나는 대학원생이다. 논문 편수와 발표 건수로 실적과 평판을 쌓아야 한다.
나는 서울의 모 대학에 소속된 연구원이다. 주 20시간 학부생 글을 첨삭하며 월급을 받는다.
나는 과외 선생이다. 입시 전문 과외 업체에 소속된 국어과 방문 강사로서, 매칭된 학생 네 명을 가르친다.
나는 프로젝트 연구보조원이다. 우리 과 교수님이 책임 연구원으로 있는 프로젝트의 연구보조원으로 일한다.
나는 두 학회의 총무간사이다. A학회는 춘계, 추계 B학회는 하계, 동계 학술대회와 관련된 온갖 잡무를 맡는다.
A학회는 월급 '10만 원', 즉 '연봉' 120만 원을 주고, B학회는 '연봉' 60만 원을 준다.
그렇다, 나는 현재 여섯 개의 공을 저글링 하는 삶을 살고 있다.
누구보다 열심히 사는 것 같지만, 사실 스스로 그렇게 느끼지는 않는다.
나는 '공부하는 사람'이자 '연구하는 사람'인데, '공부'와 '연구'를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번 학기 나의 상태메시지는 '본업을 잊지 말자'가 몇 달째 바뀌지 않고 있다.
나는 연구원이자 과외 선생이자 프로젝트 연구보조원이자 총무간사이지만,
나는 '공부하는 사람'이다.